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깽판치는악녀님 (134)화 (134/148)

134화. 광대의 마지막(7)


 

“…데니안은 반대하는 거야?”

베를리아는 이전에 그랬듯이 카를로스의 행동에 그 어떤 의문도 품지 않았다. 그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한 말을 꺼냈을 뿐이었다.

“그래, 반대할 거야.”

“데니안과 대치하게 되더라도 내가 망설이지 않길 바란 거구나.”

베를리아가 카를로스를 대신하여 그의 행동을 변명했다. 이 역시도 그녀가 정신을 차리기 전, 그를 사랑할 때 매번 하던 행동이었다.

“데니안에게는 미안하지만… 황실 기사단장이니 어쩌면 서로 검을 겨누게 될지도 몰라.”

데니안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카를로스의 눈은 베를리아를 향해 있었다. 하나도 미안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나는 언제나 네 편이야, 카를.”

잠시 뜸을 들이던 베를리아가 대답했다. 카를로스 에덴버를 사랑해서, 뭐든지 버릴 수 있던 그 베를리아 리들턴처럼.

카를로스의 두 눈이 만족스러움으로 차올랐다. 그 속에서 데니안을 향한 죄책감이라고는 단 한 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메리쉬, 그자는 어디에 있고 다른 수하를 데려온 거지?”

카를로스가 떠보듯이 물었다. 여기까지 와 놓고서도 성물 반지의 기능과 세뇌 여부를 또 다시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메리쉬가 누구야, 카를?”

에르젠타샤가 있었으니 성물 반지가 본디 어떤 기능을 하는지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베를리아는 세뇌에 완벽히 걸린 사람처럼 메리쉬를 아예 모르는 양 굴었다. 그러자 카를로스는 더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내가 착각한 모양이야. 네가 자주 데리고 다녔던 수하가 있었던 것 같거든.”

“아, 재스민을 말하는 건가?”

“그 이름이었던 거 같기도 하고. 그것보다 황위를 가져오려면 명분이 있어야 해.”

카를로스가 말을 돌렸다. 혹시라도 베를리아가 메리쉬를 기억할 일이 없게 더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모른 척 그의 말에 넘어가 주었다. 카를로스를 사랑하던 그녀는 그래도 의심받을 일이 없었으므로.

“그래서 오늘 밤 황제를 죽일 거야.”

“내가 뭘 하면 돼?”

언제나 이런 일을 처리하는 것은 자신의 역할이었기에 베를리아가 물었다. 그러나 카를로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황제와 그 후계만 아는 통로가 있어. 거기로 들어가야만 해. 그러니 내가 직접 할 거야.”

이건 베를리아가 예상하던 바였다.

카를로스는 그녀의 세뇌가 언제 풀릴지 속으로 항상 불안감을 가지고 있을 터였고, 그는 불확실한 상대에게 중대한 일을 맡길 자가 아니었다.

“대신 넌 황실 기사들을 맡아 줘.”

그거야 어려울 것 없었다. 데니안이 베를리아의 편이었으니까.

그러나 베를리아는 전혀 티 내지 않고 한없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조심해, 카를.”

베를리아가 자신의 목에서 펜던트를 빼내 카를로스의 목에 걸어 주었다.

평소에 그녀와 그가 사용하던 통신 아티팩트와 똑같은 모양의 목걸이였다.

“이걸 가져가. 무슨 일인지 예전 거는 망가졌더라. 무슨 일 있으면 반드시 연락해. 바로 갈게.”

베를리아가 처형일 직전 모든 것을 엎어 버린 후 서로 간에 사용한 적이 없는 통신 아티팩트였으니, 그간 아티팩트를 어떻게 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랬기에 카를로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밤이 결전의 날이었다.

***

카를로스는 밤을 틈타 황제의 침실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침대 위 황제의 그림자가 보이자 곧바로 들고 있던 칼을 내리꽂았다.

