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광대의 마지막(3)
빛이었다지만 이전에는 적어도 뚜렷한 형태를 가졌던 것과 달리, 지금 에를니아는 군데군데 부서진 조각상처럼 이리저리 균열이 간 모습이었다.
카를로스의 망가진 성물 반지를 복구해 줄 자가 누가 있겠는가. 그의 반지에 들어 있던 힘이 에를니아의 것이라는 사실쯤 진즉에 눈치챘다.
그래서 베를리아는 어쩌면 그 힘의 흔적이 제게 남아 에를니아가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진실로, 이렇게 되리라 확신한 것은 아니지만.
“당신, 진짜 궁지에 몰렸구나.”
제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소리에도 불구하고, 베를리아가 입꼬리를 길게 올려 웃었다. 그 모습이 상당히 괴이했다.
이기적이고 제 욕망에 충실한 에를니아. 그런 에를니아가 적진의 한가운데 등장했다는 것은 어떻게든 베를리아의 계획을 막아야만 했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에를니아라면 베를리아가 제대로 세뇌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를로스에게 붙여 놓은 눈에게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즉 그가 아닌 그녀에게로 왔다는 소리였다. 한 마디로 에를니아에게 둘 모두를 찾아갈 여력이 없다는 의미기도 했다.
그러니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게 무슨 소리지?”
에를니아의 말에 예민하게 반응한 것은 오히려 메리쉬였다. 산산이 조각난 모습을 한 에를니아가 재빠르게 대답했다.
“지금이야 자리가 없다지만… 에르젠타샤에게 힘을 주면 그 힘을 지탱하던 부분에 카를로스가 주입한 내 힘이 들어가겠지. 인간의 몸이 두 신의 힘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은가?”
“아니, 당신은 그러지 못할걸?”
베를리아가 곧바로 입매를 비틀며 대꾸했다.
“나를 세뇌하려던 것도 에르젠타샤 님의 힘에 의해 막힌 주제에, 나를 죽일 만큼 힘을 쓸 수 있겠어?”
한껏 빈정대는 어조였다. 그러자 에를니아가 어디 한번 해 보라는 듯이 이야기했다.
“믿지 못하면 직접 해 봐도 상관없겠지. 목숨은 하나뿐이겠지만.”
“베릴.”
메리쉬가 베를리아를 재차 붙잡았다. 그는 절대 그녀의 목숨을 두고 모험할 수 없었다.
“에를니아의 힘을 내가 감당하게 해 줘요.”
어차피 말려도 듣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함께하는 수밖에 없었다.
“말도 안 돼!”
에를니아가 경악하여 소리쳤다.
“안 될 이유가 없어요. 이 육체는 내가 아니라, 리리카의 몸이니까.”
성검과 계약을 한 이후 바뀌었을 뿐, 리리카의 몸을 기본적으로 이룬 신성력은 에를니아의 것이었다. 어쩌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그 판단을 에를니아라고 하지 못할 리 없었다. 에를니아가 노후했다.
“네놈은 매번 이런 식으로 걸리적거리는구나!”
신의 분노에 주변의 장식품들이 바닥으로 추락하고 땅이 울렸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잠깐에 불과했다.
“어쩌다 이리 추해졌던가, 에를니아.”
에르젠타샤가 에를니아의 힘을 막아 주었기 때문이었다.
“…탄생할 때부터 최고의 힘을 타고 난 네가 무엇을 안다고 지껄여!”
잠시 멈칫했던 에를니아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어찌 알겠어, 그대의 심정을.”
에르젠타샤가 탄식했다. 태초의 신은 어느덧 에를니아에게로 가까이 다가가 있었다.
“다만 너무 욕심을 부렸어.”
에를니아를 향한 에르젠타샤의 목소리에 분노는 없었다. 오직 안타까움만이 존재했을 뿐이었다.
