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깽판치는악녀님 (125)화 (125/148)

125화. 같은 자리(3)


 

황실 의원은 쓰러진 황제를 두고서 땀만 삐질삐질 흘릴 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 곁에서 카를로스가 소리를 높여 재촉했다.

“무엇하는가, 어서 손을 쓰지 않고!”

“그것이….”

의원은 우물쭈물하며 어쩔 줄을 몰랐다. 그녀가 입술을 연신 달싹이더니 눈을 질끈 감으며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는 외상도, 내상도 없으십니다.”

그러니까 누가 어떤 상처를 입힌 것도, 독을 쓴 것도 아니라는 뜻이었다.

멀쩡한 사람이 그냥 누워 있다는 말과 다를 게 없었다.

“그렇다면 폐하께서 쓰러진 척이라도 하신다는 말이냐!”

의원의 말에 카를로스가 화를 냈다.

퍽 적절한 행동이었다. 황제가 쓰러졌는데 그게 꾀병이라면 진실일지라도 대단한 불충이 아니던가.

“그… 그건 아니옵니다!”

버럭 들려온 불호령에 의원이 급격히 제 몸을 낮추며 말했다.

“이 경우 정신적 문제나 또는….”

“또는? 자꾸만 그렇게 뜸을 들인다면 네 목을 치고 다른 의원을 불러올 것이다. 무려 폐하께서 쓰러지신 일이야. 이런 식으로 시간을 지연해서야 되겠느냐! 당장 말하라. 한 치의 거짓도 없어야 한다.”

의원이 이번에도 말을 망설이자 카를로스가 매섭게 으름장을 놨다. 목을 친다는 말에 사색이 된 그녀가 황급히 대답을 내어놓았다.

“마법이나, 신성력에 의한 문제일 수도 있사옵니다.”

그 순간 쓰러진 황제를 시중하느라 곁에 있던 시녀와 시종들이 흡, 숨을 들이켰다. 그들은 그제야 의원이 그토록 망설였던 이유를 깨달았다.

에덴버는 신의 나라였다. 그로 인해 이 나라는 황실과 신전이 양분되어 다스리고 있었다.

그런데 황제가 쓰러진 이유가 마법이 아니라 신성력이라면… 그 세력 간의 전면전으로 번질 터였다.

“그 말을 장담할 수 있겠느냐.”

“예… 예!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의원이 허리를 숙이며 대꾸했다. 최근 황궁 내에는 카를로스에 대한 두려움이 빠르게 퍼지고 있었다.

사실 다른 황위 계승권자들을 모조리 죽인 것이 베를리아의 독단적 행동이 아님을 모를 만큼 황궁 내 모든 이가 바보는 아니었다.

그저 노골적으로 미워할 수 있는 악녀가 존재했기에 다른 복잡한 생각 없이 모든 악행을 그쪽으로 돌렸을 뿐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성검의 주인이라 거짓을 말하다가 들통이 나고, 성지에 기사단을 들인 황태자의 행동은 그에 대한 신뢰를 바닥으로 치닫게 했다.

그러고 나니 진실을 굳이 인식하지 않고 지내던 이들도 더 이상 카를로스가 어떤 사람인지 외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궁인들은 마침내 작금의 황태자가 두려워졌다.

한 번 그렇게 인식이 찍힌 상대가,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본인이 죽었을 거라는 사실이 그들에게 무어가 중요하겠는가.

궁인들은 그저 제 형제를 모두 도륙한 황태자가 무서웠다.

이 또한 카를로스는 알 수 없었으나 과거와 달라진 점이었다.

베를리아의 첫 번째, 두 번째 삶에서는 그녀가 그를 도왔기 때문에 부족한 것이 없었다. 게다가 데니안과 리암, 무엇보다 연인인 안젤라가 절대적인 그의 편이었으니 신경이 곤두설 일도 없었다.

그렇기에 그때는 카를로스에게 제 평판을 돌볼 여력이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당시의 그는 혹시라도 다른 황위 계승권자들의 죽음과 관련하여 말이 나올까 봐 더욱 평판 유지에 노력을 기울였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시녀장, 신관은 언제 온다고 했지?”

카를로스가 황제궁의 시녀장을 불러 물었다.

“곧 도착한다고 합니다.”

황제의 곁을 지키던 시녀장이 곧바로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때까지 모두 방금 전 의원이 말한 사실에 대하여 함구하도록. 신성력이 문제라면, 신관이 무언가 알아차릴 테니 그때를 놓치면 안 된다.”

“예, 전하.”

궁인들이 카를로스의 말에 다 같이 고개를 숙였다.

카를로스가 신관을 기다리며 눈을 번뜩였다. 이제 준비는 다 갖춰진 셈이었다.

***

다짜고짜 들이닥쳐 황궁으로 가야 한다는 메리쉬의 말에 안젤라가 의아함을 표했다.

그제야 그는 그녀에게 설명하는 것에 대하여 성가시다는 티를 숨기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베릴의 지시다. 성력을 판단하는 성물도 필요하다고 하시더군.”

“베릴이 성물이 필요하다고 했다고요?”

“그래, 내게 성검과 성물을 들고 너를 데리고 황궁으로 함께 가라고 하셨다.”

그러니 빨리 준비하라는 듯 메리쉬가 조용히 눈으로 재촉했다.

그 시선이 얼마나 따갑던지 안젤라가 움찔할 정도였다.

“하여간 베릴을 대할 때를 제외하고는 한결 같이 제멋대로네요.”

그것 좀 설명해 주면 어떻다고.

