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같은 자리(5)
성검의 주인일 것이 자명한 사내가 카를로스에게로 다가왔다.
“신탁의 주인이 당신이라고 했던가?”
메리쉬는 모른 척, 카를로스에게 물었다. 카를로스가 그를 잔뜩 경계하며 질문했다.
“…넌 누구지?”
“리리카 델로미아나. 그리고 성검의 계약자.”
다른 사람의 이름을 말하는 것이 어색하지는 않았다. 평생을 그림자로 살아온 메리쉬가 정체를 위장하는 것은 익숙한 일이었다.
다만 그 이름의 주인이 생각나 마음 한구석이 조금 불편했을 뿐이었다.
“계약자?”
메리쉬의 말에 카를로스가 반문했다. 대개 역사 속에서는 성검을 가진 자를 그 주인이라고 불렀기 때문이었다.
“어찌 인간이 위대한 영혼들의 주인이 될 수 있단 말이냐!”
성검으로부터 발끈한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너희에게 힘을 빌려 주는 것뿐.”
“그것은 우리가 은혜를 베풂이요, 주인이라 기록한 것은 너희들의 오만이다.”
연이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평범한 사람조차도 느낄 수 있을 만큼 풍부한 신성력이 검을 둘러싸고 있었다.
성검이 전설 속에서나 듣던 에고 소드일 줄은 이 자리의 그 누구도 몰랐던 터였다.
“위대한 영혼들께서 말씀하시길, 그 신탁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쓴 가짜라고 하더군.”
지금 당장은 성검 속 영혼들이 에를니아 외에 다른 신이라고 할지라도 대다수가 믿지 않을 것이었다.
괜히 악마의 종자이니 뭐니, 누명 쓰는 일을 피하기 위해 메리쉬는 일부러 성검 속 신들을 위대한 영혼이라 칭했다.
“감히, 너 따위가 이 나라의 황태자인 내 말이 거짓이라고 말하는 거냐! 에를니아 님께서 나를 직접 그 분의 아들이라 칭하셨다! 나는…!”
“그렇다면 내가 네 말이 거짓이라 이야기하고 있는데, 왜 신께서는 이전처럼 나타나서 네 말이 진실이라고 증명해 주지 않으시는 거지? 한 번 나타나셨는데, 두 번 못 나타나실 이유는 없지 않나?”
물론 신이 인간의 세상에 개입하는 것은 인과율에 따라 엄격히 통제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보통의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그래서 메리쉬의 말은 썩 그럴듯하게 들렸다. 사실, 에를니아가 지금껏 카를로스에게 나타나 말을 전했다고는 하나 실질적으로 증명된 것은 단 한 번뿐이었으니까.
궁인들은 치열한 정치판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는 자들이었다.
그랬으니 그들도 머리가 있고 생각이 있었다. 카를로스에게 에를니아가 가장 이용하기 좋은 패라는 것쯤은 궁인들도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의심은 더욱 거세졌다. 한 번은 나타났는데 왜 두 번, 세 번은 불가한가. 황태자의 말은 과연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감히 네가 에를니아 님을 모독해!”
카를로스가 에를니아를 또 다시 들먹였다. 그 순간 쿵! 하고 그의 무릎이 그대로 꺾여 버렸다. 압도적인 기운이 카를로스를 꿇어앉게 했다.
“네놈! 도대체 어디까지 신의 이름을 사칭할 작정이더냐!”
분노에 찬 노후가 터졌다. 성검으로부터 폭사한 신성력이 카를로스를 짓눌렀다. 그가 다급히 숨을 들이켰으나, 압도적인 힘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네놈이 주장하는 신탁에서는 신의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느껴지는 것이라고는 너희 인간들에게 내린 성물의 힘뿐이었지!”
카를로스는 그 순간 차라리 자신이 힘에 눌려 고개를 들지 못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제 표정을 들켰을 테니까.
성검의 말이 맞았다. 중앙 신전의 한 가운데 써진 신탁은 카를로스가 수하를 시켜, 황실에 있는 성물로 조작한 것이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카를로스가 지금껏 손쉽게 에를니아를 팔아먹었던 것은 제 말이 거짓임을 증명할 것이 아무것도,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필 거짓을 입증할 증인이 ‘성검’이었다. 심지어 누구라도 알법한 대단한 신성력이 담겨 있어 조작이라고 할 수도 없는.
“심지어 네게는 에를니아의 힘도 느껴지지도 않아. 너, 에를니아가 처음 너를 찾은 이후 실질적으로 신을 본 적이 있긴 한가?”
성검이 질문했다.
카를로스가 마른 침을 삼켰다. 적어도 그가 에를니아를 만나 들었다고 했던 말들은 모두 거짓이었으므로.
“카를로스 에덴버.”
카를로스가 변명할 말을 찾지 못해 침묵을 유지하는 사이, 때를 맞춰 안젤라가 그에게 다가왔다.
“신전까지 나와 동행해야겠습니다. 이번에는… 신탁 위조죄와 신을 사칭한 죄까지 함께 물어야겠군요.”
안젤라가 선고했다. 그리고 시기적절하게 대신관의 연락을 받은 성기사들이 들이닥쳤다.
성기사들이 카를로스의 양옆으로 다가와 그를 붙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카를로스도 저항할 수 없었다.
***
“카를로스 에덴버, 당신의 죄를 인정하십니까?”
신전의 심문관이 카를로스에게 물었다. 신탁 위조와 신을 사칭한 죄는 황태자라고 할지라도 피해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황태자였기에 치명적이었다. 에덴버는 그 어떤 나라보다 신실한 자들이 많은 신성제국이었으니까.
