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이제 모두 대가를 치를 시간이었다(7)
리암도 이쯤 되면 알 수밖에 없었다. 자신도, 카를로스도… 또 베를리아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너, 너….”
리암이 주춤주춤했다. 방 안에 있는 것은 베를리아뿐만이 아니었다.
“정말로 카를… 카를로스가 널 여기로 보낸 거야?”
안젤라가 리암에게 물었다. 그녀의 표정은 온통 실망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러나 리암은 안젤라를 마주하는 순간 다른 생각을 했다. 이 자리에 베를리아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것도 하필 안젤라가 있으니 도망칠 수도 없다는 사실을.
“…그게 아니면 내가 여기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올 리가 없잖아, 앤지.”
리암이 대답했다. 정말이지, 그는 억울했다.
“네가 살기 위해 누군가의 피를 손에 묻힐 때는, 그 반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 나이가 되지 않았어?”
그러자 베를리아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리암의 입장 따위 더 이상 그녀가 알 바 아니었다.
첫 번째 삶과 두 번째, 그리고 네 번째. 무려 세 번 동안이나 한결 같이 자신을 배신한 상대였다. 아무리 운명이 크게 달라지는 바 없다고 해도 베를리아는 리암에게 유감이 많았다.
어쩌면 변할 수도 있었다는 것을 눈앞에서 보게 되자 더 그랬다. 베를리아의 옆에 있는 안젤라가 그 산증인이었으니까.
“지금부터 네가 할 일을 알려 줄게.”
베를리아가 말을 꺼냈다. 그 목소리는 리암이 자신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으리라는 확신을 담고 있었다.
당연했다. 성검의 주인을 죽이려고 했다는 사실을 들키는 순간 리암은 물론이요, 그의 가문 또한 멸문할 것이므로.
“이대로 돌아가지 말고 죽은 척을 해. 네가 숨어 있을 곳은 내가 제공할 거야.”
“…뭐?”
“너는 성검의 주인을 죽이려다가 역으로 그 상대에게 당해 죽은 거라고.”
“지금 나보고 얌전히 멸문당하라는 거야?!”
잔뜩 움츠려 들어있던 리암이 기함하여 소리쳤다. 어차피 죽을 목숨, 멸문할 가문이라면 그가 굳이 베를리아의 말을 들어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이던가.
“시끄러워. 멸문 안 당하게 해줄 테니까, 닥치고 내 말 들어.”
베를리아가 리암의 반박을 일축했다. 그가 기가 죽어 얌전히 입을 닫자 그제야 그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
“네 일은 앤지가 덮어줄 거야. 너의 죽음을 알리는 것 또한 앤지가 하게 되겠지.”
“……누구? 앤지가?”
리암의 고개가 홱 안젤라의 쪽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덤덤히 그를 마주하고 있었다. 리암의 두 눈이 쉴 새 없이 흔들렸다. 그는 마치 안젤라만은 그런 거짓에 동참할 줄 전혀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그의 표정에 서린 의미를 알아차린 그녀가 쓰게 웃었다.
“필요하다면 나도 해야지, 거짓말.”
안젤라가 조곤조곤히 말했다. 그녀에게는 주저따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리암은 더욱 충격 받은 얼굴이 되었다. 흡사 곱게 피어 있던 꽃이 제 발로 유리 온실을 걸어 나가는 기괴한 장면이라도 본 것처럼.
“친구의 마지막을 기리며 허물을 덮어 주는 거, 내가 할 만한 일이잖아?”
안젤라의 말이 옳았다. 카를로스와 틀어졌더라도 그녀에게는 데니안과 리암 모두 여전히 소중한 친구였다. 비록 그들 중 누군가는 지금껏 매순간 그녀를 온실 속의 화초처럼 대했다고 할지라도.
그러니까 안젤라가 리암이 죽은 원인을 덮고 카를로스에게 화를 낸다면, 카를로스는 미심쩍어하면서도 믿게 될 터였다.
“…내가 죽은 척을 하면 내 가문은?”
리암에게 1순위는 가문이었다. 그렇게 묻는 그의 머릿속에 카를로스의 안위는 없었다.
베를리아가 의도했으나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리암의 안위를 생각했더라면, 카를로스는 그를 여기 보내지 않았을 테니까.
“네 가문은 내가 알아서 할 거야. 솔직히 내가 어떻게 하든… 이곳에 온 걸 들켜서 멸문당하는 것보다야 낫잖아?”
베를리아의 말에 리암이 두 입술을 꾹 다물었다. 탐탁지 않은 말이었으나 틀린 것이 없었다.
그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가문도, 자신도 사라지는 것보다야 어떻게든 존재하는 것이 나았다. 그렇다면 후일을 기약할 수 있으므로.
“좋아, 그럼 여기 서명해.”
베를리아가 양피지를 내밀었다. 신전의 공증을 받은 계약서였다.
<리암 로베르는 카를로스 에덴버가 베를리아 리들턴이 원하는 결말을 맞이할 때까지 누구의 앞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죽음을 가장한다. 그 대가로 베를리아 리들턴은 리암 로베르의 목숨과 로베르 가문의 존속을 보장한다.>
계약서의 내용을 읽은 리암은 더 망설이지 않았다. 그가 매끄러운 손놀림으로 그곳에 제 서명과 로베르 가문의 인장을 남겼다.
어차피 카를로스에게는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었으므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
“황태자 전하, 성녀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앤지, 아니 성녀가?”
카를로스가 멈칫하며 미간을 찌푸린 채 반문했다.
