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이제 모두 대가를 치를 시간이었다(8)
안젤라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그녀는 자신의 안에서 무언가 산산이 조각나는 것을 느꼈다.
사랑했다, 아플 만큼. 그래서 기대했다. 어쩌면 네가 리암이 죽었다는 말에 충격을 받아 무언가 달라질지도 모른다고.
되돌아가기에도, 달라지기에도 너무 늦어 버린 것이었다.
진실로, 온전히. 안젤라는 카를로스를 버렸다.
“나는 너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카를로스.”
안젤라는 카를로스를… 그리고 리암과 데니안, 카를로스와 자신, 이렇게 넷이 보내던 그 시간들을 사랑했다. 그래서 그만큼 카를로스를 믿었고 그 믿음에 보답해 주고 싶었다.
카를로스는 그런 안젤라를 배신했다. 어쩌면 그녀가 인정하지 않았던 아주 이전의 순간들부터.
이제는 안젤라가 카를로스에게 그 대가를 돌려줄 시간이었다.
“안녕.”
안젤라가 자신을 붙잡고 있던 모든 사랑과 고통, 미련으로부터 이별을 고했다.
응접실을 나서는 그녀의 발걸음에 부서진 감정의 조각들이 자박자박 밟히는 듯했다.
***
교황이 승하했다. 어쩌면 많은 이들이 기다려 왔던 순간이었다.
신전에게도, 황실에게도 교황이 죽는 순간은 모두 기회가 될 수 있었으므로.
그리고 그 사실이 외부로 새어 나가기 전에 베를리아는 행동을 개시했다.
“리리카를….”
베를리아가 잠시 멈칫한 후 말을 꺼냈다. 여전히 메리쉬를 리리카로 불러야 할 때면 익숙하지 않았다.
“리리카를 추기경으로 추대해야겠어요.”
“…지금 이때 말입니까?”
베를리아의 말에 델로미아나의 가주, 엘테시타가 흠칫하여 반문했다.
“아직은 시기상조가 아닐까 싶습니다만….”
엘테시타가 주저하며 말을 이었다.
지금 막 교황이 승하했으니 추모에 집중해야 할 시기였다. 그런데 베를리아의 말대로라면 추모는커녕 새로운 추기경의 존재를 축하하게 생긴 셈이었다.
황태자가 황제의 자리에 오를 때 신전의 축복이 필요하듯이, 신관이 교황의 자리에 오를 때 역시 황실의 축하가 필요했다.
그러니까 추기경은 황실의 인가 없이 신전이 성검의 주인에게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자리였다.
아무리 추기경이 신전의 뜻에 따라 임명이 가능한 자리라지만, 파격적인 인사인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원래라면 추기경의 자리 또한 이렇게 급하게 정해질 일이 아니었다.
그런 자리에 누군가가 자리할 때, 황실과 귀족들은 반드시 견제할 터였다.
그런데 구설에 딱 오르기 좋은 이런 시기라니. 엘테시타는 베를리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리리카가 교황의 자리에 오르려면 정치적 기반이 필요해요.”
“그렇지만 추기경의 자리도 쉽게 오를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엘테시타가 다시 한번 베를리아를 만류했다.
새로운 이가 추기경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었다. 11명의 추기경 중 3명의 추천을 받아야 했으며 그들을 제외한 나머지 8명 중 최소 4명의 동의도 필요했다.
그녀는 아무리 상대가 베를리아 리들턴일지라도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신전 또한 권력과 정치에서 자유롭지 않은 곳이었다. 어떤 신전의 가문들은 귀족과 결탁했고, 또 다른 신전 가문은 황실의 편에 서 있었다. 황실과 귀족들이 평소에는 서로 대치하면서도 필요하면 손을 맞잡듯이, 신전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누군가를 추기경의 자리에 올릴 때는 반드시 정치와 권력 면에서 그에 관한 계산이 오갔다. 델로미아나는 현재 홀로 다른 신전 가문들을 이기고 의견을 관철할 힘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교황이 죽은 시점에 경사라 할 만한 일을 벌인다면, 현 교황을 배출한 가문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터였다.
“교황의 가문인 에델로시카를 염려하는 거라면 그건 내가 알아서 해결했어요.”
베를리아가 담담히 대답했다.
리리카가 에루아트의 성물로써 자신이 에루아트의 핏줄임을 입증했듯이, 에델로시카에도 그 가문만의 성물이 있었다.
그가 그 성물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자 에델로시카는 알아서 입을 다물었다.
신에게 모든 것을 바쳐야 할 교황이 세속의 쾌락을 탐하고 부정을 저질렀다. 심지어 그 상대가 신관이다.
이 두 가지 사실이 밝혀진다면 에델로시카에도 좋을 게 전혀 없었으니까.
“추천장도 여기 있고. 동의는 다들 알아서 할 거고.”
베를리아가 이미 챙겨 둔 추천서를 엘테시타의 앞에 내밀었다.
물론 메리쉬가 추기경으로 올라서는데 동의할 다른 추기경들도 이미 준비해 둔 후였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려 온 듯한 베를리아의 추진력에 엘테시타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아무리 성녀가 베를리아의 편을 들고 있다지만 과하게 일처리가 쉽고 빨랐다. 도대체 베를리아가 어디까지 신전을 장악해 놓은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베를리아는 이미 이 짓만 세 번을 반복하고 있었으므로, 어떤 추기경을 공략해야 할지 꿰고 있을 뿐이지만 엘테시타가 그런 것까지 알 수 있을 리는 만무했다.
