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같은 자리(4)
“안젤라…? 네가 어떻게 여기.”
카를로스는 방금 전 자신이 신관을 추포하라 말한 것도 잊은 채로 안젤라를 쳐다봤다. 대체 어떻게 알고 지금 딱 안젤라가 황제의 방에 등장했단 말인가.
“…여기는 네가 올 곳이 아니다, 돌아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 카를로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가 피곤하다는 듯이 안젤라에게 명령했다.
“나보고 돌아가라고요?”
“자세한 사항은 내가 나중에 전달할 테니….”
안젤라가 기가 막혀 반문했다.
카를로스는 여전히 그녀를 자신의 멋대로 다루어도 아무 말 하지 않던 고분고분한 연인으로 보고 있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부정하기를 포기하자 안젤라의 눈에 그런 점들이 적나라하게 들어왔다.
안젤라가 쓰게 웃었다. 또 알 것 같았다. 카를로스가 자신에게는 그토록 상냥하고 다정하면서, 베를리아에게는 한없이 매정했던 이유를.
사랑해서 그렇다고 생각했었다.
그게 아니었다. 그저… 누구나 그렇듯이 카를로스는 자신이 예뻐하는 꽃에게 굳이 화를 낼 필요가 없었을 뿐이었다.
애써 거두지 않은 얄팍한 착각 한 겹만 걷어내도 본질이 이토록 드러나는 것을.
“언제부터 황태자가 내 위에 있었죠?”
굳이 말을 낮출 필요도 없었다. 안젤라가 그렇게 말한 순간 황제의 방 안 공기가 달라졌으니까.
안젤라가 황제의 침대로 다가갔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궁인들이 비켜섰다.
그들이 그동안 너무 편안하게 여겼으나, 안젤라는 성녀였고 감히 성녀의 앞을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쓰러졌을 때, 원칙적으로 그에 대한 권한 대행은 제가 맞습니다.”
카를로스가 잠시간의 침묵 끝에 다급히 말을 꺼냈다.
어떻게 세운 계획인데, 이대로 안젤라에게 얌전히 대신관을 넘겨줄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 권한이 나보다 위에 있습니까?”
안젤라가 말했다. 물음이 아닌 확인이었다.
설사 황태자가 황제를 대행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어떻게 성녀보다 위에 있다고 대답할 수 있겠는가.
“감히 신전의 신관을 함부로 구금하려 한 죄는 신전에서 공식적으로 물을 겁니다.”
안젤라가 기사들에게 붙잡힌 대신관 쪽으로 발을 디뎠다.
신전의 심문관은 어느 곳보다 독하기로 유명했다. 일전에 종교전쟁을 통해 그들은 거의 고문관에 가깝게 발전했다.
아무리 황실 기사들이라고 하나 질리지 않을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지금 그자는 폐하를 시해한 혐의를 가진 자입니다. 성녀께서 이리 나서시면 신전이 폐하를 시해하려 공모했다 의심을 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카를로스가 날카로운 어조로 안젤라를 막아섰다. 그녀에게 존댓말을 하되 존칭을 붙이지 않은 그런 애매한 말투였다. 그와 안젤라 사이에 서늘한 신경전이 오갔다.
“그렇게 되기를 바라시는 것은 아니고요?”
안젤라가 차분히 대꾸했다. 그게 그녀가 빠르게 황궁으로 향한 이유였으니까.
“아무리 성녀시라지만 무례한 말씀이군요.”
카를로스가 표정을 곧바로 굳혔다. 그의 눈매가 치켜 올라갔다.
“신전은 황실과 전면전이라도 하고 싶은 겁니까?”
카를로스가 안젤라를 추궁하듯이 몰아붙였다.
“황제 폐하의 방에 성녀의 이름으로 허가도 없이 밀고 들어온 것 또한 황실은 그저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계속 이런 식으로 월권행위를 하신다면 신전은 반드시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텐데… 성녀께서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카를로스는 마치 황실과 신전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면 그것이 전부 안젤라의 탓인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이전과 같았다면 그의 말에 어떤 행동을 하기를 주저했을지도 몰랐다.
“설령 충돌이 일어날지라도 시발점이 어디인지는 명확히 하셔야지요, 황태자.”
안젤라가 치맛자락을 꽉 잡았다 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장한 그녀의 손에는 힘이 풀리지 않아 손등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황태자가 신전의 대신관을 핍박한 것, 그게 먼저입니다.”
“하… 자신하십니까? 대신관이 신성력을 쓴 후 폐하께서 피를 토하셨습니다. 누가 봐도 대신관이 의심 가지 않겠습니까? 저는 핍박이 아니라 합리적인 의심을 한 겁니다.”
“그러면 그 의혹, 내가 이 자리에서 밝혀 드리지요.”
안젤라가 황제에게로 다가갔다. 그것을 황태자가 재차 막아섰다.
“의심이 든다면서요? 그것을 확인해 주겠다는데 날 왜 막아섭니까?”
“……성녀께서 진실을 은폐하지 않으실 거라고 제가 어찌 장담하고 폐하에게 접근하도록 둔단 말입니까.”
한참을 침묵하던 카를로스가 결국 꺼내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꺼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안젤라가 표정을 굳혔다.
“그 말은 이미 신전을 완벽히 황제 폐하의 시해범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내 말이 틀렸나요?”
안젤라도 더 이상은 돌려 말하지 않았다.
아니라고 대답하면 카를로스는 비켜서야만 했고 그렇다고 대답해도 문제였다.
그에게서 다시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곧 카를로스의 입이 다시 열렸다.
“그러니 뒤로 물러나시죠.”
긍정이었다.
“황태자는 방금 한 말에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할 겁니다.”