안젤라가 그에 관한 불만을 굳이 참지 않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메리쉬의 태도가 탐탁지 않다고는 해도, 베를리아가 다급하게 그를 보낸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였다. 그러니 이런 입씨름으로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잠시만 기다려요. 바로 챙겨 오도록 하죠.”

성녀에게는 유사시에 성물을 자유롭게 반출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그녀가 곧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시가 급했다.

***

“폐하의 상태는 어떠하시지?”

상대가 황제였으니 도착한 이도 무려 대신관이었다. 그가 황제를 치유하기 위해 다가서자마자 카를로스가 물었다.

“잠시,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황태자 전하.”

대신관이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에를니아가 신의 아들이라 칭한 제국의 황태자. 그런 존재를 눈앞에 두고 부담스러운 것은 대신관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게 카를로스가 굳이 굳이 대신관을 재촉한 목적이기도 했다. 그래야만 일이 벌어졌을 때 더더욱 정신이 없어 제대로 상황 판단을 하기 어려울 테니까.

“…황제 폐하께서는 신성력 고갈로 인해 쓰러지신 것으로 보입니다.”

잠시 황제를 살펴보던 대신관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에덴버의 황족은 누구나 그 핏줄을 따라 에를니아에게서 받은 최소한의 신성력쯤은 가지고 있었다.

그것의 양이 많든 적든, 몸의 일부를 이루던 것이 한순간에 훅 빠져나갔으니 육체에 타격이 온 것이었다.

그러자 카를로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가 추궁하듯이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는 지금까지 그런 일로 인해 쓰러지신 적이 없다. 갑자기 그런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어젯밤만 해도 폐하가 기력이 없으셔서 너희 중 하나가 다녀가지 않았나.”

단순히 영양제를 먹는 것처럼, 황족이나 고위 귀족 중에는 몸에 힘이 없다는 이유로 신관을 불러 신성력으로 치유 받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리고 때마침 황제는 지난밤 신관을 마주한 터였다.

카를로스의 말은 어제 신성력을 채워 줬는데 오늘 고갈이 되는 게 말이 되냐고 들릴 수도 있었으나….

또 다르게 해석하면 누군가 손을 쓰지 않고서야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냐는 말과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카를로스가 이 말을 꺼내는 것을 보아 당연하게도, 그는 어젯밤 다녀간 신관을 의심하고 있을 터였다.

“지금 저희 신관들이 폐하께 손을 댔다는 말씀이십니까…! 어찌 그런 말씀을!”

대신관이 발끈하여 소리쳤다.

신관에 대한 모욕도 모욕이었으나, 자칫하면 황실과 신전의 전면전으로 번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 잠자코 있을 수 없었다.

“아무리 황태자 전하라도 비약이 너무 심하십니다! 저희가 폐하께서 언제 부르실 줄 알고 일을 꾸민단 말입니까!”

그러나 카를로스는 신관의 반박에도 개의치 않고 담담히 말을 이었다.

“단 한 번이 아니라, 차근차근 그리 해 왔더라면 폐하께서 언제 부르든 준비가 되어 있었겠지.”

카를로스는 지난밤뿐 아니라 황제에게 신관이 다녀간 모든 순간들이 의심된다는 듯 말을 이었다.

“애초에 신성력 고갈이라니… 이 대륙 위에 신성력을 그렇게 다룰 수 있는 자들이 신관 외에 있던가?”

카를로스는 일부러 대신관을 도발했다.

“신성력 고갈은 꼭 그런 게 아니어도 몸의 상태가 극도로 안 좋아지거나, 혹은 정신적 또는 육체적으로 스스로를 방어해야할 일이 생길 경우에도 일어납니다. 그러니 어찌 신관들이 행했다 장담하겠습니까? 게다가 그게 사실이라면 제가 황궁에 온 순간 사지가 될 터인데, 굳이 이곳에 폐하를 치유하러 왔겠습니까?”

그리고 대신관은 결국 카를로스의 의도대로 표정을 굳힌 채로 답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폐하를 완벽히 낫게 할 수 있겠군. 신전에서는 폐하를 해할 의도가 없으니 말이야.”

그 순간 대신관이 아차 싶은 얼굴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세상에 백 퍼센트라는 게 어디 있겠는가. 신성력이 신의 힘이라고는 해도, 그 힘을 쓰는 신관은 신이 아니었다.

즉 고갈된 신성력을 채워 주더라도 황제가 못 깨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었다.

“…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신관도 알고 있었다. 이 상황까지 와서 물러날 곳은 없다는 것을.

대신관이 황제의 몸에 신성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황제의 안색이 점차 나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안도하는 순간….

“폐하!”

황제가 각혈했다. 카를로스가 대신관을 붙잡아 황제에게서 황급이 떨어트리듯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대신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대신관이 폐하를 시해하려 했다! 저자를 붙잡아 가둬라!”

“예, 전하!”

카를로스의 명에 황제의 방 밖에 대기하던 기사들이 우르르 들어와 대신관을 둘러쌌다. 대신관이 다급하게 외쳤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저는 결백합니다! 저는 치유를 하려 했을 뿐….”

“닥쳐라! 네가 무슨 짓을 한 것인지는 내 직접 심문하여 들을 것이다!”

카를로스가 대단히 분노한 얼굴로 대신관의 말을 끊으며 소리쳤다.

황제가 각혈한 것을 그 자리에서 본 궁인들 또한 누구도 대신관의 편을 들어 주지 않았다. 정황상 증거가 너무 명백했다.

그들은 괜히 제국의 태양을 시해하려 한 죄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그는 죄가 없으니 놓으시오.”

그러나 그 순간이었다. 기사들이 열고 들어온 문 사이에 안젤라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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