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광대의 마지막(5)
메리쉬의 몸이 덜덜 떨려 왔다. 그가 패닉에 빠져 무언가를 저지르기 전에, 에르젠타샤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정해라, 아이야. 베를리아의 시간을 내가 잠깐 멈췄느니라.”
메리쉬의 고개가 에르젠타샤를 향해 홱 돌아갔다.
그는 한참을 침묵에 빠져 있다가 뒤늦게 베를리아가 데니안의 심장을 찌르고도 죽지 않게 했었던 경험을 떠올렸다.
“왜 그러신 겁니까?”
메리쉬가 사납게 물었다. 그의 눈에 미미한 불신이 어렸다. 마치 에르젠타샤가 베를리아에게 해를 끼치진 않을까, 의심하는 것처럼.
“첫 번째와 두 번째에도 그러더니, 여전히 베를리아의 일이라면 예민하기 그지없구나.”
경계심 서린 물음에 에르젠타샤가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그대로 둔다면 고통에 미쳐 버렸을 거다. 그걸 바라진 않을 테지.”
그 말에 메리쉬가 베를리아를 내려다봤다.
탐스럽던 암녹색 머리칼이 노인처럼 새하얗게 새어 있었다. 창백한 낯빛과 메마른 입술은 마치 모든 양분을 빼앗겨 버린 고목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에르젠타샤의 말에 단번에 납득할 수는 없었다.
“그냥 의식만 잃게 하시는 방법도 있었습니다.”
“현재 그 아이의 육체는 담고 있는 힘을 통제할 수 없는 상태다. 시간의 흐름에서 어긋나게 해 죽은 것 같은 상태를 만들지 않는 이상, 혼절했다고 해도 힘은 계속 내게로 흘러들어왔을 거다. 그렇게 되면 베를리아가 위험했겠지. 흐름을 끊어 줄 필요가 있었다.”
끊긴 물길에 다시 물을 흐르게 만들려면 시간이 필요하듯이, 베를리아로부터 물처럼 흘러들어오는 힘을 에르젠타샤가 막아 버렸으니 일시적이지만 한동안은 괜찮을 터였다.
“그걸 위해서라면 이제 되었으니 이만 깨워 주십시오.”
베를리아에게서 더 이상 검은 기운이 흘러나오지 않는 것을 확인한 메리쉬가 곧바로 에르젠타샤에게 요구했다.
심장이 멈춘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아무리 신의 힘이라도 베를리아에게 마냥 좋은 영향을 줄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곧 죽을 거 같은 얼굴에 심장도 뛰지 않으니 정말 숨이 멎은 것은 아닌가 덜컥 두려움이 들기도 했다. 그는 베를리아가 얼른 깨어나서 자신을 봐 주기를 바랐다.
“잠시 기다리거라, 할 말이 있으니.”
에르젠타샤가 고개를 절레 저었다. 신에게도 불경한 주제에 연인에게는 끔찍하다. 참 한결같은 인간이었다.
“베를리아의 몸에는 아직 저주가 남아 있다. 그걸 다 빼내면 에를니아의 말대로 육체가 무너져 죽고 말 거야.”
“그 사실을 알면서도 베릴이 그런 위험한 일을 하도록 내버려 둔 겁니까?”
메리쉬가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그러나 에르젠타샤는 개의치 않았다.
“그러니 지금 혼절하게 한 거다. 너는 저 아이가 깨어나거든, 성공적으로 모든 힘을 내게 건네 주었다고 전하여라.”
에르젠타샤가 말했다. 그러자 메리쉬가 미심쩍어하는 얼굴로 신을 올려다봤다.
“그러면 신으로서의 힘을 제대로 발휘 못 하는 것 아닙니까?”
베를리아가 위험한 것은 싫었지만, 그녀가 원하는 바는 이루어지길 바랐다.
참으로 말도 안 되는 욕심이었으나 메리쉬는 그런 것 따위 개의치 않았다.
