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광대의 마지막(10)
베를리아의 얼굴이 서늘하게 굳었다. 그녀가 충격 받은 눈으로 메리쉬를 쳐다보았다. 배신감이 밀려 왔다.
“지금… 나보고 네 목숨으로 흥정하자는 거야, 멜?”
베를리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를 살리고자 대신 죽은 사람이 있었다. 그것은 영원토록 그녀의 고통일 것이다.
그런데 다른 누구도 아닌 메리쉬가 자신의 목숨을 두고 흥정하다니. 단언컨대 단 한 치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성검 속 신들에게 부탁해서 내 목숨과 카를로스 에덴버의 목숨을 연결했어요.”
카를로스가 신전으로 올 것을 알았다. 그래서 메리쉬는 그보다도 먼저 도착해 두 목숨을 연결하기 위한 준비를 모두 끝내 놓았다.
카를로스와 자신의 목숨을 연결하기 위해서는 오직 그 대상들만이 같은 공간에 일정 시간동안 있어야 했다. 그게 메리쉬가 쭉 카를로스에게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이유였다.
“카를로스에게 베릴의 저주를 옮기고, 저놈을 살려 둬요. 허튼짓하면 내 목숨을 끊어서라도 막을 테니.”
메리쉬는 베를리아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는 제가 만든 그녀의 고통을 기꺼이 눈에 담았다.
베를리아가 보이는 배신감 앞에 당장이라도 무릎 꿇고 사죄하고 싶었으나 이번만큼은 결코 그럴 수 없었다. 그러니 최소한 자신이 한 일을 외면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메리쉬는 베를리아가 더 오래 제 곁에 있기를 바랐다. 이것은 그의 욕심으로 인한 결과물이었다.
“멜!”
베를리아가 분노하여 소리쳤다. 결국은 메리쉬의 생을 통째로 내걸어 카를로스 에덴버의 족쇄가 되겠다는 의미지 않은가.
베를리아의 두 입술이 꾹 다물렸다. 화를 내듯 메리쉬의 이름을 외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무어라 말한단 말인가.
그 목숨은 온전히 네 것이 아니라고?
너를 살리기 위해 리리카가 죽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그 모두 메리쉬 때문이 아니었다. 그 모두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니 베를리아가 어찌 그에게 그것들을 따지겠는가.
“…제발, 멜. 제발 널 위해 살아.”
베를리아가 제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질식해 죽을 것만 같았다.
베를리아의 두 번째 삶은 메리쉬가 제 영혼을 대가로 바친 산물이었다. 세 번째 삶 또한 리리카의 덕이었다. 결국 이 자리에 돌아와 네 번째 삶을 살면서도, 또 리리카가 그녀의 연인을 살렸다.
베를리아의 삶은 그녀를 사랑하는 이들의 희생으로 끝없이 점철되어 있었다. 그것은 응당 자신이 감당해야 할 무게임을 알면서도… 때로는 숨이 턱턱 막혔다.
대체 나는 무엇으로 너희들에게 이 빚을 갚는단 말인가.
사람이란 참으로 간사한 존재였다. 내게 절대적이고 내게 맹목적이어서 너무나 좋았던 그가, 이제는 고통이 되었다는 것을 보면.
“싫어요.”
메리쉬가 베를리아의 두 손을 잡아 내렸다. 그가 그녀의 뺨을 손으로 감싸 자신을 보게 했다.
“내게 욕심을 부리라고 한 건 당신이었잖아요, 베릴.”
메리쉬의 두 눈은 처음부터 그랬듯이 단 하나만을 갈망하고 있었다.
“내 멋대로 베릴의 뜻을 꺾었으니 나를 미워해도 좋아요.”
메리쉬는 단 한 번도 베를리아가 없이 살 생각 따위 해 본 적 없었다. 오직 그녀만이 그의 욕망이자, 삶이고 세상이었으므로.
“그래도 당신은 나를 사랑할 거잖아요?”
그러니 카를로스 에덴버를 살려 둔 것에 대한 원망도, 멋대로 행동한 것에 대한 미움도 곁에서 모두 받으리라. 메리쉬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메리쉬는 감히 확신했다. 자신이 이런 짓을 해도 베를리아는 저를 사랑하리라.