“우리를 모두 봉인하고 신녀들을 모두 죽였을 때, 이런 결과가 돌아올 줄 그대도 알았지 않아.”
신이 사라지고 신녀가 사라진 시대였다. 에를니아 홀로 남은 시대는 그 전과 같을 수 없었다.
신보다 인간의 말이 월등히 많아졌다. 신에게 말을 거는 인간은 지독히도 많았고 그 모든 이의 말이 동시에 들리는 때도 있었다. 그러니 전부 응답할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그렇게 신이 줄어드니 어쩔 수 없이 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이 짙어졌다. 사람들의 믿음은 자연스레 옅어지고 신의 힘이 줄었다. 에를니아가 유일신이 되었음에도 오히려 전보다 약해질 수밖에 없던 이유였다.
신인 에를니아가 정말로 이러한 결과를 몰랐을까?
에르젠타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심을 부렸을 뿐.
“그랬으면 멈췄어야지. 어쩌자고 여기까지 와.”
혼돈만이 존재하던 세상에 에르젠타샤로 인해 질서와 무질서가 생겨났다. 그리하여 여러 신이 다시 태어났다. 에르젠타샤는 모든 신의 부모와 같았다.
에르젠타샤는 다른 신들조차 가늠할 수 없을 아주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 봉인되어 갇힌 순간까지도 크게 분노가 일지 않을 만큼.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에르젠타샤는 세상 만물 전부를 품을 수 있는 신임에도 불구하고 에를니아의 말대로, 에를니아가 이렇게까지 해야만 했던 이유를 절대로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내게 봉인 당한 주제에 나를 동정하지 마!”
에를니아가 소리쳤다. 에를니아는 연이어 마치 저 홀로 있는 것처럼 중얼거림을 늘어놓았다.
“넌 늘 그런 식이었지. 항상 남의 위에서 내려다보고, 이해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안타까워하고, 그저 태초의 신으로 탄생한 것뿐인 주제에….”
베를리아는 에를니아가 보이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았다. 열등감. 어쩌면 겨우 그 감정 하나로 인해 이 모든 일이 벌어진 것이다.
“…정말, 당신의 말대로 카를로스 에덴버는 당신의 아들이 맞는지도 모르겠군요.”
베를리아가 서늘한 낯을 하고 에를니아를 바라봤다. 더 이상 빈정거림조차 없는 싸늘함이 그녀에게 흘렀다.
“뭐?”
에르젠타샤에게 쏠렸던 에를니아의 이목이 베를리아에게로 돌아갔다.
“둘 다 열등감 덩어리잖아.”
베를리아는 매우 담담했다.
이전에도 에를니아가 신이라는 사실에 관한 경애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에를니아가 위대한 신이라고도 느껴지지 않았다.
인간과 똑같은 감정을 느끼고 비슷한 행동을 하는데 무엇이 그토록 다르단 말인가.
“당신은 그래서 실패할 거야.”
베를리아는 더는 에를니아의 말을 들을 필요도 없겠다고 판단했다.
“멜, 괜찮겠어?”
베를리아가 에를니아를 등진 채로 메리쉬에게 물었다. 그가 방금 한 말을 거절하지 않겠다는 의사 표현이었다.
베를리아가 메리쉬 없이 견디지 못했듯이, 그도 마찬가지였다.
육체의 고통보다 중요한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이 때때로 더욱 사람을 죽인다는 사실을 그녀도 알았다.
그러니 자신의 모든 고집을 받아들여 준 메리쉬의 제안을 언제까지고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럼요, 베릴.”
그리고 메리쉬는 기쁘게 웃었다. 그가 기꺼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베를리아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죽을 거라고 했잖아!”
에를니아가 돌연 끼어들었다. 에르젠타샤에게 열등감을 불태우느라 잊었으나 메리쉬가 선뜻 대답하자 그제야 다시 위기감이 든 모양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베를리아는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에 새겨진 붉은 낙인들이 빛을 발했다.