까강.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황제의 주변으로 보호막이 형성되었다. 카를로스의 검이 그로 인해 튕겨 나온 순간 황제가 눈을 떴다.

“네놈이 언젠가 내게 검을 겨누리라 생각했지.”

황제가 말했다. 성물의 힘이 카를로스를 옥죄었다.

“에덴버의 핏줄은 항상 그런 식이었으니까.”

카를로스가 그 힘을 자신이 가진 성물 반지로 떨쳐내며 황제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그럼 학살자의 핏줄이 어디 갈 줄 알았나?”

카를로스가 황제를 향해 빈정거렸다.

황가에는 황제와 황태자만이 알게 되는 비밀이 여럿 있었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에덴버가 실은 신을 핑계로 수없는 학살을 해 왔다는 점이었다.

“황제, 당신도 신의 뜻을 이유로 이민족들의 땅을 약탈했지 않나. 내가 당신에게서 황위를 약탈한다고 한들 당신과 내가 뭐가 다르지?”

카를로스는 이제 더 이상 황제를 아비라고도 부르지 않았다. 실제로 머리가 크고 난 이후로는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난 적어도 네놈처럼 핏줄을 전부 다 죽이지는 않았어! 네 누이들과 형제들을 모조리 도륙하더니, 이제는 감히 아비인 내게까지 검을 겨눠!”

황제가 분노하여 소리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를로스는 다시 검을 강하게 쥐고 황제에게 덤벼들었다.

쾅!

성물이 만든 방어막에 재차 카를로스의 검이 막혔다. 이토록 커다란 소리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달려오는 기사들이 없었다.

그제야 이상함을 느낀 황제가 목소리를 높였다.

“게 누구 없느냐! 이놈을 추포해라!”

그러나 밖에서는 여전히 아무 응답도 없었다. 카를로스가 삐뚜름하게 웃으며 말했다.

“소용없어, 아무도 오지 않을 테니까.”

카를로스는 베를리아가 자신의 말대로 황실 기사들을 통제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자신만만한 그의 모습에 황제의 낯이 굳어 버렸다.

“내가 이 에덴버의 황제다! 그런데 네가 감히 나를…!”

귀족들에게 나라의 이권을 팔며 평안을 누리던 황제였으나 우습게도 황제로서의 자존심만은 대단했다.

그는 누구에게도 받지 못하던 취급을 제 아들에게 받으니 두려우면서도 자존심이 매우 상하는 모양이었다.

“에덴버의 황제이니 결과를 받아들이시지요, 아바마마.”

쾅!

카를로스가 노골적으로 황제를 비웃으며 또 다시 방어막에 검을 내리쳤다. 쩌적. 이번에도 그는 밀려났으나 방어막 또한 금이 가 있었다.

“네 놈을, 네 놈을 살려 두는 게 아니었다…! 에덴버의 힘을 가장 크게 타고난 네 놈이 그 본성을 억누르지 못할 것은 자명한 일이었는데!”

믿고 있던 방어막에 금이 가자 황제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소리쳤다. 그는 혹시라도 누군가 듣고 자신을 구하길 바라는 것인지, 자꾸만 목소리를 높여 소리치고 있었다.

“역시 알고 있었군.”

황제의 말에 검을 한 번 더 내리치려던 카를로스가 우뚝 멈춰 섰다.

“내가 아무리 숨겼다고 해도, 황제인 당신이 내가 황족의 이능을 가졌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게 늘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카를로스가 싸늘한 분노와 경멸을 담은 눈으로 자신의 아비를 쳐다봤다. 그간 긴가민가했던 의심이 사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어머니가 약소국 출신이라는 사실도, 이미 황위 계승권자가 많다는 사실도… 제대로 된 이유는 아니었겠지. 당신은 그저 내가 죽기를 바랐던 거야. 내가 에덴버의 힘을 가장 많이 이었으니까. 당신이 내가 두려우니까.”

