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깽판치는악녀님 (124)화 (124/148)

124화. 같은 자리(2)


 

베를리아가 카를로스를 아주 이상하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인제 와서, 그렇게라도 하면 옆에는 있을 거냐고 묻다니.

새삼 애절한 척이라도 하는 건지 비꼬고 싶은 마음이 불쑥 올라왔다.

그러다가 문득 떠올랐다.

‘오늘은 내 옆에 있어 주면 안 돼?’

불쑥불쑥, 혼자임을 견디지 못하고 베를리아를 붙잡던 어린 카를로스가.

4황자로 태어나 오래전 어머니를 여의고, 어린 날 중 상당 부분을 홀로 버텨 온 카를로스였다. 그런 그가 외로움에 취약한 것은 당연했다.

그야말로 베를리아가 바라마지 않던 상황인 것이다. 데니안과 안젤라, 리암 모두 카를로스의 곁에서 떨어져 나가, 그 홀로 고립된.

베를리아가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입꼬리가 기괴하게 올라가는 것을 보이지 않기 위함이었다.

첫 번째 삶에서, 모두에게 버림받고 처형대에 올랐던 자신. 눈앞에 있는 카를로스의 모습이 그때와 겹쳐졌다.

베를리아와 카를로스의 위치가 뒤바뀌었다.

희열이 그녀의 등골을 타고 올랐다.

이제 자신마저 카를로스 에덴버를 버리면, 온전히 고립되는 것은 그가 될 터였다. 마지막이 머지않았다.

“어차피 너와 나, 함께 가기로 한 것 아니었어? 물론 네가 황제가 될 때의 이야기지만.”

베를리아가 말했다. 물론, 그녀가 말하는 곳은 카를로스가 상상하는 것과 전혀 반대였지만.

베를리아는 행복해지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제 교만으로 인해 누가 죽었는지가 떠올랐다.

베를리아는 인간이었다. 보편적인 죄책감이라는 것을 가진. 그래서 그건 사랑도 어쩔 수 없었고 때때로 그녀의 목을 졸랐다.

베를리아는 더 이상 온전히 행복해질 수 없었다.

그러니… 카를로스, 너도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제 교만이 우를 범했다고 해도, 결과적으로 이 지옥 같은 삶을 누가 만들었는지 베를리아는 똑똑히 기억했다.

그녀는 절대 카를로스와 에를니아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었다.

“황제가 되면.”

카를로스가 베를리아의 말을 따라하듯 중얼거렸다. 그의 두 눈에 결연함과 광기가 동시에 어른거렸다.

“……그래, 그거면 됐어.”

카를로스가 긴 침묵 후에 입을 열었다.

“내 곁에 있어, 베릴.”

베를리아가 비웃음을 속으로 삼켰다.

아니, 너와 나는 각자의 지옥으로 갈 테다. 각자의 죄로 엉킨 목줄을 감은 채로.

“준비가 끝나면 연락해.”

베를리아가 돌아섰다. 카를로스는 더는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

『신의 아들이 제국의 유일한 태양이 되어 에덴버에 진실 된 광명을 찾을 것이다.』

중앙 신전의 광장 한가운데에 신탁이 내려왔다. 신전이 뒤집힌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신의 아들. 그게 누구를 말하는지 모두가 알았다.

카를로스의 정통성이 의심받던 그때, 에를니아가 마치 모두에게 알리려는 것처럼 나타나 카를로스를 제 아들이라 지칭했으니까.

그로 인해 신전은 소란스러웠다. ‘에덴버의 태양’이란 황제와 교황을 일컬었다. 교황이 죽은 시점에 유일한 태양이라는 말이 나왔다. 신전의 지축이 흔들리는 일이었다.

그리고 황실에서도 바람이 불었다.

유일한 태양. 그것은 지금의 황제조차도 위협하는 말이었으니까.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린 게야!”

황제가 소리쳤다.

