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광대의 마지막(6)
카를로스 에덴버가 죽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베를리아에게 남은 저주를 다시 그에게로 되돌려놓아야만 하기 때문이었다.
신력을 가지고 태어난 것과 신력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인간은 모두 피를 가지고 있지만, 아무에게나 수혈받을 수 없는 것과 동일한 이치였다.
그러니 현 상황에서 베를리아에게 남은 저주를 완전히 없앨 가장 안정적인 방법은 카를로스가 그것을 부담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되면 에를니아가 또 다시 재기할 기회를 노릴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것은 걱정할 필요 없다. 에를니아에 관한 진실이 밝혀져 인간들이 더 이상 에를니아를 믿지 않으면, 우리의 봉인은 풀린다. 그렇게 되면 다른 신들이 직접 에를니아를 저지할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베를리아의 의사만이 카를로스의 목숨을 좌지우지할 거란 소리였다.
현재 일찍 그를 죽이지 않은 것에 대하여 지독히도 후회하고 있는 그녀의 마음을 돌리기란 쉽지 않을 터였다.
게다가 모든 삶 내내 카를로스에게 시달려 온 베를리아는 이미 그의 존재만으로도 제 행복을 또 다시 망칠 것 같다는 불안감을 떨치기 힘든 상태였다.
그 순간 메리쉬의 머릿속으로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예를 들어 카를로스 에덴버의 팔다리를 모두 잘라 놓아, 정말로 숨만 붙여 놓는 건 어떨까 하는.
쾅쾅쾅!
저택 1층에서 들려온 거친 노크 소리만 아니었다면, 카를로스는 메리쉬의 머릿속에서 무슨 짓을 당했을지 몰랐다. 그리고 그 무슨 짓은 분명 반드시 현실이 될 터였다.
“두 번째는 일이 끝난 후에 알아도 괜찮다. 우선 베를리아를 깨워야겠어.”
베를리아는 현재 세뇌된 상태여야 하므로 육체가 리리카의 것일지언정 메리쉬는 타인에게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다.
고로 손님일지 불청객일지 모를 상대를 맞이하는 것은 그녀가 해야만 했다.
에르젠타샤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신이 손을 휘저어 베를리아의 숨을 돌려놓았다.
“헉…!”
베를리아의 뺨에 혈색이 돌아오고 그녀가 숨을 훅 들이키며 눈을 떴다. 모든 것이 멈췄다가 깨어난 베를리아의 시선이 몽롱했다.
“베릴, 괜찮아요?”
메리쉬가 빠르게 다가가 베를리아의 상태를 면밀히 살폈다. 에르젠타샤의 말대로 별다른 이상은 전혀 없었다.
시야에 메리쉬가 들어오자 그를 멍하니 바라보던 베를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았다.
쾅쾅쾅!
손님인지 불청객인지 모를 상대는 인내심이 짧은 모양이었다. 그 잠깐을 기다리지 못하고 문을 두들겨 재촉하는 소리가 들렸다. 곧 완전히 정신을 차린 베를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멈칫했다. 새하얗게 변해 버린 제 머리칼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아차린 메리쉬가 빠르게 아티팩트를 가져왔다. 머리칼이나 눈 색을 바꿔 주는 아티팩트였다.
베를리아가 스스로를 챙기는 동안 메리쉬가 창을 통해 상대를 확인했다. 황실 기사단의 기사 중 한 명이었다.
“베릴, 황실 기사단에서 사람을 보내왔어요.”
메리쉬가 재빠르게 베를리아에게 전달했다.
카를로스가 보낸 사람인지, 데니안이 보낸 사람인지 판단하기 애매했다.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방을 나서 1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문을 여는 순간 초조한 낯빛의 기사가 외쳤다.
“리들턴 백작님, 기사단장님을 살려 주십시오…!”
마치 데니안이 죽기라도 할 것처럼.
***
베를리아는 잠시 주춤해야만 했다. 그녀는 지금 카를로스에게 세뇌당한 입장으로, 어쩌면 이게 그의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몇 번 속았던 카를로스가 베를리아를 자꾸만 시험해 보리라는 것은 예상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우선 들어와.”
그래서 베를리아는 시간을 끌기로 했다. 기사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모른 채로 섣불리 행동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카를로스를 속이기 위해 애썼던 일들이 모두 허사로 돌아갈 테니까.
베를리아는 대단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비밀스럽고 중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저택의 문을 꼭꼭 닫은 후 말을 이었다.
“카를은 이 사실을 알고 있어?”
카를로스의 이름이 나오자 낯빛이 더욱 흙빛이 된 기사가 대답을 이었다.
“황태자 전하… 아니, 폐태자께서 직접 기사단을 장악하고 기사단장님의 목에 검을 들이대셨습니다.”
“카를이…?”
베를리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러나 그녀의 머리는 냉정하게, 카를로스가 그럴 수도 있는 인물임을 인정했다. 그는 스스로를 위해서라면 친구에게도 얼마든지 칼을 겨눌 수 있었다.
“믿기 힘드시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증표를 가져왔습니다.”
“증표?”
기사가 말을 꺼낸 순간 베를리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예, 기사단장님께서 리들턴 백작님께 도움을 요청하시며 이것을 가져가라고 하셨습니다.”
기사가 허리춤에서 검을 풀러 건네었다. 데니안이 오래전 카를로스에게 하사받은 검이었다.
베를리아가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마차를 준비하라 이를 테니 안내하게.”
그녀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가 마침내 말을 꺼냈다.
