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광대의 마지막(1)
처음부터 예상했던 일이었다. 베를리아는 언젠가 에를니아가 한 번은 반드시 카를로스를 도우리라 생각했다.
별다른 이유는 아니었다. 그래야만 에를니아가 자신의 힘을 키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또 다른 변수를 만들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베를리아는 자신이 예측할 수 있는 지점에서 에를니아가 힘을 소모하게 만들어야만 했다.
“에를니아는 더 이상 인과율에 대하여 지불할 대가도 없다. 이제 모두 끝이야.”
에르젠타샤가 말했다. 전에는 잠깐, 잠깐 베를리아에게 모습을 드러내던 에르젠타샤가 이제는 시간과 관계없이 현신해 있을 수 있는 게 그 증거였다. 지금 에를니아는 신들에 대한 봉인을 제대로 유지하지 못할 만큼 극도로 약해진 상태였다.
“에를니아가 다시 힘을 쓰려면 인간들의 ‘믿음’이 필요할 거다.”
성검이 말했다.
신의 힘은 그들을 향한 믿음에 의해 결정된다.
에를니아가 극도로 약해진 지금, 에를니아는 자신에 대한 인간들의 믿음을 더욱 강하게 만들기 위하여 수작을 부릴 것이 뻔했다.
“그것을 위해서라도 카를로스는 반드시 모습을 드러낼 거예요.”
베를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에를니아의 비호를 받아, 카를로스는 다시 재기하려 할 터였다.
이대로 돌아오면 그는 어차피 폐태자가 될 운명이었다. 카를로스가 그런 것을 가만히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이 시점에서 카를로스가 행할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잠시 후 베를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멜, 데니안을 만나러 다녀올게.”
“저도 같이 가요, 베릴.”
그러자 곧바로 메리쉬가 베를리아를 따라붙었다.
“그냥 잠깐 다녀오는 거야. 굳이 네가 같이 안 가도 돼.”
베를리아가 메리쉬를 만류했다.
데니안의 저택 또한 수도 내에 있었기 때문에 다녀오는 데에 긴 시간이 들지 않았다. 게다가 카를로스가 도주해 버린 지금, 딱히 위험할 일도 없지 않나.
그러나 그는 단호히 말했다.
“카를로스 에덴버는 베릴을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그 말에 베를리아가 멈칫했다.
“…왜 그렇게 생각해?”
“황태자도 멍청한 작자는 아니니, 성지에서 갑자기 자신을 향해 호의적으로 굴던 베릴이 이상하다는 것쯤은 느꼈을 겁니다. 그렇지만 당시에는 베릴이 자신의 편이 되었을 때 나쁠 것 하나 없으니 모른 척했던 거겠죠.”
메리쉬가 확신을 담아 말을 이었다.
“특별한 수작이 있지 않고서야 사람이 그렇게 한순간에 돌변할 수는 없으니… 아마 지금쯤이면 카를로스 에덴버도 그게 에를니아의 짓이었음을 알아차렸을 겁니다.”
애초에 베를리아에게 손을 쓸 수 있는 존재는 많지 않았다. 흑마법의 정점에 오른 그녀는 카를로스조차도 쉽게 어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베를리아에게 수작을 부릴 존재는 상당히 국한되었다.
이미 에를니아는 카를로스에게 모습을 드러냈고, 그가 자신을 돕던 신을 떠올리지 않을 리 없었다. 그리고 재차 에를니아가 그에게 모습을 드러낸 시점에서 카를로스는 어쩌면 자신의 추측하던 사실을 확인했을 터였다.
“방법이 있는데 카를로스 에덴버가 베릴을 포기할 리가 없어요.”
메리쉬는 베를리아를 향한 카를로스의 집착을 똑똑히 기억했다. 단언컨대 그는 그녀를 제 손에서 놓아 주려 하지 않을 것이었다.
“지금도 베릴의 곁을 맴돌고 있을지도 모르죠.”
메리쉬가 워낙 강해서 그렇지, 카를로스도 기사단장인 데니안조차 이길 만큼 강한 기사였다.
그런 카를로스가 작정하고 기척을 감춘다면, 그가 가까이 접근하지 않는 이상 메리쉬도 다수 중에 카를로스를 특정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니까 베릴이 혼자 있으면 반드시 모습을 드러낼 겁니다.”
메리쉬는 두 번 다시 카를로스가 베를리아에게 접근하도록 두고 싶지 않았다. 그놈은 그녀에게 언제나 백해무익한 존재였으니까.
“그렇다면 더더욱 나 혼자 가야겠어, 멜.”
“베릴!”
베를리아의 말에 메리쉬가 드물게 목소리를 높였다.
카를로스 에덴버는 늘 의외의 것들로 베를리아에게 수작을 부렸다. 성물이라든지, 에를니아의 도움을 받아서든지.
그러니 반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곧바로 메리쉬를 달래듯 베를리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진정해. 나한테 계획이 있으니 들어줘.”
카를로스는 유독 베를리아를 상대로 방심할 때가 많았다. 지금은 아니라고 해도 그녀가 지금까지 퍼부어 준 사랑에 길든 탓이었다.
그간의 짧은 날들보다도, 오래 함께했던 그 시간이 본능적으로 그의 경계를 누그러트리는 것이다.
베를리아가 자신의 계획에 대한 설명을 이어갈수록 메리쉬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러나 반박을 할 수는 없었다. 승기에 쐐기를 박기 위해서 그보다 확실한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메리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 베를리아는 홀로 마차를 타고 데니안의 저택으로 향했다.