아무리 제 아들이 신의 아들이며, 신전을 누를 카드라고 해도 제 자리를 노린다면 말이 달라졌다.

황제는 아직 뒤로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신의 아들이라 지칭된 카를로스를 이용하여, 황권을 공고히 한 뒤 그 권세를 누릴 생각이라면 몰라도.

“수작이라니요, 폐하. 신의 뜻을 그리 말씀하셔도 되겠습니까.”

카를로스가 삐뚜름하게 미소하며 말했다. 황제를 향한 노골적인 도발이었다.

그는 에를니아의 이름을 등에 업었고 이제 제 아비 따위 두렵지 않았다.

“지금 네가 감히, 네 아비에게서 자리를 강탈해 가겠다는 것이냐!”

쾅!

황제가 황좌의 손잡이를 내리치는 소리가 알현실을 크게 울렸다. 그러자 카를로스가 황좌로 성큼 다가갔다.

신탁에 관한 의심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알현실에는 황제와 카를로스 단 둘뿐이었다.

“그럼 언제까지 날 이용해 먹을 작정이었습니까?”

허락도 없이 계단을 올라 제 아비의 앞에 선 카를로스가 말했다. 그가 황제를 압박하듯이 내려다보며 비웃음을 지우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나를 이용해 황실의 권한을 드높이고 그 권력을 휘두를 작정인 것을 내가 모를 줄 알았습니까?”

“너…! 너…!”

황제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분노에 찬 그가 제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탁.

그러나 그 손은 카를로스의 얼굴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그가 황제의 손을 아주 손쉽게 낚아챘기 때문이다.

“내가 언제까지 당신의 애정이나 갈구하던 어린아이일 줄 알았다면 오산이지.”

“너, 이…!”

황제의 몸이 격해진 감정을 증명하듯 부들부들 떨렸다.

생전 처음 당해 보는 취급에 당황한 듯이, 그의 입에서는 같은 소리만이 흘러나왔다.

“당신이 내게 해 준 것이 무어 있다고, 내 이름을 팔아 권세를 누리게 두고 본답니까.”

카를로스가 거리낌 없이 제 속내를 드러냈다.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참으로 인고의 세월이 길었다.

말할수록 그의 안에 자리 잡고 있던 제 아비에 대한 반감이 비죽비죽 날서는 것이 느껴졌다.

“추하게 발버둥 치지 말고 내려오세요. 내가 직접 끌어내리기 전에.”

“천한 놈…! 어디로든 일찍이 너를 치워 버렸어야 했다! 네가 내 아들들을, 내 딸들을 죽일 때, 내 언젠가 네가 더한 패륜을 저지를 줄 알았어!”

황제가 소리쳤다.

늘 카를로스의 어머니가 약소국의 왕녀라는 사실을 무시하더니 이제는 그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기로 했나 보다.

에를니아의 신탁이 내려온 후 신의 아들이라고 좋아할 때는 언제고, 또 다시 손쉽게 태도를 바꾸는 꼴이라니. 퍽 우스운 일이었다.

“아들이고 딸이고 내 손에 죽어 나가도 제 목숨 하나 날아갈까 두려워 뒤로 숨어 계셨던 주제에 인제 와서 혓바닥도 참 기십니다.”

카를로스가 또한 지지 않고 빈정거렸다. 그는 제 아비의 반응 따위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3일입니다. 그 안에 양위를 공표하십시오.”

“내가 네 놈 따위에게 이 자리를 줄 줄 아느냐…! 내 온 나라를 뒤져 방계의 방계에게 자리를 물려 주는 한이 있더라도 네 놈에게는 주지 않을 것… 컥…!”

그 순간 황제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리고 카를로스가 그에게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예,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당신이 내게 얌전히 자리를 주지 않으리라는 것쯤은 나도 미리 알았지.”