에덴버에서는 황족의 이능이 가장 강한 자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그것과 달리 실은, 황실의 비밀 서고 속에 존재하는 역사 기록서들을 찾아 보면 희한하게도 그렇지 않은 자들이 황제가 된 경우가 오히려 더 많았다.

그것은 에를니아와 에덴버에 관한 진실을 알고 있는 황제들이 자신들의 핏줄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욕망의 신 에를니아의 힘을 가장 짙게 물려받은 네놈이 욕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거라고 생각한 게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거냐! 네놈은 죽었어야만 했어!”

제 아들이 무서워 죽이려는 아비라니. 아무리 카를로스여도 제 아비가 그렇다는데 마냥 괜찮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로 인해 상처받기보다 분노하기를 택했다.

“그러게, 죽이질 그랬어. 초대 황제도 그 많은 신녀를 죽여 이 자리를 가졌고, 3대 황제도 성전이라는 이름으로 기어코 다른 나라를 모두 쓸어버린 후 에덴버를 유일무이한 제국으로 만들었는데 나라고 해서 아비 하나 못 죽일까.”

카를로스가 역대 황제들의 만행을 들먹이며 서늘히 미소했다. 그가 서서히 황제에게로 다가갔다. 방어막에 간 금 사이로 틈이 보였다.

아비가 아들을 죽이려 하고, 아들이 아비를 죽이는 것. 에덴버의 피는 원래 그런 것이었다.

카를로스는 그렇게 자신이 친아비를 죽일 거라는 사실을 합리화했다. 역대 다른 황제들도, 자신의 아비도 그랬으니까.

“당신이 죽이질 못했으니, 내가 당신을 죽이는 거야. 에덴버는 원래 욕망에 솔직한 핏줄이 아니던가.”

카를로스가 검을 높이 들어 내리쳤다. 쩌저적- 쿵! 소리가 남과 동시에 황제의 주변에 둘러진 방어막이 완전히 부서졌다.

“저, 저리 가…!”

황제가 놀라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살겠다고, 그는 엉덩이로 뒷걸음질 쳐 제 아들로부터 달아나려 했다.

“당신이 황제로 끝까지 살고 싶었듯이- 나도 황위를 원해. 내게 줘야겠어.”

“사… 살려, …억!”

황제가 더듬더듬 살려 달라 빌었다. 그러나 카를로스의 섬뜩한 칼날은 망설임 없이 황제의 심장 위에 내리꽂혔다. 단번에 심장을 관통한 검을 통해 피가 솟구쳤다.

“허억… 컥… 헉…!”

꼬챙이처럼 검에 심장을 꿰인 황제가 바닥에서 몸부림쳤다. 그리고 그 모습을 카를로스는 끝까지 눈에 담고 있었다.

그런데 돌연 조용하던 사위에 빠른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인제 와 황제를 살리려는 건가? 그렇게는 안 되지.’

카를로스가 검을 빼내 다시 한 번 확인 사살을 하듯 황제의 목을 내리그었다.

그대로 황제의 목이 잘려 나가며 카를로스가 다시 한 번 피를 뒤집어썼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황제의 숨이 툭 끊어지고 그의 팔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순간 침실의 문이 열렸다.

“큰일 났습니다, 황태자 전하!”

들어온 사람은 의외로 황제의 사람이 아니라 카를로스의 기사였다.

“무슨 일이지?”

카를로스가 제 아비의 피에 젖은 채로 기사에게 물었다.

“그것이….”

패기 있게 달려온 것과 달리 기사는 좀처럼 말을 꺼내지 못했다.

“말해.”

카를로스가 압박하듯이 기사에게 다가가자 그의 걸음을 따라 피로 새겨진 길이 만들어졌다.

그 악귀 같은 모습에 기사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방금 황태자 전화와 황제 폐하께서 나누신 대화가 대륙 전역에 퍼졌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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