안젤라가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이야기했다. 그리고 드레스 소맷자락 안에서 작은 손거울을 하나 꺼냈다.
“이 거울이 뭔지는 황태자도 아시겠지요.”
카를로스가 굳어 버렸다.
안젤라가 가지고 온 것은 성물이었다.
그것도 신전과 황궁에 하나씩 짝을 이뤄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가짜인지 아닌지조차 이 자리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는.
카를로스는 인정해야만 했다. 그의 계획은 누군가에게 들켰고, 그 누군가에 의해 안젤라에게 밝혀졌음을.
그게 아니고야 어떻게 안젤라가 이토록 완벽하게 대비를 해 왔겠는가.
더는 카를로스도 안젤라를 막아설 수 없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성물은 에를니아의 거울이라는 것으로, 신성력을 판별하는 거울이었다.
황위 계승자의 핏속에 들어 있는 에를니아의 힘 혹은 고위 신관이 가진 신성력을 측정하기 위한 도구였다.
이 성물로 측정하게 될 경우 그들이 가진 힘의 양뿐 아니라 특성까지도 드러나게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황제에게 남아 있는 힘과 대신관의 신성력이 가진 힘을 거울로 비교해 보면 진실은 금방 드러날 터였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황제의 피를 거울에 떨어트려 나타난 색깔과 대신관의 피를 거울에 떨어트려 나타난 색깔은 달랐다.
황제 또한 몸에 에를니아의 힘이 흐르고 있어도 상관없었다. 두 개의 힘이 그의 육체에 있다면 두 개의 색깔이 나타나게 되어 있었으니까.
그러나 에를니아의 거울에는 한 가지 색밖에 나타나지 않았다. 오직 황제의 힘만을 나타내는 색깔만이.
“이 일은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황태자.”
에를니아의 거울을 갈무리해 넣은 안젤라가 카를로스를 돌아봤다. 순식간에 정황이 그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대신관, 신전에 연락하세요.”
안젤라가 안도하여 주저앉은 대신관의 쪽을 향해 말했다. 서 있는 다른 사람이 많았음에도 굳이.
그것은 황실의 사람들을 못 믿겠다는 선언과 다를 바 없었다.
“신전을 모함한 죄는 황태자라 할지라도 가볍지 않으니 신전에 함께 가셔야겠습니다, 황태자.”
자신을 심문이라도 할 듯한 안젤라의 말에 카를로스가 팍 미간을 찌푸렸다.
황태자이기에 끌고 가는 사람이 없을 뿐 연행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카를로스는 이를 꽉 악물었다.
그의 계획을 알고 그것을 안젤라에게 이토록 빠르게 알릴만큼의 머리와 능력을 지닌 사람.
그 순간 단 한 사람밖에 떠오르지 않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터였다.
궁인들과 기사들조차 카를로스를 미심쩍게 보고 있었다. 황제의 혼절이 그토록 확실하게 대신관의 잘못인 양 이야기하더니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 한다.
그렇다면 누가 황제의 상태를 이렇게 만들었단 말인가?
그 시선들의 의미를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카를로스가 잠시 후 대답했다.
“…좋습니다, 가죠.”
아무리 베를리아라고 할지라도 자신에게는 그녀조차 어쩔 수 없는 수단이 있었다.
“단, 내게는 신전을 모함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밝혀 두죠.”
카를로스가 눈매를 치켜뜬 채 말을 이었다.
“신의 아들이 제국의 유일한 태양이 되어 에덴버에 진실 된 광명을 찾을 것이다. 그 신탁의 주인이 나니까.”
그 말에 또다시 공간 속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어쩌면 모두가 생각하고 있던 사실이었을 터였다. 신의 아들. 에를니아는 이미 카를로스를 두고 그렇게 지칭한 적이 있었으니까.
“…에를니아 님께 직접 계시를 받으셨다는 말입니까?”
안젤라가 확인하듯이 물었다. 카를로스는 이제 거짓을 말하는데 한 점 망설임이 없었다.
“그러니 내가 굳이 신전을 모함할 이유가 뭐가 있지?”
황태자가 감히 성녀에게 말을 낮췄다. 그러나 카를로스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에게는 그럴 자격이 있었다.
만약 신탁이 사실이라면 카를로스는 에덴버의 그 누구보다 존귀한 존재가 될 테니까.
그리고 동시에 그런 카를로스가 굳이 신전을 모함할 이유가 없다는 것도 틀리지 않은 말이었다.
어차피 신탁대로라면 황실과 신전, 전부 그의 것이 될 터인데 굳이 흠집을 낼 이유가 무어 있겠는가.
게다가… 카를로스가 당당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가 있었다.
신탁대로라면, 그를 벌할 수 있는 사람은 에덴버 내에 그 누구도 없었으니까.
“네 이 놈! 어찌 감히 인간이 신의 뜻을 사칭하느냐!”
마치 에를니아가 신탁을 내렸을 때처럼 공간을 커다랗게 뒤흔드는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더라면 모든 정황은 카를로스의 의도대로 흘러갈 수 있었을 것이다.
“검이 말하고 있어…?”
누군가 새하얗게 빛나며 공중에 떠 있는 검 한 자루를 보고 중얼거렸다. 그제야 성녀와 황태자의 대치 속에 주목받지 못했던 남자가 모두의 눈에 들어왔다.
검은색 머리칼에 한쪽은 검은 눈을, 한쪽은 붉은 눈을 가진 남자. 그가 공중에서 검을 잡아챘다.
선명하게 느껴지는 신성력. 그 검과 남자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차린 카를로스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성검.”
카를로스는 직감했다. 자신의 모든 계획이 무너졌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