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광대의 마지막(4)
귀가 웅웅 울리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속이 뒤집힐 것 같고 안색도 나빴다. 포션을 사용한다고 해도 그것을 담는 그릇에 금이 가 있지 않아야 쓸모가 있었다. 지금 베를리아의 육체는 그조차 의미 없을 만큼 밑 빠진 독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를리아는 되는대로 정제 포션을 씹어 삼키고 황궁으로 향했다. 몸 상태를 낫게 해 주지는 않지만, 최소한 기력보충은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몸 상태는 정말이지 거지같았고 정신력으로 버티는 수밖에 없었으니 기력이라도 있어야만 했다.
“리들턴 백작이 나를 살렸다고.”
그리고 베를리아의 예상대로 황제는 일어나 있었다. 성물로 인한 혼절이었으니 원인을 거둬내고 괜찮아진 것이다.
“예, 그렇습니다.”
“내게 바라는 게 있는가?”
역시나 황제는 눈치가 빨랐다. 그는 베를리아가 까닭 없이 자신을 돕고, 또 찾아올 리 없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방금 내린 신탁을 들으셨겠지요.”
베를리아가 확신에 차 말했다. 황제는 굳이 뜸 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카를로스의 수작입니다.”
황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베를리아의 말을 믿기에는 신탁이 너무나 완벽히 신의 음성이었으니까.
“정확히는 그래야 할 겁니다.”
“무슨 뜻이지?”
“카를로스가 신의 뜻을 등에 업고 반역을 저지를 테니까요.”
황제가 입을 다물었다. 전혀 예측하지 못한 말은 아니었다. 그 또한 카를로스가 제게 손을 썼을 때부터 이미 카를로스에게 그런 의사가 있다는 것쯤이야 모르지 않았다.
“확신하나?”
“아니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베를리안가 황제의 질문에 되물었다. 기실 두 사람 다 이미 답을 알지 않던가.
“나보고 정확히 어떻게 하라는 겐가.”
황제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회한 어린 모습이었다.
베를리아는 그것을 가벼이 무시했다. 황제를 두고 생각하면 어린 아들을 방치한 자의 자업자덕이었으므로 딱히 안타깝지는 않았다.
“카를로스의 황태자 직위를 박탈하고 폐하를 시해하려 했음을 밝혀주십시오.”
“나 또한 카를로스가 탐탁지 않으나 황위를 계승할 수 있는 이가 없지 않나.”
베를리아의 요구사항에 황제가 곧바로 반박했다. 이복 형제들을 죄다 죽이고 제 목숨까지도 노릴까 두렵던 아들을 어쩔 수 없던 이유 중 하나였다.
“이 기회에 신권과 황권을 통합해보시는 것은 어떠신지요.”
베를리아가 말했다. 그러자 황제가 팍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나보고 내 손으로 직접 황실을 신전에 흡수시키라는 말이더냐?”
“그게 아니라, 초대 황제처럼 신권과 황권을 동시에 가진 황제가 되시라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베를리아는 황제에게 그런 권력을 줄 생각 따위 없었다.
첫 번째, 두 번째 삶에서 카를로스가 성검의 주인으로서 이름을 떨칠 때 그의 뜻에 동조했던 것은 황제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정확히 말하자면 베를리아는 황제에게 유감이 있는 편이었다.
황제는 베를리아의 말이 솔깃한 표정이었다. 어차피 카를로스를 밀어내고 나면 남는 황위 계승권자는 없었다. 방계의 방계의 방계까지 뒤져서 데려온다고 해도, 교황이나 성녀처럼 신성력을 가진 이보다 대단한 권위를 가지지는 못할 터였다.
결국 이 선택지를 고르면 황권과 신권이 통합되어 그 모든 권력을 누리는 황실의 영광은 현 황제대에 끝난다는 이야기였다. 장기적으로 보면 신전에 훨씬 이득인 일이었다.