그래서 카를로스는 신전에 끌려 온 내내 침묵하고 있었다. 인정하는 순간 모든 게 끝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리 침묵하기만 한다고 무언가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심문관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최소한의 예의로 존댓말을 쓰고 있기는 했으나 지금 카를로스의 신분은 황태자가 아니라 죄인이었다. 그나마 황태자여서 고문을 하고 있지 않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심문관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입을 열지 않으면 고문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죄인을 심문하는 신전의 방식은 극악했다. 어차피 다쳐도 신성력으로 낫게 하면 그만이었으니 최대한의 효율을 위하여 고통을 가하는 것이었다.
그에 카를로스가 마침내 기가 막힌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나를 고문하겠다고? 이 에덴버의 황태자인 나를?”
“당신은 지금 황태자가 아니라 죄인의 신분으로 이곳에 와 있는 겁니다, 카를로스 에덴버.”
심문관이 지겹다는 얼굴로 이야기했다. 내내 입을 다물고 있다가 기껏 하는 말이 제 신분 자랑뿐이라니.
심문관은 그런 위대하신 분이 왜 여기까지 왔느냐고 비꼬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심문관의 그런 기색을 어린 날 이리저리 경계하며 살아오느라 눈치가 빨라진 카를로스가 모를 리 없었다. 그가 모욕감에 얼굴을 확 붉혔다.
그 상태로 다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카를로스가 마침내 다시 말문을 열었다.
“베를리아 리들턴을 불러 주게. 그러면 이야기할 테니.”
심문관이 멈칫했다. 그녀는 모든 일이 자신이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만났던 리들턴 백작의 말대로 되는 것이 새삼 놀라웠다.
“…알겠습니다.”
심문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칙대로라면 죄인과 외부인을 만나게 해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카를로스가 원한다면 대면하겠다고 먼저 말한 사람은 베를리아였고 성녀도 동의한 일이었다. 일개 심문관이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더 이상 신전 내에서 베를리아의 뜻에 반할 사람이 없는 것도 심문관의 결정에 큰 몫을 차지했다. 그녀가 감옥을 나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베를리아가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 카를로스 에덴버.”
카를로스와 마주한 베를리아의 얼굴은 더없이 후련해 보였다. 그가 그런 그녀를 매섭게 쳐다봤다.
“너와 나, 이전과는 반대의 위치가 되었네.”
카를로스는 곧바로 베를리아의 말에 담긴 뜻을 알아차렸다. 그가 그녀를 단두대에 올리기 위하여 지하 감옥에 가뒀던 때를 말하는 것이었다.
“왜 나를 배신했어?”
카를로스가 원망을 담아 물었다. 그의 얼굴은 진심으로 억울해 보였다. 정말로 믿었던 사람에게, 대단한 배신이라도 당한 것처럼.
“아니지.”
베를리아는 더 이상 그게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카를로스가 저런 사람이었기 때문에, 어쩌면 실패할 수도 있었을 그녀의 계획이 이렇게 성공한 거니까.
“배신은 믿음이 있는 사이에나 하는 거야. 너와 내가 딱히 배신하고 말고 할 게 있는 사이던가?”
베를리아의 말이 그녀가 단 한 순간도 진심이 아니었음을 증명했다. 카를로스가 소리쳤다.
“난 널 믿었어!”
카를로스는 완벽히 피해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베를리아는 저것도 참 재주라고 생각했다.
끝까지, 철저히, 아주 끔찍이도 자기 위주로 사고가 흘러가는 재주.
“멍청했네.”
베를리아가 빈정거렸다. 그녀는 더는 카를로스에게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았다.
어차피 카를로스는 어떻게든 스스로만 납득할 이유를 찾아내어 변명할 테니까.
“내가 너 같은 걸 또 사랑할 줄 알았어? 내가 너니? 그런 멍청한 짓을 하게.”
카를로스에게 다른 이유는 필요 없었다. 그저 너라서 사랑하지 않는다. 그 말이 마침내 그의 입을 다물리게 만들었다.
“넌 폐위될 거야.”
“……나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을 텐데?”
베를리아의 말에 카를로스가 힘 빠진 목소리로 반문했다. 설마하면서도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황태자위에 오르면서, 자신을 제외한 모든 황위 계승권자가 죽었음을 직접 확인했으니까.
“왜 황족 중에만 황제가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
“…뭐?”
“네가 신전을 흡수하려고 했듯이 반대도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못 해 봤나 봐?”
그 순간 카를로스의 두 눈이 커졌다. 베를리아는 그가 자신의 말을 완벽히 이해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아아악! 베를리아……!”
카를로스가 돌연 발작하듯이 소리쳤다. 베를리아가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일주일 뒤에 널 폐위할 거야. 신전에서도 그 정도 준비 기간은 필요하겠지.”
“네 뜻대로 하게 둘 것 같아?!”
“그럼 인제 와서 네가 어쩔 건데? 에를니아도 자취를 감춘 마당에.”
베를리아가 카를로스를 비웃었다. 그가 의자에 묶인 채로 그녀에게 달려들 듯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제 할 말을 마친 베를리아는 어느덧 카를로스에게서 떨어져 문으로 가 버린 뒤였다.
“안녕, 카를로스 에덴버.”
베를리아가 문을 나서며 말했다. 이번에는 작별 인사였다.
***
다음 날, 카를로스 에덴버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가 사라진 자리에는 에를니아가 쓴 힘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베를리아가 입꼬리를 길게 올려 웃었다. 희열이 들어찼다.
드디어 에를니아가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수면 위로 올라왔다.
그녀는 그대로 그것을 잡아 물 밖으로 던져 버릴 것이다. 감히 숨조차 쉴 수 없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