그리고 그 전제가 있는 이상 메리쉬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설령 그것이 지독히도 사랑하는 이의 미움을 감내하는 일일지라도.
“…내가 널 어떻게 미워해.”
베를리아가 허탈하게 웃었다. 처음부터 정해진 답이었다.
베를리아도 살고 싶었다. 더 행복하게, 더 오래. 그러나 여기까지 오는 동안의 희생이 너무 많아서… 하필 그것이 그녀의 것이 아니어서.
그래서 염치가 없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끝까지 베를리아를 대신하여 그 모든 것을 제 탓으로 돌리는 남자가 눈앞에 있었다. 그런 사람을 감히 어떻게 미워한단 말인가.
메리쉬의 제안은 솔직히 말해서 지금 이 상황에 가장 이상적이었다. 그는 절대로 베를리아를 배신할 리 없었고, 만약 카를로스가 그녀를 위협한다면 정말로 제 목숨을 바칠 사람이었으니까.
베를리아의 생은 또 다시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인해 이어졌다. 그게 베를리아를 웃지도 울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놀고 있군.”
그때, 그들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카를로스가 빈정거렸다. 그의 눈이 흉흉하게 베를리아와 메리쉬를 번갈아 봤다. 어느 사이 카를로스의 손에 들린 검이 그의 목에 겨눠져 있었다.
“감히 나를 두고 너희 멋대로 흥정하고, 너희끼리 행복해지려는 걸 내가 두고 볼 것 같아?”
이제 더는 에를니아에게도 희망을 걸 수 없다는 것. 그것은 애초에 자신에게 남은 게 몰락밖에 없음을 의미했다. 카를로스는 그런 삶을 사느니 죽는 게 낫다고 여겼다.
“너는 나 없이 절대 행복하지 못해, 베릴.”
더불어 마지막으로 베를리아가 자신을 절대로 잊지 못하도록 할 기회가 아닌가. 카를로스의 눈에 광기가 번들거렸다. 그가 그대로 검을 내리눌렀다.
“컥…!”
그러나 검은 피부에 얕게 박힌 채로 더 이상 들어가지도 빠지지도 않았다. 어느덧 베를리아가 손을 뻗어 에르젠타샤의 힘을 사용하고 있었다.
“아니, 나는 너 없이 행복할 거야.”
베를리아가 카를로스에게로 걸어갔다. 그녀는 더 이상 갈등하지 않았다.
죽느니만 못한 삶. 사실은 원래 그것이 제가 카를로스에게 주려던 생이 아니던가. 그저 기존의 계획대로 이행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게 훨씬 더 카를로스를 비참하게 만드는 길이기도 했고.
“그렇지만 너는 나 없이 불행하겠지.”
카를로스의 불행이 오직 자신이 없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베를리아는 그가 저를 배신했던 순간들을 평생 기억하길 바랐다.
그 순간을 후회하고 또 후회해도 되찾을 수는 없음을 두고두고 되새기길 원했다.
“그조차도 내 행복일 거야, 카를로스 에덴버.”
베를리아는 검을 빼지도, 밀어 넣지도 못해 고통스러워하는 카를로스를 보며 보란 듯 환하게 웃었다.
마침내 광대의 발밑에 짓밟힌 무대의 잔해가 선명했다.
***
그대로 카를로스를 기절시켜 들고 황성으로 돌아왔을 때, 모든 상황은 종료되어 있었다.
베를리아가 신전으로 향하기 전, 미리 신호를 보내고 간 덕에 데니안이 기사를 이끌고 혼란을 정리해 두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이 황제와 황태자의 대화를 듣고 수긍했으나 예외는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었다. 황실이나 카를로스를 전적으로 따르는 기사들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데니안은 착실히 베를리아의 부탁을 이행했고 문제가 될 만한 자들은 이미 한차례 걸러진 뒤였다. 그로 인해 황궁을 점령하기란 쉽디 쉬운 일이 되었다.