***
데니안의 저택에 도착할 때까지 카를로스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마도 베를리아가 정말로 혼자인지에 관해 의심을 했기 때문일 터였다.
그 덕에 데니안과 대화할 시간은 벌 수 있었지만.
베를리아는 데니안과 마주하자마자 방 안에 방음 마법을 걸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카를로스는 반드시 반역할 거야.”
그 말에 데니안이 멈칫했다. 그가 반신반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어차피 남은 황위 계승권자는 카를로스밖에 없지 않ㄴ… 않습니까.”
데니안이 익숙하게 반말을 쓰려다가 멈칫하여 다급히 존대로 말끝을 바꾸었다.
고지식한 기사는 여전히 베를리아가 자신에게 거리를 두기로 한 사실을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솔직히 그에 관하여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우습게도 카를로스에 대한 증오가 너무 강해서 나머지는 비교적 약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물론 용건이 급했으니 그 사실을 굳이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카를로스가 신전을 집어삼키려고 했듯이, 왜 반대가 되리라는 생각은 못 하지?”
베를리아가 카를로스에게 했던 말을 데니안에게도 하며 짧게 혀를 찼다.
황실과 신전의 권력 다툼이 매번 일어남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전을 생각하면 주로 떠올리는 것이 세속적이지 않은 삶과 희생이었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앤지가 그렇게 하겠다고 했나요?”
“지금의 황제도, 황태자인 카를로스도 앤지가 원하는 이상적인 지도자는 절대 못 될 테니까.”
안젤라로서는 선택지가 없다는 이야기였다. 가만히 있기에는, 그녀는 진실로 에덴버의 백성들을 사랑했으니까.
“그 이야기를 카를로스와도 하신 겁니까?”
“그래, 정확히 말하자면 카를로스가 반역을 저지르게 만들기 위하여 했어.”
베를리아는 황제를 쓰러트린 것이 카를로스라고 확신했다. 황제와도 척을 지고, 신전에서도 내쳐졌다.
그런 카를로스가 황제가 될 방법이 반역 말고 또 있던가.
데니안이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도 카를로스가 절대로 황위를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쯤은 알았다.
그리고 결국 데니안은 베를리아와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제가 무얼 하면 되나요?”
데니안이 물었다.
확실히 그는 카를로스나 리암보다는 객관화가 되는 모양이었다. 베를리아가 자신을 그냥 찾아올 리 없다고 판단한 것을 보면.
“기사들에게 카를로스의 행동에 동조하라고 해.”
“…지금 뭐라고.”
데니안이 당황하여 되물었다. 베를리아가 기사들을 통제하라고 하면 할 줄 알았지, 그 반대의 말을 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탓이었다.
“거기서 진짜로 카를로스의 편을 들 자들을 뽑아내야 해.”
황실 기사들이 황실과 황태자 사이에서 갈라질 일이 무엇 있겠는가. 그러나 그 논제가 코앞에 들이닥쳤다. 모두가 같은 선택을 하리란 법은 없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아닌 자들을 골라내, 따로 맡겨야 할 일이 있어. 할 수 있겠어?”
황실 기사들을 가장 잘 아는 것은 기사단장인 데니안이었다. 그렇기에 그에게 일을 맡기는 것이었다.
고지식하고 우직한 데니안의 성정에 누군가를 속이는 일을 잘할지 의심이 가기는 했으나… 베를리아는 그가 못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베를리아가 평민에서 백작이 되기까지, 데니안도 평민에서 황실 기사단장이 되었다.
그것은 마냥 순수한 사람이 이룰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맡겨 주십시오.”
잠시 고민하던 데니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정말로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
베를리아는 그 길로 안젤라에게도 들렀다. 일부러 그녀가 혼자 있음을 확신시켜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메리쉬의 예측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카를로스 에덴버가 베를리아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그녀의 마차가 수도의 외곽을 달리던 찰나, 순식간에 마차로 뛰어들어 문을 열고 소리 없이 들이닥친 카를로스가 대뜸 중얼거렸다.
“어디서부터 일이 잘못되었나 생각했지.”
“이대로 성기사들에게 끌려가기라도 하고 싶은 모양이야.”
카를로스는 마치 혼자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혹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말을 늘어놓았다. 베를리아가 빈정거리는 목소리 따위 전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내가 판단을 잘못했던 거야.”
베를리아는 그런 카를로스를 가만히 쳐다봤다. 애초에 성기사들에게 그를 넘길 마음 따위 전혀 없었다.
그렇게 고운 최후를 맞이하게 해 줄 수는 없지 않은가.
“널 끝까지 내가 가지고 있었어야 했는데.”
그 순간 카를로스가 돌연 휙 고개를 들어 베를리아를 응시했다. 잠을 자지 못했는지 퀭한 눈 밑과 핏줄 선 흰자위를 한 푸른 눈이 그녀를 광기에 차 보고 있었다.
“그래서 생각했지, 지금이라도 다시 가져야겠다고.”
“네가? 나를? 웃기지 마.”
베를리아는 카를로스를 비웃기만 할 뿐 별다른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카를로스는 혼자만의 생각으로 가득 차 그녀의 이상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니, 널 다시 가질 거야.”
순식간에 카를로스의 손이 확 베를리아의 얼굴 쪽으로 다가왔다.
그의 손가락에는 어느덧 멀쩡해진 성물 반지가 존재했다. 그 반지의 보석이 전보다 더욱 요사스러운 색을 내며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