카를로스가 지금 이 상황에서 자신은 전혀 무고하다는 것처럼 두 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 황제는 호흡이 곤란한 듯 연이어 숨을 헉헉거리고 있었다.

“그래서 손을 좀 썼습니다.”

쿵!

황제의 몸이 황좌에서 굴러 떨어졌다. 호흡이 엉망이 되자 몸이 똑바로 앉아 있을 힘조차 잃어버린 것이다.

“당장 죽지는 않을 겁니다.”

숨을 헐떡이며 바닥을 기는 황제를 내려다보며 카를로스가 속닥였다.

“당신이 내 아비로서 마지막으로 해 줘야 할 일이 있으니까.”

황제의 눈이 감겼다. 그러자 카를로스가 순식간에 안면을 바꾸어, 대단히 놀란 사람처럼 소리쳤다.

“폐하께서 쓰러지셨다…! 황실 의원과 신관을 불러라!”

벌컥. 사람들이 문을 열고 우르르 들어왔다.

기사가 경악한 얼굴로 신관을 부르기 위하여 달려 나갔다. 시종들이 다급하게 기절한 황제의 몸을 들어 옮겼다.

온통 난장판이었다.

그 속에서 카를로스만이 조용히, 조용히 웃고 있었다.

***

“황제가 쓰러졌습니다.”

황실에 심어 둔 정보원이 베를리아에게 말을 전했다. 그녀가 움찔했다.

황제의 건강 상태는 실시간으로 보고 받고 있었다.

황제는 에를니아의 축복을 받은 황족답게, 나이와 무관하게 그 신체만은 아주 건장했다. 대체로 모든 에덴버의 황족들이 그랬듯이.

그런 황제가 갑자기 쓰러졌다는 사실은 누가 들어도 이상했다.

“곧바로 돌아가서 다른 정보원들에게도 전해. 카를로스를 면밀하게 주시하라고.”

베를리아가 정보원에게 물러가라고 손짓하며 말했다. 정보원이 물러가고 메리쉬와 둘만이 남은 자리에서 그녀가 말을 꺼냈다.

“카를로스에게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게 틀림없어.”

황제의 건강은 베를리아뿐 아니라, 대다수가 주목하는 문제였다. 그런데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쓰러졌다면 의심하지 않을 사람이 더 적었다.

베를리아는 황제의 일에 카를로스가 개입했으리라고 확신했다. 그녀 말고도 그를 의심하는 이들이 상당히 있을 터였다.

거짓이긴 하나, 신탁에서 ‘유일한 태양’이 언급된 시점에 양위를 떠올리지 않은 사람은 적을 테니까.

베를리아도 손쉽게 짐작할 수 있는 점들을 카를로스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몸에 손을 댔다는 것은 그럴 만한 대비책이 있다는 의미였다.

“황실 의원과 신관을 불렀다는 게 수상합니다.”

메리쉬가 대꾸했다. 베를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래. 독을 썼다면 황실 의원에 의해 금방 밝혀질 텐데 황제의 상태를 숨기지 않고 보란 듯이 소리쳐서 알린 것은 이상하지. 더더군다나 신관까지 불러서.”

황제에게 독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매우 한정적이었다. 황실의 면밀한 감시를 뚫고 손을 써야 하기 때문이었다.

카를로스도 자신이 의심을 살 것을 알 텐데, 무엇 하러 비밀리에 불러 함구시키지 않고 황실 의원을 보란 듯이 부른단 말인가.

게다가 신관을 불렀다는 것은 신전에도 황제의 위독함을 알리려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카를로스가 빠른 양위를 위하여 황제에게 손을 썼다면 굳이 그럴 필요 없는 일이었다.

새로운 황제로 등극하려면 신전의 동의가 필요했다.

어쩔 수 없이 그 동의를 받아내려면 쓰러진 지금이 아니라 숨을 거둔 후 알리는 것이 맞았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베를리아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멜, 지금 당장 안젤라에게 가서 내 말을 전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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