***
베를리아가 기사와 함께 마차를 타고 이동한 곳은 황성이 아니었다. 기사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백작님, 이곳은 황성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 순간 메리쉬가 후드를 쓴 채로 나타나 쿵 소리와 함께 기사를 바닥에 짓눌러 제압했다.
“이게 무슨…!”
“카를을 모함하려거든, 철저히 했어야지.”
베를리아가 메리쉬에게서 검을 빼앗아 들어 그 기사에게 직접 겨누었다.
“감히 내 앞에서 카를을 모함한 대가를 치를 각오쯤은 하고 왔겠지?”
베를리아가 검을 높게 들었다. 그 순간 기사가 다급하게 외쳤다.
“저를 보내신 분은 황태자 전하이십니다!”
베를리아가 황급히 손을 멈추었다. 망설임 없이 내리그은 검날이 기사의 목 지척에 닿아있었다.
“나보고 인제 와서 말을 뒤바꾼 너를 믿으라는 것인가?”
베를리아가 서늘하게 물었다. 그러자 기사가 빠르게 대꾸했다.
“제 품에 통신 아티팩트가 있습니다! 그걸 사용하시면 곧바로 황태자 전하께서 연락을 받으실 겁니다.”
“그게 통신 아티팩트인지 널 어떻게 믿고.”
“제가 직접 사용하겠습니다.”
베를리아가 기사의 말에 고민하는 척 눈을 내리뜨고 빤히 그를 쳐다봤다.
곧 그녀의 고개가 끄덕여지고 메리쉬가 기사의 한 팔만을 놓아 주었다. 어차피 기사가 발버둥치더라도 금세 다시 제압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곧 기사가 사용한 아티팩트에서 카를로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베릴, 내 기사를 따라와. 만나서 해야 할 말이 있다.”
역시나 의심으로 인한 수작이었다. 그리고 사람을 제멋대로 시험해 본 주제에 여전히 카를로스는 뻔뻔했다.
그래도 저번에는 연락을 기다리라는 말만 전한 후 사라지더니, 이제야 카를로스가 제 본거지를 알려 줄 모양이었다.
그 한마디만을 하고 연락은 끊겼다. 베를리아가 메리쉬에게 눈짓하자 그가 기사를 풀어 주었다.
“안내하도록.”
베를리아가 고갯짓으로 명했다. 그녀와 시선이 마주하자 방금까지 목숨을 위협 당했던 탓에 간담이 서늘했던 기사가 주춤하다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기사가 향하는 방향은 베를리아조차 쉽게 예상하지 못했던 곳이었다.
기사는 황궁으로 향하고 있었다.
***
데니안은 카를로스에게 받은 검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데니안에게 카를로스가 4황자 시절 준 검은 사정이 여의치 않아 그다지 좋은 것이 아니었고, 근래 들어 그가 카를로스에 대해 깨달은 것들이 있었기에 그 실망이 무의식적인 행동으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데니안이 정말로 위험해졌더라면 증표를 보냈을 리가 없었다.
‘제가 구해 달라고 할 일은 절대 없을 테니, 혹시라도 누군가 찾아가거든 의심해야 합니다.’
황실 기사 중에 카를로스의 사람이 아닌 자를 구별해 주기를 부탁했더니, 그것을 수락하며 데니안이 한 말이었다. 그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스스로 대가를 감당하겠노라 했다.
데니안은 자신이 베를리아와의 관계를 망쳤음을 명백히 인지하고 있었고, 그로 인해 이제는 그녀에게 구해 달라 청할 사이가 아닌 것이 그 이유였다.
그래서 기사가 증표를 말한 순간 베를리아는 기사의 말이 거짓임을 알 수 있었다.
베를리아가 카를로스를 아는 만큼 데니안도 카를로스를 안 덕이었다.
기사가 안내한 곳에 들어서며 베를리아가 속으로 혀를 찼다.
‘…머리 좀 썼네.’
카를로스가 머무는 곳은 황위 계승권자들의 도륙이 일어났던 폐궁이었다.
이제는 이곳에 들어서면 원한을 받아 죽는다는 소문이 흉흉하여 사람들이 접근조차 잘 하지 않는 곳이었다.
애초에 도망간 폐태자가 황궁에 숨어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기란 어려웠다. 그에 반해 사실 황궁으로부터 멀어지지 않는 것이 카를로스에게는 이로웠다.
어쨌든 그가 가진 대부분의 기반이 황궁과 수도에 몰려 있었으니까.
특히나 황궁은 카를로스가 자신의 기사들에게 명령을 하달하기도 더없이 용이했다.
“어서 와, 베릴.”
폐궁이었기에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으나 카를로스가 머무는 방만은 상당히 깔끔했다.
그가 직접 치웠을 리는 없었으니 여전히 그를 따르는 이들이 상당히 남아 있음을 의미했다.
“어떻게 된 거야, 카를?”
베를리아가 카를로스의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자신을 속였다는 것에 화를 내기보다 순수하게 그저 의아한 기색이었다.
솔직히 그녀는 카를로스 따위가 자신을 시험했다는 게 대단히 불쾌했으나, 카를로스를 사랑하던 때의 자신이라면 이렇게 반응했을 테니 어쩔 수 없었다.
“신중할 필요가 있었어.”
카를로스가 대답했다. 그가 연이어 말을 꺼냈다.
“네가 내게 어디까지 동조해 줄지 알아야만 했거든.”
베를리아는 직감했다. 자신이 기다리던 일이 드디어 눈앞에 있었다.
“황위를 가져올 거야.”
카를로스가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