그리고 황실의 보고와 비밀 서고에서 그간 에를니아와 에덴버가 짜고 해온 악행들에 관한 증거물이 잔뜩 발견되었다. 황실과 신전의 구조가 비슷했고, 에덴버의 핏줄 속 에를니아의 힘에만 반응하는 문들은 안젤라가 열 수 있었던 덕이었다.
세상을 기만한 에를니아의 신상이 사람들의 손에 의해 여기저기서 부서져 내렸다. 마땅한 지도자가 없는 황실은 신전의 관리 하에 들어갔다. 그 많은 일이 몰아치듯 결정되었다.
언제나 세상이 뒤집히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리하여 지금, 베를리아는 복구된 황실의 지하 감옥에 갇힌 카를로스의 앞에 서 있었다.
“네 처형일이 결정됐어.”
베를리아가 말했다. 카를로스가 핏발 선 눈으로 그녀를 보며 대답했다.
“그냥 죽여.”
그 말에 베를리아는 고요히 웃었다.
“아, 네가 내게 그 말을 할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겠지.”
차라리 죽여 달라, 너는 앞으로 두고두고 내게 그리 빌게 될 터였다. 참으로 더없이 완벽했다.
“날 위해 살아.”
‘날 위해 죽어라.’
그 언젠가 카를로스가 내뱉었던 말에 대한 베를리아의 대답이었다. 그 또한 그것을 아는지 와락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메리쉬를 위한 생명선, 내가 받은 저주를 대신 감당할 액받이. 앞으로 네가 맡을 가장 중요한 역할이야, 카를로스 에덴버.”
베를리아가 카를로스에게로 손을 뻗었다. 손끝을 따라 검은 기운이 흘러나가 그에게로 스며들었다.
“그따위…! 컥…!”
분노하여 소리치려던 카를로스의 상체가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베를리아의 얼굴에 붉은 낙인이 떠올랐다가, 그것이 고스란히 그의 얼굴에 새겨졌다. 저주가 그녀에게서 카를로스에게로 옮겨 가고 있었다.
검은 기운이 무자비하게, 주저 없이 카를로스에게로 파고들었다. 아마도 죽음보다 더한 고통일 터였다. 베를리아는 그가 받을 충격 따위 일말도 신경 쓰지 않았으니까.
드드득.
카를로스가 고통에 돌바닥을 손톱으로 긁는 소리가 적나라했다. 손톱이 빠지고 손끝에서 피가 흘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손에 힘을 풀지 못했다. 손에서 느껴지는 고통보다 검은 기운이 자신의 온몸을 헤집는 고통이 월등히 컸기 때문이다.
“버러지 같네.”
그런 카를로스를 두고 베를리아가 평했다. 언젠가 자신을 내려다보던 그가 지금은 자신의 앞에 바닥을 기며 헐떡였다. 비웃어 주는 것이 마땅했다.
“걱정하지 마, 넌 절대 미치거나 죽지 않을 테니까. 그러기 위해서 내가 아주 세심하게 신경 쓸 거야.”
베를리아가 뚝 기운을 거둬들였다. 그녀에게 깃든 저주를 한 번에 다 옮겨 버리면 카를로스가 정말로 미쳐 버릴지도 몰랐다.
물론, 그것은 절대 안 될 말이었다. 카를로스는 멀쩡한 제정신으로 고통 받아야만 했으니까.
“너는 단두대에 오를 거야. 그리고 거기서 죽은 것으로 처리되겠지.”
베를리아가 조곤조곤하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그렇게 세상 사람들에게서 네 존재가 지워지고 나면, 나는 너를 뒷골목의 쓰레기장에 던져놓을 거야.”
베를리아와 메리쉬가 태어났던 가장 낮은 곳. 뒷골목의 이들조차 그곳에는 걸음 하지 않는다.
왜? 최악 중의 최악, 모든 폐기물이 거기에 모여 있으니까.
그곳에 버려진 것은 누가 어찌 다루든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절대적인 무법지대와 다름없었다.
“네 고통은 그때부터 진짜로 시작이야, 카를로스 에덴버.”
베를리아가 환희했다. 아, 그녀가 내린 고통에 허덕이는 카를로스의 모습이 선연했다.
이제 베를리아가 만든 무대 위의 광대는 카를로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