그러니까 황제가 진실로 황실을 위한다면, 베를리아의 제안을 거부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녀는 믿었다. 황제가 황실보다 스스로를 우선하리라고.
“…신전 측과는 협의된 바인가?”
황제가 미심쩍은 듯 물었다. 신전이 자신조차도 권력에서 밀어내면 어쩔까 걱정하는 게 뻔했다.
“신전이야 손해 볼 것이 없지 않습니까.”
현 황제의 자리를 지켜주겠다는 협의따위, 베를리아가 굳이 황제를 위해서 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황제는 제 아들이 자신을 죽일지 모른다는 염려가 현실이 된 시점에 서 있었다. 판단력이 흐려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귀족들의 반발은 어떻게 하면 좋겠나.”
황제가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 그거까지 자신에게 해결해달라니, 참으로 양심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베를리아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쯤이야 제가 알아서 해결하는 것이 신하된 도리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런 도리 같은 것은 몰랐다.
그저 이때를 대비하여 정국을 좌지우지하는 네 파벌 중 가장 큰 귀족파의 수장인 아를레나 공작과 말을 끝내놨을 뿐이었다.
물론 세세한 것까진 황제가 알 필요 없었다.
파벌이 갈리는 이유도 애초에 각자가 원하는 이권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신전과 황제에게 모두 척을 진 채, 폐태자가 될 카를로스를 끝까지 따를 황태자파 귀족들은 그리 걱정할 게 못 되었다.
심지어 카를로스는 곧 신성 국가 에덴버에서 신을 사칭해 전쟁을 일으키려한 죄인이 될 예정이 아니던가.
황제가 신권과 황권을 틀어쥐게 되면 황제파에게도 이권이 많이 돌아갈 테니, 황제파는 아쉬울 것이 없었다.
황제는 이번에 쓰러진 것을 제외하면 아직 정정했다. 통합된 후의 대책은 황제가 살아 있는 동안 세워도 늦지 않았다.
그러니 귀족파와 황제파가 동의하고 황태자파가 침묵하는 시점에서, 일이 베를리아의 의도대로 흘러가리란 것은 손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황궁을 찾은 목적은 전부 이루었다. 베를리아가 만족스럽게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
“오늘 대륙에 내렸던 신탁은 카를로스가 성물을 이용하여 조작한 거짓이다. 이에 신의 이름을 거짓으로 빌려 전쟁을 일으키려한 죄에 따라 황태자위에서 카를로스를 폐하고 에덴버의 성을 박탈한다.”
황제가 자신의 말을 증명하듯이 성물을 이용하여 대륙 전체에 자신의 말을 전했다.
그리고 곧바로 카를로스에게서 리들턴 저택으로 연락이 왔다. 므시아의 수하들을 시켜 그의 명령을 수행하라는 내용이었다. 반역을 준비하면서 들키면 위험할 온갖 일들이 적혀 있었다.
‘내 수하들을 소모품으로 쓰려는 거지.’
베를리아가 이를 갈며 그 편지를 북북 찢어버렸다. 지 기사들은 아끼고 남의 수하는 막 굴리겠다는 도둑놈의 심보가 적나라해서 대단히 불쾌했다.
카를로스가 이딴 식으로 나오겠다면 베를리아에게도 방법이 있었다. 애초에 세뇌된 척하기로 했을 때, 그가 반역에 므시아의 사람들을 동참시키리라는 예상은 당연히 하고 있었으니까.
베를리아가 곧바로 자신의 하녀, 재스민을 불러들였다.
“재스민, 지금까지 사 놓은 아티팩트들 중 안전에 필요한 것들을 골라서 전부 임무에 가는 이들에게 나눠 줘. 텔레포트 아티팩트도 포함해서.”
“…모두요?”