그러니 기가 막힌 것은 에르젠타샤였다. 신은 한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해결할 수 있다. 넌 저 아이에게 그렇게 전하기만 하면 돼.”
“싫습니다.”
그리고 신이 애써 꺼낸 말을, 메리쉬는 단번에 거절했다.
“제가 왜 베릴에게 거짓말을 해야 합니까.”
“야, 네 연인을 살린다는데 그거 하나 못해?! 에르젠타샤께서 이렇게까지 하는데!”
성검의 영혼 중 참다 못 한 리드로턴이 소리쳤다. 그러나 메리쉬는 단호했다.
“못 합니다. 미움 받기 싫거든요. 못 들은 걸로 할 테니 신께서 알아서 베릴에게 잘 이야기 하십시오.”
즉 거짓말을 해도 에르젠타샤보고 하라는 이야기였다.
“만약에 베를리아가 네게 진실을 물으면… 내가 거짓을 말하더라도 너는 사실대로 이야기해버릴 것이 아니더냐, 아니야.”
“당연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에르젠타샤가 거짓을 입에 담아 봤자 메리쉬가 진실을 발설해 버리면 끝이었다.
그런데도 끝까지 베를리아에게 거짓은 말하지 않겠다는 메리쉬에 신이 잠시 침묵했다.
도대체 어쩌란 것인지 알 수 없어, 에르젠타샤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다행히 이번에는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왜 굳이 비밀로 해야 합니까?”
무리하지 않고도 신이 힘을 되찾게 할 수 있다면, 처음부터 베를리아가 이토록 고통을 자처하는 일 따위 없었을 터였다.
그런데 내내 침묵하다가 이제야 베를리아에게 비밀로 하라고 말하며 해결책을 내놓는 행동을 메리쉬는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그 아이는 힘을 쓸 수 없는 줄 알고 있어야만 안전하기 때문이다.”
에르젠타샤가 설명을 늘어놓았다.
베를리아가 에르젠타샤의 신녀이기 때문에, 에르젠타샤가 봉인된 고대 신전에서 이곳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녀가 있어야만 했다.
그래서 이제야 메리쉬에게 말을 꺼내는 것이었다.
“영혼은 환생하기 전에 한 차례 휴식을 취하게 되지, 그렇게 해서 윤회를 거듭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베를리아는 휴식도 없이 몇 번이고 같은 삶을 반복하고 있어. 영혼에 타격이 가지 않을 수 없지.”
에르젠타샤가 홀로 시간의 흐름을 벗어나 있는 베를리아를 바라봤다. 아마 그녀도 자신의 몸에 어떤 한계가 닥치고 있는지 알 터였다.
베를리아가 입을 다물고 있었으니 굳이 자신이 입을 열지는 않았지만, 에르젠타샤는 그녀가 걱정됐다.
“게다가 기존의 신녀들은 우리의 힘을 받아들이기 전에 오랜 세월 교육을 받고 천천히 익숙해진다. 베를리아에게는 그런 과정이 없었고, 그건 고스란히 몸에 악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이어지는 에르젠타샤의 말에 메리쉬의 얼굴이 점차 굳어갔다. 그가 이를 악물더니 목이 메는 듯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그 말은 혹시… 베릴이, 평범한 사람만큼 살지 못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까?”
에르젠타샤는 침묵했다. 그러나 침묵이 긍정이었다.
“하, 이 무슨.”
메리쉬는 기가 막혀 제 머리칼을 헤집었다.
카를로스 에덴버가 사라져야만 베를리아가 행복할 수 있었다. 그에게 내내 이용당하다가 이제야 복수의 끝자락에 도달했는데, 실은 그 끝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험천만한 상황이라니.
이토록이나 삶이 베를리아에게 불공평할 수 없었다.
그제야 메리쉬는 에르젠타샤가 베를리아의 힘을 못 쓰게 하려던 이유를 알아차렸다.
현 주소부터가 더 힘을 쓰지 않아도 혹사당한 육체는 망가져 있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베를리아가 힘을 쓴다면? 그것은 그녀의 수명을 더더욱 단축하는 일밖에 되지 않을 터였다.