“…하나만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엘테시타가 머뭇거리다가 말을 꺼냈다. 의문이 든 탓이었다.
“뭐죠?”
“굳이 지금이 아니어도 리들턴 백작님께서는 그 사내를 원하는 때에 추기경으로 만드실 수 있지 않습니까. 왜 꼭 지금이어야 하나요?”
신전에 미칠 수 있는 베를리아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는 이제 알았다. 그래서 엘테시타는 더더욱 의아했다.
언제라도 리리카를 추기경의 자리에 올릴 수 있다면, 굳이 잡음이 생길 법한 교황의 승하 직후여야만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내 대답이 진심으로 궁금해요?”
베를리아의 시선이 지긋이 제게 향하자 엘테시타가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직시하는 베를리아의 시선이 마치 자신을 꿰뚫는 듯한 기분이었다.
“…리들턴 백작님을 따르기로 했으니, 알고 싶습니다.”
엘테시타는 자신이 이미 베를리아와 한배를 탔음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니 무슨 대답을 들을까 감당하기 두려워 물러서기보다, 하나라도 더 아는 편이 나았다.
“나는 황실을 끌어내릴 거예요.”
베를리아의 말이 떨어진 순간, 엘테시타는 흡 숨을 들이켰다.
에덴버는 황실과 신전이 공존하여 권력을 잡고 있는 나라였다. 베를리아는 지금 그런 황실을 추락시키겠노라 말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전의 권력이 황실보다 월등히 막강해져야 하고, 황태자에게는 신의 아들임을 내세울 틈조차 주어서는 안 되죠. 황태자 또한 나와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같은 목표라 하시면…?”
“신전을 끌어내리고, 제정을 일치시켜 자신이 에덴버의 유일한 태양이 되는 것.”
베를리아는 삶을 반복하면서 권력을 향한 카를로스의 집착이 얼마나 집요한지 알았다. 지금이야 안젤라와 틀어짐으로써 잠시 주춤했다지만, 그는 절대 신전을 집어삼킬 계획을 철회하지 않을 터였다.
그래서 베를리아는 카를로스가 가장 원하는 것을 자신이 직접 그에게서 앗아갈 생각이었다.
엘테시타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니까 베를리아와 황태자 두 사람 모두, 신전과 황실의 전면전을 일으킬 생각인 것이다.
“그러니까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단 하나예요. 리리카의 혈통이 의심받을 일 없게 입적 배경을 완벽히 준비하는 것.”
베를리아가 엘테시타를 내려다봤다. 그 시선은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네, 네. 반드시 실수 없도록 하겠습니다.”
엘테시타가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여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대답했다.
베를리아가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어차피 자신이 막을 방법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러니 엘테시타는 그녀를 따라야만 했다.
***
“교황이 죽은 것 같아.”
황태자의 집무실을 찾아온 베를리아가 카를로스를 향해 말했다. 드르륵- 책상의 의자가 거칠게 밀리는 소리와 함께 카를로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게 안 거야?”
“신전에도 세작을 심어 뒀으니까. 신전에서 교황이 머물던 건물이 폐쇄되고, 마치 개미 한 마리 못 빠져나가게 하려는 것처럼 성기사들이 계속해서 보초를 서고 있다고 했어. 정황상 오늘내일하던 교황이 숨을 거둔 게 맞겠지.”
카를로스의 두 눈에 이채가 돌았다. 이것은 그에게 기회였다. 신전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신의 아들이라는 명목으로 그곳을 파고들 기회.
“에를니아를 한 번 더 이용해야겠어.”
카를로스가 중얼거렸다. 베를리아가 바라던 바였다.
베를리아가 교황의 죽음을 카를로스에게 알려 주는 이유는 간단했다.
말 한마디로 그를 돕는다는 착각을 심어줄 수 있었으며, 동시에 안젤라와 틀어진 시점에서 카를로스가 신전을 휘두르기 위하여 사용할 패는 에를니아뿐이었기 때문이다.
메리쉬의 등장과 함께 그 패가 거짓임이 드러날 터였다. 리리카가 카를로스보다 먼저 성검의 주인이 되어준 덕에 카를로스는 성검에 관한 진실을 몰랐다. 그랬기에 세울 수 있는 계획이었다.
“베릴, 이 사실을 내게 알려 주는 건… 이제 내게 협조할 마음이 든 거야?”
생각에 빠져 있던 카를로스가 문득 물었다. 미약한 기대를 품은 시선이 베를리아를 향했다.
“네가 리암까지 죽여 가며 네 말을 증명했으니, 나도 그에 상응하는 보답은 해야겠지. 안 그래?”
베를리아가 일부러 리암의 이름을 들먹였다. 그 순간 움찔했던 카를로스의 입에서 참 그다운 말이 튀어나왔다.
“내가 죽이다니. 리암이 일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거지.”
사지가 될 만한 곳으로 리암을 밀어 넣고서도 카를로스는 절대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베를리아는 속으로 쓰게 웃었다.
놀랍게도 카를로스는 매번 저렇게 자신이 얼마나 최악의 인간인지를 그녀에게 확인시켜주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삶에서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던 자신을 그녀 스스로 비웃을 만큼.
“…넌 죄책감도 안 들어?”
굳이 물을 필요 없는 말이었다. 충동적이었다. 그렇지만 베를리아가 오래도록 묻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다.
자신을 죽인 것에 대하여, 자신을 물건 취급한 것에 대하여, 자신의 삶을 깨부순 것에 대하여.
너는 단 한 번도 죄책감 따위 들어본 적이 없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