“그만둬! 그만두라고!”
에를니아가 발작이라도 하는 것처럼 히스테릭하게 반복하여 외쳤다.
그러나 그토록 절박했음에도 성검과 에르젠타샤가 지켜 주고 있는 베를리아의 쪽으로 다가가지는 못했다.
베를리아의 손을 타고 새하얀 힘은 메리쉬의 쪽으로, 검은 기운은 에르젠타샤의 쪽으로 흘러갔다.
고대 신전에 묶인 몸이었기에 현신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에르젠타샤의 발만은 희미했었다.
그러나 그 속박이 점차 풀리는 것을 증명하듯이 베를리아에게서 힘이 흘러갈수록 에르젠타샤의 발도 선명해졌다.
그 순간 리들턴 저택으로 커다란 빛이 내리쬐었다.
빛의 중앙에 휩싸인 상대를 돌아보니 에를니아가 새하얗게 빛나며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현신할 능력까지도 잃어가고 있는 탓이었다.
그때 에를니아의 입이 열렸다.
[악마의 추종자 베를리아 리들턴을 처단하라. 나의 아들, 카를로스 에덴버가 성스러운 전쟁으로 너희들을 이끌리라.]
그러나 그것은 방금과는 다른 목소리처럼 들렸다.
그 음성은 마치 빛이 대기를 가득히 채우는 것처럼 공간의 공기를 밀어내며 온 공간을 울렸다.
그것은 신탁이었다.
신탁을 마치고 난 뒤 겨우 얼굴 정도만이 남았을 때, 에를니아가 비웃듯이 말했다.
“신녀 따위 필요 없다. 어디 살아남아 보려무나.”
그 한 마디를 마치고 에를니아는 완전히 사라졌다. 아마 다시 힘을 쌓을 때까지, 더 이상은 나타나지 못할 터였다.
에를니아의 만행에 살짝 놀라 힘의 흐름이 끊기자, 베를리아와 메리쉬가 동시에 피를 토했다.
신의 힘은 너무나 거대하여 인간의 육체가 견뎌내기에 많은 무리가 따랐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에를니아의 행동을 미루어보아 짐작했을 때, 에를니아의 목소리는 아마도 대륙 전역에 퍼졌을 터였다. 곧 대륙의 힘 좀 있다는 대다수가 베를리아의 숨을 거두러 올 터였다.
그러나 베를리아는 긴장하지 않았다. 그녀는 리리카가 죽은 후 정말이지 어떤 경우에도 대처 불가능할 일이 없도록 준비해 왔다.
그러니 놀란 것은 에를니아의 무모함에 대한 감정이었을 뿐 본인 스스로에 대한 걱정은 아니었다.
“나머지는 황궁에 다녀와서 해야겠어요.”
베를리아가 에르젠타샤에게 말했다. 신전 쪽은 이미 안젤라에게 에를니아가 어떤 존재인지 말해 두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카를로스가 신전에 끌려간 이후 황제를 살펴본 결과, 황제의 혼절은 성물 탓이었다.
황제를 시해하려 했다는 죄를 대신관에게 뒤집어씌우려면 신성력과 비슷한 힘을 가진 성물을 이용했으리라는 베를리아의 생각이 정확히 들어맞았다. 그로 인해 조치를 취할 수도 있었고.
“황제를 만나고 올게요.”
베를리아가 말했다. 아마 지금쯤이면 황제가 깨어났을 것이다. 아무리 황실의 부흥이 중요해도 황제가 제 목숨을 위협한 카를로스의 편을 들 리 만무했다.
베를리아는 자신의 몸이 언제 쓰러져도 이상할 게 없는 상태임을 알고 있었다. 솔직한 말로는 에르젠타샤에게 힘을 전부 전하고 나면 스스로가 어떻게 될지 장담하지도 못했다.
그러니 그 전에 황제를 만나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