138화. 완벽한 행복
카를로스 에덴버의 처형일이었다.
그동안 베를리아는 말 그대로 카를로스를 괴롭혔다. 신체적인 위해를 가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에게 손끝도 닿지 않았다.
그저 베를리아를 보면 분노를 토해내는 카를로스를 담담한 눈으로 구경했을 뿐이었다. 마치 철창 속 동물을 구경하는 무감한 사람처럼.
카를로스는 사지가 멀쩡해도 마법에 의해 구속당하여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 상태로 그는 화를 참지 못해 끝없이 몸부림쳤고 홀로 다치기도 했다. 그러나 다음날 눈을 뜨고 나면 카를로스는 다시 멀쩡해져 있었다.
얼마든지 발버둥 치라는 듯이.
그렇게 해서 맞이한 처형 당일, 카를로스는 그동안 지친 것인지 예상보다 반응이 없었다.
물론 그것은 단두대에 오르기 전의 일이었다.
‘어차피 환영으로 죽은 것처럼 만들 테지만….’
베를리아는 단두대로 끌려오는 카를로스를 똑똑히 응시했다. 그녀가 굳이 굳이 죽이지도 않을 그를 단두대에 세우는 이유가 있었다.
“기만자!”
“악마의 아들!”
카를로스가 등장하자마자 성난 군중이 소리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순간 누군가가 그에게로 돌을 던졌다.
무엇이든 시작이 어려운 법이었다.
어떤 사람이 던졌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분노에 휩싸인 군중은 곧 너나 할 것 없이 주변의 돌을 주워들었다. 크고 작은 돌멩이들이 여지없이 카를로스에게로 날아들었다.
퍽!
그리고 그것이 마침내 카를로스의 이마에 맞아 피를 냈다. 그러자 그의 두 눈에 불꽃이 튀었다.
“감히…! 네깟 것들이 나한테!”
모멸감과 치욕감에 가득 찬 카를로스가 크게 발버둥 쳤다. 철컹철컹, 그의 손목과 발목에 연결된 구속구의 소리가 요란했다.
베를리아의 비호 아래 황태자가 된 이후로 이런 멸시를 당해 본 적 없을 카를로스였다.
게다가 별 볼 일 없던 4황자였던 시절의 기억으로 인해 그는 얕잡아 보이는 것을 지독히도 싫어했다.
그러니 카를로스가 애초에 이렇게 많은 이들에게 비난받는 일을 견딜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베를리아는 웃었다.
베를리아는 자신이 받았던 모든 것을 카를로스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그를 단두대에 올린 일은 그 염원의 정점인 셈이었다.
“쳐 죽일 놈!”
“학살자!”
카를로스가 그런 반응일 보일수록 서로 맞붙듯 민중들의 분위기는 더욱 달아올랐다. 마침내 처형식이 자꾸만 지연되는 것을 보다 못한 이들이 군중을 말리도록 했을 때, 이미 그는 만신창이가 된 뒤였다.
사람들의 돌팔매질이 멎자 그제야 베를리아가 처형대 위로 올라왔다. 카를로스의 앞을 가리고 선 병사들이 비켜서기 전, 그녀가 그에게로 다가갔다.
군중이 던진 돌에 옷과 피부가 찢기고, 흙과 먼지 그리고 피에 더럽혀져 그 누구도 고귀한 황태자라 생각 못 할 몰골을 한 카를로스에게로.
“축하해, 이제야 너다워진걸.”
베를리아가 작게 속닥였다. 기진맥진해있던 카를로스가 그 순간 크게 분노했으나, 그녀가 손에 들고 있던 손수건을 그의 입에 쑤셔 넣는 바람에 소리는 새어 나오지 못했다.
마법이 아니라 천 뭉치 따위에 입이 막힌 카를로스의 표정에 다시 치욕감과 수치심이 가득해졌다.
그 얼굴을 만족스레 바라보며 베를리아는 비켜선 병사들의 사이로 군중 앞에 섰다.
백성들의 이목이 베를리아에게로 쏠렸다. 황태자의 개였다가, 그에게 이용당해 철저히 버려졌다가, 악마의 숭배자라는 오명까지 썼던 여자. 그러나 끝끝내 모든 진실을 밝혀낸 성녀의 편에 선 사람.
그 얼마나 극적인 존재란 말인가.
“카를로스 에덴버의 처형식을 집행한다.”
그 말이 그런 상대의 입에서 떨어지는 순간은 또한 얼마나 극적인지.
“와아아아!”
곧이어 만인의 입에서 함성이 터져 나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단두대의 칼날이 카를로스의 목을 향해 추락했다.
서걱.
그 소리와 함께 카를로스의 목이 피로 물든 바닥을 나뒹굴었다.
***
카를로스의 환영이 처형당했다. 다만 단두대에 목이 잘리는 고통은 고스란히 느끼게 했기 때문에, 그는 직후 혼절했다. 그리고 베를리아는 곧바로 카를로스의 신원을 넘겨받았다.
이제 카를로스 에덴버를 어떻게 처리하든, 그것은 온전히 베를리아의 몫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황제와 교황의 자리가 모두 비어 버린 이 시기에, 누가 그 자리를 이어받느냐였다.
다른 신들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성검 속 영혼들 또한 봉인에서 풀려났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메리쉬에게 있던 교황의 자격도 소실되었다.
델로미아나 가의 가주가 당황하긴 했으나, 어차피 그로 인해 성녀와 제대로 된 줄이 생겼으니 손해 본 셈은 아니었다.
리리카의 육체에 있는 신성력을 바탕으로 주장한다면 말이 달라지겠으나, 애초에 메리쉬 또한 베를리아의 곁에 붙어다닐 수 없는 교황 자리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렇게 해서 신전과 황실을 통틀어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은 결국 한 명뿐이었다.