베를리아의 말에 재스민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안전에 관련된 아티팩트는 수도 없이 많았다. 그것들을 종류별로 배부하고 나면 각자에게 돌아간 것의 아티팩트 값만 수도의 저택 한 채를 호가할 터였다. 게다가 최고가의 아티팩트들 중 하나인 텔레포트 아티팩트까지 포함이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차피 사 놓은 걸 소모한다고 해서 리들턴의 재산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죽으면 나라도 되살려 줄 수 없어. 그 전에 예방하는 건 해 줄 수 있어도.”
그러나 베를리아는 단호했다.
첫 번째 삶은 카를로스의 원을 들어주기 위하여, 두 번째 삶은 행복해지기 위하여, 세 번째 삶은 낯선 세상에서 외로움을 견디기 위하여.
그렇게 살다 보니 네 번째 삶에서 깨달은 것은 개똥밭을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점이었다.
죽으면 모두 끝이니까.
베를리아의 말에 재스민이 잠시 침묵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리리카의 죽음에 제 주인이 얼마나 충격 받았는가를 알고 있었다. 그런 일을 똑같이 겪고 싶지 않은 베를리아의 마음을 헤아린다면 그깟 아티팩트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재스민이 물러가고 나서야 베를리아는 피곤한 눈을 손으로 문질렀다. 메리쉬가 뒤로 다가와 그녀를 안아 들었다.
“조금 눈 좀 붙여요, 베릴.”
베를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성검을 가져다 줘, 멜.”
베를리아는 아까 하던 일을 마무리 짓고 싶었다.
“에를니아가 어떻게 유일신이 되었는지, 그런 것들을 알리려면 반드시 또 다른 신의 존재를 증명해야만 해.”
그러기 위해서는 에르젠타샤가 신다운 힘을 보여야만 했다.
메리쉬가 못마땅한 눈으로 베를리아를 마주했다. 그러나 결국 한숨을 푹 쉬면서도 이번에도 그녀의 말대로 성검을 건네주었다.
베를리아가 성검의 영혼들에게 에르젠타샤를 다시 불러주기를 요청했다. 그리고 곧 에르젠타샤가 모습을 드러냈다.
성검 속 신들이 에를니아의 말대로 베를리아의 신체를 점검해 본 결과, 그녀의 몸에는 여전히 에를니아의 신력이 머무르고 있었다.
다만 에를니아의 말 그대로 아직은 에르젠타샤의 힘에 막혀 더 깊이 들어오지 못했을 뿐이었다.
메리쉬에게 에를니아의 힘을 옮기면 괜찮으리라는 것은 그들의 가정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를리아는 망설이지 않았다.
다시 메리쉬에게로 하얀 기운이, 에르젠타샤에게로 검은 기운이 베를리아로부터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서로 상반된 색의 그 흐름이 멈추는 순간이었다.
“헉…!”
베를리아가 심장 근처를 움켜쥐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억지로 속에서 비릿한 것을 삼키던 메리쉬가 일순 휘청거리면서도 베를리아를 받아 안았다. 그리고 곧 그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베릴, 숨 쉬어요!”
메리쉬가 다급하게 외쳤다.
베를리아를 안느라 이렇게나 지척에 있었는데도 그녀의 숨결이 느껴지지 않았다. 고통에 잠식된 베를리아가 숨 쉬는 법을 잊어버린 탓이었다.
“베릴, 제발…!”
메리쉬가 베를리아를 침대 위에 편하게 눕히고 그녀에게 입을 맞춰 숨을 불어넣었다. 베를리아가 고통에 몸부림쳤다. 그로 인해 손톱에 긁힌 그의 얼굴에 생채기가 생겨났다.
몸의 모든 것을 앗아가는 듯한 고통이 베를리아를 감쌌다. 완전히 무너져 버린 둑처럼 그녀에게서 다시 검은 기운만이 흐르기 시작했다.
지독한 고통에 베를리아의 머리칼이 새하얗게 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베를리아의 심장도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