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깽판치는악녀님 (129)화 (129/148)

129화. 광대의 마지막(2)


 

카를로스의 손이 베를리아의 눈을 가렸다. 그 순간 반지가 환하게 빛을 토해냈다.

그러나 마차는 수도의 외곽을 달리는 중이었고, 그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던 탓에 마차 밖으로 터져 나오는 광채를 그 누구도 보지 못했다.

심지어 베를리아의 마차는 마부가 없이 마법으로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목격자는 전혀 없는 셈이었다.

베를리아의 두 눈이 몽롱해졌다. 그녀의 움직임이 멈춘 것을 확인한 카를로스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에게서 제 손을 떼었다. 베를리아의 보라색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카를?”

“베를리아.”

카를로스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확인하기 위해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베를리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가 원하던 반응이었다.

“왜 그렇게 딱딱하게 불러? 나한테 또 화났어?”

베를리아의 목소리에 상당한 서운함과 약간의 시무룩함이 드러났다. 카를로스가 안젤라와의 일로 그녀에게 화를 낼 때면 보이곤 했던 반응이었다.

그는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것을 애써 내리 눌렀다.

아직은, 겨우 이 정도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베를리아가 제게 거짓을 말하는 걸지도 모르니까.

기억이 지워져도 베를리아에게 있어 메리쉬가 유의미하다는 것이 그간 얼마나 거슬렸는지 모른다. 카를로스가 반지를 낀 손으로 그녀의 뺨을 매만지며 세뇌의 여부를 확인했다.

“베릴.”

“응, 카를.”

“내게서 네 저주를 가져가.”

카를로스가 나눠 가진 네멘 리들턴의 저주를 베를리아가 도로 가져간다면 그 후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즉,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카를로스는 지금 그녀의 목숨을 담보로 세뇌가 걸렸는지 확인하려 들고 있었다.

“그래.”

카를로스가 베를리아의 표정을 살피기도 전에, 그녀에게서 대답이 흘러나왔다. 곧바로 저주를 되돌려 받기 위해 손을 뻗었다.

검은 기운이 일렁이며 베를리아에게로 넘어왔다. 그 순간 울컥, 그녀의 입에서 피가 토해졌다.

“…헉!”

베를리아가 숨을 흡 들이켰다. 온몸을 가시 달린 넝쿨로 거세게 조이는 듯한 충격이 몸을 강타했다.

고통, 고통, 고통. 뇌리를 뒤흔들고 꽉 채우는 것은 온통 고통뿐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베를리아와 카를로스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웃고 있었다. 아주, 만족스럽게.

베를리아가 속으로 비틀린 웃음을 감췄다. 그녀가 일부러 입술을 콱 깨물었다. 카를로스의 앞에서 기절할 수는 없었다. 그러기 싫었다.

죽여서라도 가지고 싶은 것은 제가 가져야 하는 인간. 그게 카를로스 에덴버였다. 애초부터 그가 이런 식으로 나오리란 것을 예상했다.

그러니 베를리아는 생각했다. 버틸 수 있다고.

“카를.”

베를리아가 피를 토하며 웃었다. 더없이 환하게. 널 위해서라면 몇 번이고 죽을 수 있다는 듯이.

“사랑해.”

거짓을 말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딱 그것보다 한 걸음 더 카를로스 에덴버가 증오스러웠으니까.

카를로스의 두 눈이 환희에 찬 광기로 번들거렸다. 베를리아는 자신이 그가 원하던 바를 증명해냈음을 알아차렸다.

베를리아는 카를로스의 어리석음을 실컷 비웃었다. 자신이나 그나 참으로 멍청하기 그지없었다. 똑같은 우를 또 다시 범한다는 점에서.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고통의 대가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

카를로스는 베를리아를 곧바로 데려가지 않았다. 저주로 인해 붉은 낙인이 그녀의 몸을 뒤덮어 삼켰고 온몸에서는 열이 났다. 반역을 준비하는 시점에서 그런 베를리아는 짐만 될 뿐일 터였다.

그 덕에 베를리아는 리들턴 저택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베릴…!”

메리쉬가 곧바로 달려와 휘청거리는 베를리아를 받아냈다. 몸을 가누기가 쉽지 않았다. 저택의 문이 닫히고 외부와 단절되니 안도한 탓인지 지금까지 애써 참고 있던 고통이 그녀의 몸을 강타했기 때문이었다.

“카를로스 에덴버가 속았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리쉬에게 안기자마자 베를리아가 처음 한 말은 이것이었다.

베를리아의 눈에도 광기가 맴돌았다. 무려 네 번의 삶을 반복하여 다다른 곳이었다.

고통보다도 끝내 너를 속였다는 사실에 희열이 들어찼다.

베를리아는 바랐다.

네가 사랑에 배신당하기를, 네가 피 끓는 증오가 무엇인지 알기를, 네가 도저히 진창에서 벗어날 수 없는 기분이 뭔지 느끼기를… 네가 대단히 불행하기를!

우습다. 고통은 참 상대적인 것이었다. 당장 숨을 끊어 버릴 것 같은 열기가 목을 조르고 있어도 베를리아는 버틸 만했다. 진실로 숨통이 조여들고 있는 것은 카를로스 에덴버였으니까.

그 모습을 보며 메리쉬가 두 입술을 꾹 다물었다. 지금 베를리아의 눈에는 그 무엇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이토록 그녀를 걱정하는 자신조차도.

당신이 너무나 걱정된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당신의 귀에 닿을 것 같지 않았다.

“그만 들어가서 누워요, 베릴.”

그래서 메리쉬는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은 채 베를리아를 부축해 안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확인할 게 있어.”