그렇지 않아도 리리카가 죽은 뒤, 베를리아는 멈추는 법도 쉬는 법도 없었다. 그 모든 것이 대단한 죄악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러니 차라리 베를리아에게 힘이 없다고 해야 쓸 생각도 하지 못할 것이라는 에르젠타샤의 판단은 정확했다.
카를로스가 나눠 가졌던 저주를 가져오는 게 얼마나 신체에 악영향을 끼치는 줄 알면서도, 베를리아는 기꺼이 행하지 않았던가.
“애써 거짓말을 해서 신께서 말씀하신대로 해도 소용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메리쉬는 그 판단의 결과에 대하여 부정적이었다.
“베릴은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직접 카를로스 에덴버를 처단하고 말 테니까요.”
베를리아가 자신의 일을 남에게 맡기고 뒤로 안전하게 물러나 있을 리 없었다. 그런 가정은 메리쉬의 작은 바람에 불과했다. 그는 그녀를 잘 알았다.
“차라리 수명을 늘릴 방법을 알려 주십시오.”
메리쉬가 에르젠타샤에게 말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에르젠타샤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신이라고 한들 정해진 수명을 멋대로 늘리는 것은 순리에 어긋나는 일이다. 게다가 베를리아의 영혼에게 필요한 것은 휴식이야. 그렇게 수명을 억지로 연장해 봤자 영혼을 학대하는 일에 불과하다.”
“그럼 이제야 눈앞에 행복을 앞뒀는데, 남보다 짧디 짧은 삶을 살다가 가라는 말씀이십니까…!”
메리쉬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베를리아가 그다지 행복하지 못하고 죽는다면, 도대체가 복수는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메리쉬는 당장이라도 베를리아를 깨우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그래서 복수고 뭐고 그냥 그녀가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다.
어차피 카를로스는 파멸을 향해 내달리고 있지 않은가. 가만히 내버려 둬도 망할 인생이었다. 그런데 계속해서 베를리아의 시간을 낭비해야 하는가 의문이 들었다.
복수하지 않으면 베를리아가 행복해질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매분 매초 닳고 있는 그녀의 수명이 너무 아까웠다.
“그래서 네게만 묻는 것이다. 저 아이의 행복을 위해, 너는 어디까지 할 수 있느냐.”
베를리아의 첫 번째 삶에서 에르젠타샤가 이렇게 물었을 때, 메리쉬는 기꺼이 자신의 영혼까지도 내어놓았다. 그러나 에르젠타샤가 재차 묻는 것은 늘 변화하는 인간의 마음을 장담하지 못한 탓이었다.
게다가 이번 시간대의 메리쉬는 이전에 자신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모르지 않는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방법을 말해 주십시오.”
그러나 메리쉬의 대답은 놀랍도록 똑같았다. 그는 늘 망설이는 법이 없었다. 메리쉬에게 어디까지 할 수 있냐는 질문은 의미 없었다.
그는 베를리아를 위해서라면 무조건 해 왔을 뿐, 어디까지 할지 재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반드시 두 가지가 모두 만족되어야만 한다.”
잠시 뜸을 들이던 에르젠타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감탄스러웠다. 인간은 때때로 아주 강력한 힘을 발휘하여 운명을 바꾸고는 했다. 유일하게 신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신은 언제든 운명을 바꿀 수 있고, 그 운명을 바꿨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도 안다. 그러니 그것은 순리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달랐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로, 어떻게 될지도 모른 채로 새로운 길을 만든다. 새로운 순리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 경탄하지 않을 수가.
“첫째는… 카를로스 에덴버가 죽지 않아야 한다.”
에르젠타샤의 말에 메리쉬는 자신도 모르게 베를리아를 돌아봤다.
그녀는 절대로 이 사실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었다. 이 무슨, 모든 일이 허사가 될지도 모를 말이란 말인가.
첫 번째 조건부터 쉬운 게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