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같은 자리(1)
카를로스가 잠깐의 침묵 후에 말했다.
“…네게 한 일은 미안하게 생각해, 베릴. 그렇지만 너도 알잖아- 내가 어떻게 진짜로 널 죽였겠어.”
아, 역시 너답다.
카를로스가 그 말을 한 순간 베를리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비식, 무의식중에 웃음이 입가를 비집고 나올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카를로스가 자신에게 순순히 사과하는 이유가 너무 뻔했기 때문이다.
내가 네게 쓸모가 있으니까. 그게 아니었다면 카를로스는 베를리아에게 사과 따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 첫 번째 삶에서 자신을 죽이고도, 훗날 완전히 잊어버린 채 안젤라와 행복해졌다던 카를로스의 모습이 베를리아에게 새삼 와 닿았다.
한때는 미움으로나마, 죽음으로나마 그 기억 속에 남고 싶었다.
‘어리석은 베를리아 리들턴.’
스스로에 대한 비웃음이 절로 나왔다. 베를리아는 기분이 쑥 가라앉음을 느꼈다.
카를로스를 마주하고 있으면 늘 그랬다. 자신이 얼마나 멍청했던가를 눈앞에서 적나라하게 보고 있는 기분이었기에 좋을 수가 없었다.
저 남자에게는 쓸모가 없으면 기억할 가치도 없었다. 그리고 죽은 자는 저 남자에게 있어 가장 쓸모없는 존재였다. 카를로스 에덴버란 사람은 그랬다.
리암에 대해서는 두 번 말할 것도 없었다. 베를리아는 아주 드물게 리암에 대한 애석함을 느꼈다. 어찌 되었든 리암이 저런 친구를, 저런 주군을 두게 된 것의 시초는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리암이 자신을 배반한 벌은 오히려 그를 카를로스의 곁에 두는 것, 그 자체로도 대가였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베를리아는 리암보다 카를로스가 월등히 미웠으므로 그럴 일은 없었겠지만.
“됐으니까, 교황의 승하가 밝혀진 뒤의 일이나 잘 준비해.”
베를리아가 더 말하기 싫다는 듯이 휙휙 한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카를로스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베릴, 나는….”
탁.
순간 베를리아가 카를로스의 손을 거세게 쳐냈다. 단언컨대 의식하고 한 행동이 아니었다.
베를리아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래도 목구멍이 콱 틀어막힌 듯한 답답함이 가시지 않았다.
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억지로라도 카를로스의 곁에 있으려고 했다. 그런데 아무리 괜찮은 척하려고 해도, 그렇지 못했다.
본능적인 거부감과 카를로스가 맞닿았을 때 느낀 모멸감에 소름이 돋았다.
‘너는 내 황비가 될 거야, 베릴.’
카를로스의 목소리와 함께 제 목덜미에 와 닿던 입술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베를리아가 자신도 모르게 목덜미가 빨개지도록 그곳을 손으로 문질렀다.
그렇다고 지난날의 감각이 지워질 일도 없건만,
“베릴! 지금 뭐하는….”
철썩!
“내 몸에 함부로 손대지 마.”
그런 베를리아를 말리려던 카를로스의 손이 다시 한번 거세게 내쳐졌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욱 힘 조절을 못 했는지, 그의 손등이 벌겋게 변했다.
‘내 후계는 나와 앤지의 아이가 되겠지만- 네 아이도 너도 ‘사랑’해 줄 테니 걱정 마.’
그때, 리리카가 구하러 오지 않았다면? 그럼 카를로스는 자신을 어떻게 했을까. 베를리아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애써 밀어 두었던 생각들이 불현듯 밀려들었다. 끔찍하게도.
“너….”
카를로스가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베를리아의 반응은 누가 봐도 강력한 혐오였다. 그는 찰나에 자신이 벌레라도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어차피 내 황후가 되면, 이보다 더한 것도 할 게 아닌가?”