사전에 고지도 없이 찾아오는 것은 대단히 무례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는 황태자였고 안젤라는 성녀였다.
카를로스가 아무리 잘났더라도 황제의 명은 거역할 수 없듯이, 성녀의 방문 또한 마찬가지였다.
“…응접실로 모셔라.”
결국 카를로스가 불쾌함을 억누른 채 제 시종에게 명했다. 문을 열고 집무실을 나서는 그의 발걸음이 매우 거칠었다.
“이제는 우리가 이렇게 막역하게 만날 사이가 아닌 것으로 아는데요, 성녀님.”
응접실로 들어선 카를로스가 비꼬듯이 말했다. 그를 향하는 안젤라의 시선은 담담했다.
“무례하네요, 황태자.”
안젤라는 존댓말을 쓰고 있었으나 그 어조에서 누가 우위에 있는지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것에 카를로스가 이를 악물었다.
“…성녀님을 뵙습니다, 에를니아의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잠깐의 침묵 후 카를로스가 본래는 가장 먼저 해야 했을 인사를 허리 숙여 건넸다. 그제야 안젤라가 답을 내어놓았다.
“앉으세요.”
안젤라는 자연스럽게 상석에 앉아 있었다. 익숙하게 상석으로 향하던 그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카를로스는 굴욕적임을 애써 눌러 참으며 다른 곳에 자리했다.
그런 카를로스를 보며 안젤라가 속으로 쓰게 웃었다.
그녀가 처음 만난 소년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이 약하다고 하여 억압을 당한다는 사실에 분개하면서도, 그래서 권력을 취해 똑같이 갚아 주리라는 생각보다 자신 같은 약자가 생겨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사람이었다.
누구보다 사람 귀한 줄을 알아, 저를 지키던 이들이 스러져 나간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며 울 것 같은 표정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제 욕망을 위하여 사람을 소유하려 들고, 방해가 된다 싶으면 사람의 목숨도 가벼이 여기며, 필요에 의해서라면 자신의 친우라고 할지라도 제 권력을 이용하여 휘두르려 들었다.
한때 소년이었던 사내는 그만큼이나 달라져 있었다.
그게 거짓말을 하러 왔으면서도 안젤라가 담담할 수 있는 이유였다.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상대는 현재의 사내가 아니라 과거의 소년이었기 때문에.
비록 그 사실을 인정하는 데에 이만큼의 시간이 걸렸지만.
“황태자, 당신이 리암을 신전으로 보냈나요?”
안젤라의 말투가 더없이 딱딱했다. 평소의 온화함이라고는 일말도 보이지 않는 어조였다. 카를로스가 일순 놀라 그녀를 쳐다봤을 만큼.
“…리암이 신전에 갔습니까?”
카를로스가 재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하며 저는 전혀 모른다는 듯이 물었다.
쾅! 그 순간 안젤라가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녀는 손이 새빨개진 것도 개의치 않고 소리쳤다.
“리암이 죽었어!”
뜨거운 차가 담긴 잔이 테이블에 엎어졌다. 그러나 안젤라는 여전히 매섭게 카를로스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는 진실로 분노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리암이 진짜로 죽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카를로스가 그를 사지로 보낸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만약 모두 베를리아가 계획한 것이 아니었더라면 리암은 죽었을 것이다. 베를리아가 일을 꾸몄다는 것은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설령 이번 일이 아니었더라고 해도, 카를로스가 언젠가는 리암을 그런 식으로 소모했으리라는 사실이 이렇게 증명되지 않았나.
그러니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베를리아와 자신의 사이에서 저울질해가며 누굴 버릴지 고민하던 카를로스,
데니안이 제 뜻대로 되지 않자 그를 곧바로 내쳐 버린 카를로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친구인 리암조차 사지로 내몰던 카를로스.
그 모든 모습이 안젤라를 분노하게 했다.
“네가 아니고서야 리암이 성검의 주인을 내몰도록 몰아갈 사람이 또 누가 있어! 이래도 아니야?!”
안젤라가 연이어 목소리를 높였다. 카를로스에 대한 실망과 배신감이 분노가 되어 그녀의 감정을 격앙되게 했다.
“대체 어디까지 망가질 건데!”
어느덧 안젤라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가로 열기가 몰려들어 발갛게 변했다. 울컥하는 감정이 가슴을 들썩거리게 했다.
한때 사랑했던, 그리고 어쩌면 지금도 완전히 버리지 못한 감정의 잔재가 남아 있는, 그런 상대가 이렇게까지 변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고통이었다.
안젤라는 고통스러웠다. 그녀는 자신이 고통스러울 만큼 카를로스를 사랑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카를로스를 사랑하면서도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던 오래전의 베를리아가 이제야 이해됐다.
“…내가 망가져?”
카를로스가 대번에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힘이 없던 4황자 시절, 그를 두고 실패작이라 낄낄거리던 다른 이복형제들의 목소리가 떠오른 탓이었다.
“착각하지 마.”
카를로스가 입매를 비틀며 말했다. 그는 일부러 더욱 고개를 꼿꼿이 쳐들었다.
그 누구도 자신을 쥐고 흔들 수는 없었다. 더 이상은.
“너나, 데니안이나, 리암이 없다고 하더라도 나는 멀쩡해.”
카를로스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세계가 무너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밀려오는 불안감에 잡아먹힌 모습을 보여 주기 싫어서, 그는 일부러 더욱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리암이 왜 거기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죽었다니 애석하게 되었어. 나도 유감이야, 앤지.”
그 말이 더없이 무의미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