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깽판치는악녀님 (120)화 (120/148)

120화. 이제 모두 대가를 치를 시간이었다(6)


 

그 순간 베를리아가 픽 웃음을 흘렸다.

“내가 왜?”

“…뭐?”

카를로스는 늘 저 홀로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아직까지도 저런 반응을 보일 리가 없으니까.

“성검의 주인을 죽였다가 사실이 밝혀지면 내가 모두 뒤집어써야 할 거 아냐?”

“그건 내가 알아서….”

“네가 알아서 할 수 있어서, 황족 시해죄까지 나한테 죄다 덤터기 씌운 건가?”

베를리아에게서 빈정거림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카를로스가 이미 그녀의 신뢰를 잃었음을 명백히 보여 주고 있었다.

카를로스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 성검의 주인이 가진 무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감히 추측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전대에도 전전대에도 성검은 사용된 기록이 없었다. 그나마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들은 대다수 허무맹랑하고 영웅적인 내용들뿐이라 도움도 되지 않았다.

성검의 주인은 최대한 조용히 죽어 줘야만 했다. 신전에서는 극진히 주인을 보호하고 있을 터였고 때문에 많은 기사를 보낼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얼마나 강한지도 모를 성검의 주인을 조용히 죽일 수 있는 것은 데니안이나 리암, 카를로스, 그리고 베를리아 정도였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카를로스는 직접 나설 생각이 없었다. 리암 또한 그런 일에는 몸을 사릴 터였고 데니안은 옳지 않은 일이라며 반대할 게 뻔했다.

그래서 남은 사람이 베를리아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속내를 베를리아가 모를 리 없었다.

“나한테 네 필요를 증명하라고 했지.”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베를리아는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채 다른 말을 꺼냈다.

“리암 로베르를 움직여.”

리암의 이름이 뜬금없이 나오자 카를로스가 움찔거렸다. 그가 곧 말도 안 된다는 듯 호소했다.

“리암이 이런 일에 나설 리 없다는 건 너도 알지 않나.”

“그러니까.”

베를리아가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올렸다. 카를로스도, 리암도, 데니안도 나서지 않을 일이었다. 그것 참 불공평하기 그지없었다.

“왜 매번 나만 나서야 하는데? 너희들은 위험하나 감수하지 않으면서.”

리리카가 육신을 메리쉬에게 넘겨주면서, 메리쉬가 일시적인 성검의 주인이 되었다. 그러니 베를리아는 성검의 주인을 위험에 빠트릴 생각 따위 애초부터 없었다.

“너는 항상 가장 위험한 일이 있으면 나부터 찾지. 그건 내가 너에게 가장 버리기 쉬운 패이기 때문이잖아?”

다만 이것이 가장 적절한 핑계였을 뿐이다. 카를로스를 완전히 밀어내지 않으면서도, 베를리아의 입장에서는 그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일이었으니까.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면 증명해.”

베를리아는 카를로스의 반박을 받아 들여 주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반박하라고 꺼낸 말이므로.

“만약에 네가 나를 버리지 않으리라 판단이 되면 나도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하겠어.”

카를로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가 의심스럽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 판단이라는 것은 지극히 너의 주관적인 것이 아닌가. 내가 그것을 어찌 믿지?”

카를로스는 베를리아를 가지고 싶어 하면서도 완벽히 믿지 않는다. 그녀 또한 알고 있었다.

베를리아의 첫 번째 삶에서 카를로스는 안젤라가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뒤 황후가 되어서야 그녀를 믿었다.

두 번째 삶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심을 버리지 못해 베를리아까지 손에 쥐려든 인간이었다.

그러니 자신을 위해 더 이상 무언가를 버리지도, 자신의 손아귀에 있지도 않은 베를리아를 카를로스가 믿을 리 없었다.

“네가 리암을 움직이게 한다면, 나는 그 대가로 네가 원하는 파벌에 접선하겠어.”

“…내 이름으로?”

“그래, 네 이름으로.”

카를로스의 표정이 변화했다. 제법 구미가 당기는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베를리아가 카를로스의 이름으로 황태자파가 아닌 이들을 회유하겠다고 한 것은, 결국 그녀가 그의 편으로 돌아섰음을 모두에게 알리는 일이 될 터였으니까.

어느 파벌이든 그들을 회유할 수 있고 없고에 관한 여부는 사실상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베를리아가 황태자의 측으로 다시 붙었다 것을 알게 된 순간, 그 사실 하나에 흔들리게 될 귀족들이 많았다. 회유야 두고두고 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물론 베를리아가 이미 아를레나 공작과 이야기를 끝마친 뒤였기에 하는 말이었다.

현재 정국은 황제파와 황태자파, 반황태자파 그리고 귀족파로 나뉘어 있었다. 어차피 카를로스가 신의 아들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이상 황제는 그를 지지할 터였고 그럼 황제파는 포기하는 게 나았다.

그렇게 되면 남은 것은 반황태자파와 귀족파뿐이었다.

그리고 베를리아는 카를로스가 반황태자파를 회유하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반황태자파는 그가 황제위에 오르면 언젠가는 와해될 세력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카를로스의 대한 원한으로 뭉친 이들이었고 황제나 아를레나 공작처럼 어떤 구심점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에 반면 귀족파는 아주 오랜 결속으로 뭉쳐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황실도 백성도 아닌 귀족들의 이권을 가장 최우선으로 했다. 그렇기에 대대손손 귀족파인 이들은 귀족파로 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이들을 뒤흔들기란 아주 힘든 일이 분명했다.