그러니까 그 순간 카를로스가 베를리아의 손목을 빠르게 낚아채 제게로 휙 끌어당긴 것은 오기였다. 어차피 결국에는 피할 수 없는 일이 되리라는.
쾅!
그리고 베를리아는 참지 않았다. 그녀가 일으킨 신의 힘이 카를로스를 벽에 처박아 버렸다.
“내가 분명 내 몸에 함부로 손대지 말라고 방금 경고하지 않았던가? 머리가 금붕어야? 아니면, 아직도 내가 네 소유물쯤 되는 줄 알아?”
베를리아가 분노에 차 말을 뱉어냈다. 그녀는 카를로스에게 호의적으로 보이는 것은 이미 글렀다는 것을 인지했다.
그렇다면 다른 방식으로 나가면 될 일이었다. 괜히 복장 터지게 참을 게 아니라.
“으윽….”
골이 울리는 충격에 비명조차 내지 못하던 카를로스의 입에서 고통 어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머리를 부딪쳤는지 일시적으로 기절했다가 깨어난 모양이었다.
“또 내 허락 없이 그 손 가져다 대 봐. 다음에는 아예 손목을 날려 버릴 테니까.”
베를리아가 쓰러져 있는 카를로스에게로 다가가 살벌하게 경고했다. 그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두 눈이 흉흉하게 빛나고 있었다.
“…큭, 자식이 없는 황후의 자리가 공고해질 수 있을 것 같아?”
카를로스가 베를리아를 노려보며 빈정거렸다. 아무리 방심하고 있었다지만, 황궁 내에서 검으로 당할 자가 없는 자신일진대 베를리아의 일격에 한 번에 날아간 것이 대단히 굴욕적이었다.
그러자 베를리아가 픽, 노골적인 비웃음을 터트렸다.
“왜 안 되는데?”
확실히, 현대 세계에서의 삶은 순탄치 못했으나 베를리아의 사고방식을 상당히 많이 바꿔 놓았다. 예를 들어 가문도 잘나고 머리도 좋은 황후가 왜 항상 자식에 집착해야만 했던가, 같은 의문이 생겨났다.
어차피 그 자식조차 정치에 발을 담글 때에는 핏줄이 아니라, 그 핏줄이 주는 권력을 따를진대.
“잘 들어, 카를로스 에덴버.”
베를리아가 마치 모자란 사람에게 설명하듯 조곤조곤히 말을 이었다.
“내가 황후가 된 뒤에도, 너랑 밤을 보내기 싫으면 그렇게 할 거야. 아이? 몰락하기 전인 가문에서 후비를 데려와서, 후비가 낳은 아이를 내 첫째 아이로 삼으면 그만이야.”
물론 카를로스의 황후가 될 생각 따위 전혀 없었다. 그리고 이번 생에서 그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도 못할 터였다.
그러나 베를리아가 꼽아 준 예시는 카를로스가 납득하기에 충분했다.
마음대로 휘두르기 좋은 몰락 가문의 혈통만 남은 귀족. 권력자가 그런 이에게서 아이를 빼앗아 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므로.
“도덕적으로 지탄받을 수도 있고, 아이가 진실을 알게 된 뒤 내게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겠지.”
베를리아가 일부러 절대 일어날 리 없는 만약의 상황들을 입에 담았다.
“그런 짓을 해도 난 건재할 거야. 왜? 내 권력은 너로부터 나오는 게 아니니까.”
바로 이 말을 하기 위하여.
베를리아가 파악한 권력의 구조는 간단했다.
권력이라는 커다란 판에서 어차피 핏줄 또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했다. 제 자식이 없는 황후가 뒷방으로 밀려났다? 그것은 자식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결국 권력이 옮겨갔기 때문이었다.
“네가 없어도 나는 부족할 게 없는데, 겨우 자식이 없다고 흔들릴 거 같아? 착각하지 마, 카를로스 에덴버. 내가 황후가 되려는 건 더 강한 권력을 위해서지, 지금 내가 가진 힘이 약해서가 아니야.”