카를로스가 그런 식으로 나올 줄 알면서도, 굳이 저주를 건네받은 이유가 있었다. 그 일을 뒤로 미루고 싶지 않았다.

베를리아가 비틀비틀 걸어가 한쪽에 가만히 놓인 성검을 집었다.

“에르젠타샤 님을 불러 주세요.”

모든 신이 성검에 봉인된 것은 아니었다. 특히 에르젠타샤가 그랬다.

에르젠타샤의 봉인은 에를니아가 무엇보다 신경을 써서 행해진 것이었다. 그래서 에르젠타샤는 보통 신전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에르젠타샤가 나타날 수 있는 것은 성검의 영혼들이 에르젠타샤를 부르면, 베를리아가 자신의 힘을 대가로 바치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 메리쉬가 곧바로 베를리아를 붙잡았다. 그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높아졌다.

“베릴, 당신 아파요!”

네멘 리들턴의 저주는 에르젠타샤의 힘을 폭주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불안정한 에르젠타샤의 힘이 온몸을 헤집어놔, 베를리아가 본디 가지고 있던 힘조차 그 흐름을 엉망으로 망가트렸다.

그러니까 지금 베를리아의 몸에서는 그간 카를로스가 나눠서 지고 있던 힘과 그녀가 원래 지니고 있던 힘이 함께 날뛴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에르젠타샤를 불러내겠다니? 아무도 베를리아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았으나 제정신이 아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중에 해요, 제발. 지금은 베릴 몸 상태가….”

그러나 그런 메리쉬의 말을 단호히 끊어낸 베를리아가 말했다.

“나로 인해서 나중이 없어진 사람도 있어, 멜.”

그 말에 메리쉬의 말문이 턱 막혔다.

“그 사람이 아니면 네가 내 곁을 떠났을 거고.”

베를리아가 손을 뻗어 메리쉬의 뺨을 매만졌다.

금방이라도 그가 사라져 버릴 것을 걱정하는 사람처럼 더없이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그 손에서 나오는 열기가 후끈후끈했다.

“그런데 내가 쉬면 말이 안 되잖아.”

메리쉬가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그는 문득 묻고 싶었다. 내가, 리리카의 모습을 하고 있는 내가… 당신의 앞에 있는 게 혹시 당신의 고통이냐고.

만약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냐고.

그 말을 내뱉지 않은 것은 베를리아가 아프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그의 마지막 이성 덕이었다.

“…정말 에르젠타샤를 불러도 괜찮겠나?”

성검의 영혼 중 하나인 미누엘라가 물었다.

베를리아가 이 일을 계획했을 때도 조심스레 반대했던 신이었다.

미누엘라는 누구보다도 인간을 사랑하는 신이었고 이 일은 베를리아의 몸에 무리 가는 것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네, 그렇게 해 주세요.”

그렇지만 베를리아는 여전히 단호했다. 메리쉬가 판단했듯, 누군가의 말이 들릴 상태가 아니었다.

결국 한숨을 쉰 성검은 에르젠타샤를 불렀다. 베를리아는 성검을 잡은 손을 통해 자신의 힘이 훅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뜨거운 것이 속에서 치솟더니, 그녀가 각혈했다.

“베릴, 당장 놔요…!”

메리쉬가 기겁하여 다가와 성검을 뺏어 들려고 했다. 그러나 무슨 힘이었던지, 팔이 부들부들 떨리면서도 베를리아는 성검을 놓지 않았다. 기어코 에르젠타샤가 완벽한 모습으로 현신할 때까지.

메리쉬가 주춤, 손에서 검을 놓았다. 그가 진 것은 힘이 아니라 베를리아의 집념이었다. 메리쉬가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그녀는 오직 에르젠타샤만을 응시하고 있느라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었지만.

리리카가 죽은 이후로 늘 이런 식이었다. 괜찮은 척했으나 때때로 혹은 종종… 베를리아는 전혀 괜찮지 않았다.

누군가의 죽음이 한 인간에게 어떤 방식으로 아물지 않는 흉터를 남기는지 눈으로 보여 주듯이.

“아이야, 지금 내게 힘을 주면 네가 위험하다.”

에르젠타샤 또한 나타나자마자 베를리아를 만류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녀는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베를리아는 도리어 반문했다.

“지금처럼 에를니아가 나약해져 있을 기회가 또 올까요?”

그러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봉인이 일시적으로 희미해졌다고는 하나 다른 신들은 여전히 각자의 봉인을 풀지 못한 상태였다.

그에 반해 에를니아는 지금 이 시기만 지나면 사람들의 믿음을 먹고 다시 힘을 쌓을 터였다.

똑같은 시간으로 따질 때, 사실 누가 불리한 싸움인지는 처음부터 선명했다.

“어서 제게서 힘을 가져가세요.”

베를리아가 요구했다.

카를로스에게 저주를 받아온 것은 그 저주에 담긴 에르젠타샤의 힘을 신에게 돌려주기 위함이었다.

에를니아는 신이었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방심할 수 없는 상대였으니까.

생각해 보라, 대가가 있었다지만 베를리아는 몇 번이고 시간을 거슬렀다. 그렇다면 카를로스라고 해서 그런 기회를 얻지 못할 이유는 무엇이 있단 말인가.

그리고 만약 카를로스에게 그런 기회를 줄 신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에를니아일 터였다.

베를리아는 에를니아를 완전히 부숴 버리지 않고서는 도저히 안심할 수 없었다.

결국 에르젠타샤가 베를리아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런 짓을 하면 그 아이는 죽을 거다!”

그 순간 돌연 에를니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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