그러니 구심점이 없어 마음속 어느 한구석에 불안함을 안고 살 반황태자파를 회유하는 게 맞았다.

‘어차피 귀족파는 아를레나 공작 쪽에서 알아서 해 줄 테니까.’

아를레나 공작가는 대대로 귀족파의 수장을 연임해 온 가문이었다. 아무리 공작가라 할지라도, 어느 파벌을 계속해서 그 손에 꽉 쥐고 있었다는 것은 단순히 직위만으로 될 일은 아니었다.

즉 그만큼 아를레나 공작가에 대한 귀족파의 충성도가 높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니 귀족파 쪽은 안심해도 좋으리라.

“게다가 리암은 네게 진 ‘빚’이 있잖아?”

카를로스의 고민이 길어지자 베를리아가 말을 꺼냈다.

“빚?”

“내가 가짜로 만든 성검이 있는 장소를 알려준 게 리암이란 사실을 벌써 잊었어?”

베를리아의 말에 카를로스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마치 돌파구를 찾은 사람처럼.

베를리아가 찻잔을 들어 올려 제 입가에 떠오르는 비웃음을 가렸다.

카를로스 에덴버는 참 한결같은 인간이었다.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은인이든 친구든 연인이든 무엇 하나 빠짐없이 착취하는.

“좋아, 네 제안을 받아들이겠어.”

끝내 카를로스가 베를리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다운 선택이었다.

만약 훗날 카를로스가 패배한다면, 그것은 카를로스 본인보다 베를리아가 그를 더욱 잘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

‘성검의 주인이 나타났다, 리암.’

카를로스의 말을 떠올리며 리암은 이를 갈았다. 그가 자신조차 이렇게 이용해 먹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탓이었다.

‘그러니까 네가 죽여 줘야겠어.’

카를로스는 일전에 베를리아가 말해 준 거짓 정보를 전해 준 사실로 리암을 쥐고 흔들었다.

그도 알고 있었으리라. 리암이 황태자파에서 내쳐지면 어떻게 될지. 즉 리암에게는 겁박이나 다를 바 없는 일이었다.

리암은 결국 카를로스의 명령을 거부하지 못했다. 단언컨대 리암으로서는 처음 받아 보는 취급이었다.

“이제 베릴 다음은 나야?!”

리암은 분개했다. 카를로스의 앞에서는 드러내지 못한 마음이었으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건 카를로스가 베를리아를 소모하던 방식과 똑같았으니까.

그 대상이 타인일 때는 몰랐다. 리암은 그것이 자신이 되고나서야 깨달았다. 카를로스가 베를리아를 그렇게 다룰 때부터 언젠가는 그 차례가 제게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아야했다는 것을.

물론 뒤늦은 후회에 불과했다.

그리고 중앙 신전에 도착한 리암은 들어서지도 물러나지도 못한 채 주저하고 있었다.

‘내가 성검의 주인을 죽일 수 있을까…?’

실패하면 카를로스는 둘째치고서라도 후환을 남기게 되는 셈이었다.

성검의 주인을 해한 죄는 황족이나 교황 또는 성녀를 해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리암에게 성검의 주인을 살해할 의도가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는 순간 그는 물론이요, 로베르 가문도 멸문이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황태자파에서 내쳐진다고 해도 멸문까지는 당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리암은 다시 아무 권력도 없던 몰락 귀족으로 살아가고 싶지 않았다.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아무것도 없는 4황자를 지지하여 황실 마법부의 수장이 되기까지 리암 또한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

베를리아만큼은 아니어도 손에 피를 묻혔다. 가문을 호시탐탐 노리는 친척들을 직접 베어내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오른 직위였고, 그렇게 해서 지킨 가문이었다. 가문을 내어줄 수도 추락할 수도 없었다.

결국 리암이 이를 악물었다. 사실 아무리 갈등해 봤자 이미 중앙 신전까지 와 버린 이상 결말은 정해져 있던 셈이었다.

‘…실패하지만 않으면 돼. 성공하면 그만이야.’

리암이 손목에 채워진 팔찌를 내려다봤다. 신전에서 마력을 감지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하여 카를로스가 내어준 성물이었다. 그가 마법으로 제 기척과 모습을 가린 뒤에 중앙 신전 안으로 들어섰다.

성검의 주인은 신전에서 보호 중이었다. 그리고 중앙 신전에서 사실상 그런 귀한 존재가 있을 건물은 하나뿐이었다. 리암은 안젤라의 친구로 지내며 그곳을 자주 드나들었기에 길을 잘 알고 있었다.

리암은 거대한 중앙 신전에서 가장 안쪽의 화려한 건물을 지나쳐 그 옆의 작고 초라한 건물로 향했다.

그곳으로 들어가자 건물의 겉보기와는 다른, 아주 널따란 공간이 펼쳐졌다.

에덴버 건국 초기 신성력이 대단했던 시대에 지어진 건물로, 성녀와 교황만이 머무를 수 있는 건물과 이어지는 통로였다.

허가받지 않은 자가 가장 안쪽의 건물로 들어가면 바로 경보가 울리도록 되어 있었다. 성녀와 교황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

성녀와 교황만을 허락하는 건물에는 방조차 많지 않았다. 그리고 리암은 안젤라의 방과 교황의 방이 어딘지 또한 알고 있었다.

그 둘의 방을 지나쳐 리암은 마침내 인기척이 느껴지는 방의 문을 열었다.

“어서와, 리암.”

그리고 그곳에 베를리아가 서 있었다. 마치 리암을 기다린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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