진실로 남의 핏줄이라고 할지라도, 결국 고개를 숙이게 만드는 것. 그게 권력이 아니던가. 그런 권력을 가지면 그만이었다.
“황후라는 자리가, 그들이 말하는 내 혈통의 허점까지 보완해 주고 나면, 나는 지금보다 더한 권력을 가질 수 있어. 그 후 겨우 남의 핏줄이라는 사실 하나가 내게 걸림돌이 될 거 같아?”
베를리아가 그럴싸한 이유를 끼워 넣어 말했다. 그녀의 표정에 어이없다는 심정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그럼 정말, 황후가 된 이후에도 나와 이렇게 지내겠다고?”
카를로스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반문했다.
우습게도 그는 베를리아의 의도대로, 정말로 그녀가 가졌을 미련에 대하여 미련을 두고 있던 모양이었다.
혹시라도 그리하여 베를리아가 자신에게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헛된 희망을 가졌던 듯했다.
“내가 널 옆에 두기 위해서 안젤라와 리암까지, 모두 버렸는데…!”
카를로스가 울컥하여 소리쳤다. 그는 진심으로 억울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베를리아도 막 나가기로 했다. 염병, 저 놈은 도대체가 참아 주면 참아 줄수록 끝이 없었다.
“야!!! 그게 나 때문이야? 네가 성녀님이랑 나 사이에서 저울질하다가 그거 들켜서 성녀님한테 팽 당하고, 또 알면서도 굳이 굳이 나나 리암을 사지로 보내려 해 놓고, 그게 왜 네 탓이야! 네가 인성이 글러 먹은 탓이지!”
간만에 속 시원히 소리쳤다. 베를리아의 안색이 한결 나아졌다.
“어차피 너나 나나, 볼 장 다 본 사이에 피차 권력을 위해서 협조하는 것뿐 아냐?”
오늘 겪어 보니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점차 점차 카를로스를 희망고문하려 했다. 그러나 베를리아는 그것이 자신의 오판이었음을 깨달았다.
이토록 카를로스 에덴버가 끔찍한데, 그에게 희망을 주기 위하여 조금이라도 살가워지는 노력 따위 완벽히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노골적으로 서로가 ‘필요’에 의한 관계임을 피력하는 것이 훨씬 나았다.
카를로스의 두 입술이 조가비처럼 다물렸다. 오직 서로의 목적을 위한 협조. 베를리아가 자신에게 그렇게 말할 줄은 몰랐다.
“알아들었으면 준비나 잘해. 네가 황제가 되어야, 내가 황후가 되는 건 맞으니까.”
베를리아가 다시 경고했다. 한바탕 쏟아내서인지 조금 전보다는 침착한 어조였다.
“준비가 다 된 뒤에 연락해. 나도 네가 황제가 되는 일에는 얼마든지 협력할 테니까.”
베를리아는 철저히 선을 그었다. 아까와 같은 소름 끼치는 감각은 이제는 사절이었다.
제 할말을 마친 베를리아가 등을 돌렸다. 더 이상 카를로스와 한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았다.
“잠깐, 베릴…!”
그리고 그 순간 카를로스가 다급하게 베를리아를 불렀다. 이번에는 아까처럼, 제멋대로 그녀를 붙잡지는 못한 채로.
“왜. 할 말 있으면 빨리 해.”
베를리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녀는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로 카를로스를 재촉했다.
“내가… 내가, 황제가 되면. 네가 지금보다 더한 권력을 얻게 해 주면.”
놀랍게도 카를로스는 머뭇거리고 있었다. 마치 아주 많이 긴장한 사람처럼.
“그러면… 최소한, 계속 내 옆에는 있을 건가?”
카를로스의 목소리는 흡사 절박하게 들리기도 했다.
‘이건 또 웬 개소리람.’
베를리아는 생각했다. 드디어 이게 완전히 돌아 버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