“…베릴, 나 지금 괜찮아 보여요?”
그 유일한 한 사람, 안젤라가 잔뜩 긴장한 채로 베를리아에게 물었다. 곧 신전과 황실이 통합된 새로운 제국의 초대 황제, 안젤라 애거스틴의 즉위식이었다.
“앤지야 언제나 멋졌죠.”
베를리아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조금 안도한 듯 마주 미소하던 안젤라가 다시 조금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그런데 정말 이걸로 괜찮겠어요, 베릴?”
에를니아와 에덴버 황실을 끌어내리는 일은 결국 베를리아가 해낸 것이었다. 그 진실을 알고 있는 안젤라는 그녀가 아닌 자신이 새로운 나라의 황제 자리에 정말로 올라도 될지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앤지, 나는 한 나라의 군주감이 아니에요.”
베를리아가 단호히 말했다. 제국이라는 커다란 땅덩이와 사람들을 다스리기에는 자신은 욕심이 너무 많았다. 그녀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나와 내 사람을 제외한 다른 이들을 또 돌볼 만큼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 아니에요. 게다가 욕심도 많죠. 백성들을 위해 희생한다? 나는 그런 건 생각해 본 적도 없어요.”
베를리아는 안젤라가 정확히 자신이 말한 점들의 반대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게다가 안젤라의 사사로운 욕심은 그녀의 걸맞은 옳은 길을 가는 것에 있었다.
그 신념조차 다수를 위한 일에 어긋나지 않을진대, 안젤라보다 더 황제의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카를로스의 처형을 집행하는 일을 베를리아가 맡은 이유 또한 이 때문이었다.
아무리 헤어졌다고는 하나 안젤라의 이미지상, 그녀가 카를로스의 사형을 직접 말한다면 괜한 말이 돌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아도 에를니아가 어떤 악행을 저질렀는지 밝혀지며 제국의 근간이 흔들린 시점이었다. 안젤라는 되도록 아무 결점 없이 황제의 자리에 올라야만 했다.
“안젤라가 정 미안하면 내 직위나 올려 줘요. 나 앞으로 놀고먹을 예정이거든요.”
베를리아의 웃음이 장난스러웠다. 물론 반 진담이기는 했다.
베를리아는 남들이 보통 말하는 것처럼 얌전히 물러나 시골에 내려갈 생각 따위 없었다. 대륙 중 어디를 가도 이 나라의 수도만큼 문명을 누릴 수는 없었다. 그런데 무엇 하러 시골 영지로 내려가 그 모든 것을 포기한단 말인가.
“공작위는 베릴이 싫어할 테니, 후작위가 좋겠네요.”
안젤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녀가 이끌어 갈 나라에서 귀족 중 누구도 의무를 저버리도록 두지 않을 것이었다. 직위가 높아질수록 할 일이 많아지는 것은 당연했다.
“역시, 앤지가 날 잘 알아준다니까요.”
베를리아가 능청스레 미소했다. 그녀도 아예 놀 생각은 아니었다. 계급 사회에서 살기 위해서는 권력이 필수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결국 베를리아가 필요했던 것은 적당히, 적당히 해도 누군가 굳이 건드리지 않을 만큼의 직위였다.
제국에서 세 손가락에 꼽히는 공작이 되어 견제를 받느니, 후작위를 받는 것이 그녀로서도 훨씬 마음이 편했다.
“그럼 다녀올게요.”
안젤라의 어조가 이제야 편해진 듯 했다. 베를리아가 그녀의 등을 살짝 떠밀어 주었다.
“어서 가세요, 황제 폐하.”
조금 과장되게, 지금까지와는 달리 정중히 무릎을 굽혀 인사까지 올리면서.
안젤라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가 광장에 모인 백성들을 맞이하기 위해 단상으로 향했다. 베를리아가 그 뒤를 단단히 지키고 있었다.
“이너스틴 제국의 유일한 태양, 안젤라 이너스틴 폐하께서 드십니다!”
대신관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멀리서부터 함성이 울려 퍼졌다.
이너스틴, 고대어로 평화. 안젤라가 다스릴 나라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단어였다.
***
베를리아가 황성에서 나오자마자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메리쉬가 다가왔다. 그가 웃으며 물었다.
“이제 끝난 건가요, 베릴?”
그 말을 들은 순간 지금까지 자신도 모르게 긴장해 굳어져 있던 베를리아의 어깨에 탁 힘이 풀렸다. 감정이 갑작스레 벅차올랐다.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달려갔다.
“조심해요.”
뛰어들듯 안긴 베를리아를 받아 주며 메리쉬가 말했다. 그녀를 받아낸 메리쉬의 품은 그녀가 믿고 뛸 수 있을 만큼 한 점 흔들림 없이 안락했다.
“네가 있잖아.”
베를리아가 메리쉬의 목에 두 팔을 감으며 말했다. 그녀가 거리낌 없이 제 무게를 실어 편히 안겨도 그는 여전히 굳건했다.
이 품처럼, 앞으로 자신의 삶은 흔들림 없이 굳건할 것이다. 베를리아가 환히 웃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이겨냈다.
“사랑해, 멜.”
베를리아가 설레는 마음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풍족하고 안온한 삶. 그녀가 원하던 전부가 여기에 있었다.
“사랑해요, 베릴.”
메리쉬가 마주 웃으며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베를리아가 화답하듯이 그의 목을 끌어당겼다.
두 사람의 입술이 맞물리고 서로의 숨결이 오갔다. 심장의 박동이 시끄러웠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누구의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으니까.
아, 완벽한 행복이 여기에 있었다.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