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깽판치는악녀님 (119)화 (119/148)

119화. 이제 모두 대가를 치를 시간이었다(5)


 

다짜고짜 쳐들어 온 사람이 카를로스라는 것을 아는 순간 메리쉬는 진실로 그를 이곳에서 죽일지 고민했다.

“안 돼.”

그것을 베를리아가 막아섰다. 그녀는 카를로스 에덴버를 진즉에 죽이지 않은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으나, 당장 죽이기에는 또 문제가 있었다.

카를로스는 본디 지금 죽을 운명이 아니다. 그런데 그것을 타인이 비틀어 버린다면 인과율을 어긴 셈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는 안 됐다. 그렇게 되면 운명대로 가려는 관성에 의하여, 에를니아가 카를로스의 운명에 재차 개입할 틈을 주게 될지도 몰랐다. 그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여기서 기다려, 멜. 네 존재는 아직 카를로스에게 비밀이니까.”

새로운 차기 교황으로 등장할 때까지 카를로스는 리리카라는 존재를 몰라야만 했다.

다행히도 리리카는 자신의 신성력을 완벽히 숨길 줄 알았고, 그것은 메리쉬가 그의 육체를 가지게 된 시점에도 여전히 유효했다. 그러니 모습만 드러내지 않는다면 카를로스에게 들킬 일도 없을 터였다.

메리쉬가 두 입술을 악다물었다. 베를리아의 말이 맞았으나 그녀를 홀로 카를로스와 마주하게 두어야 한다니 탐탁지 않았다.

“…괜찮겠어요?”

메리쉬의 손이 베를리아의 뺨을 조심스레 매만졌다. 수없이 그녀를 제멋대로 휘둘러 온 카를로스였다. 그런 상대를 대하는 게 괜찮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걱정이 됐다.

“안 괜찮아. 언제든 카를로스 에덴버를 죽이고 싶어.”

베를리아가 단호히 대답했다.

“그러니까 참는 거야. 완벽하게 끝내기 위해서.”

덧붙인 말은 무엇보다 진심이었다. 메리쉬가 납득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내가 필요하면 불러요, 베릴.”

살아남기 위해 단련한 덕도 있으나 리리카는 기본적으로 엄청난 신성력 덕에 남들보다 신체 능력이 배로 뛰어난 사람이었다. 메리쉬처럼 타고난 감각이 맹수 같은 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신체 능력이 본래의 메리쉬와 거의 비슷했다.

마치 일부러 그렇게 준비해 둔 것처럼.

그로 인해 저택 내의 말소리를 듣는 것쯤은 메리쉬에게 일도 아니었다. 리리카가 아주 오래전부터 희생할 각오를 해 왔단 것을 알면 베를리아가 다시 무너질 테니 이에 관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알았어.”

베를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방을 나섰다. 그렇게 1층으로 내려가자 카를로스를 겨우겨우 막고 있는 므시아의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행동은 혹시라도 황태자를 잘못 건드려 베를리아에게 해를 끼칠까, 조심스러웠다. 그에 반면 카를로스는 그들이 다치든 말든 하등 신경 쓰지 않는 게 보였다.

“이것들이 감히 누구의 앞을…!”

“너야말로 감히 누구의 저택에서 네 멋대로 목소리를 높이는 거야!”

베를리아가 참지 않고 소리쳤다. 그 순간 1층에 있는 모든 이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쏠렸다.

“여기가 네 멋대로 나고 들어도 되는 곳인 줄 알아? 황태자로 살면서 최소한의 예의도 안 배웠나 보지? 지금 당장이라도 쫓겨나게 해줄까?”

베를리아가 따박따박 따지고 들며 카를로스를 몰아붙였다. 그럴수록 그의 얼굴은 빠르게 굳어갔다.

“네 사람 귀한 줄 알면 내 사람도 귀한 줄 알아야지. 어딜 내 사람들한테 행패야, 행패를. 내가 그런 걸 얼마나 싫어하는지 최소한 그 정도는 알지 않나?”

“베릴, 너는 내 황태자비가….”

카를로스가 미간을 찌푸린 채 입을 열었다. 베를리아는 카를로스가 자신의 선 밖에 있음을 명시했다. 괜히 그에 대하여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들은 이제 일평생을 함께해야 할 사이가 아니던가.

“단언컨대 너는 더 이상 내 사람이 아니야, 카를로스 에덴버.”

베를리아가 그의 카를로스의 말을 끊으며 픽 비웃음을 흘렸다.

베를리아를 물건처럼 소유하고자 할 때는 언제고 옆에 데려다 놓았다 싶으니 마음까지 바라는 그 작태가 역겨웠다.

카를로스가 메리쉬나 리리카처럼 그녀를 절절하게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베를리아의 사랑이 처음부터 자신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카를로스는 지금 당연히 제 소유였던 것을 남들이 가지는 게 싫을 뿐이었다.

왜, 그런 것 있지 않은가. 제가 가지기는 싫어도 남을 주기는 아깝고, 남의 손에 있는 떡이 더 커 보이는 그런 심리.

“참, 욕심이 많아도 너무 많아.”

베를리아가 빈정거리며 말했다.

그녀도 알았다. 자신이 어떻게 카를로스 에덴버를 사랑했던지. 그건 앞으로 베를리아가 메리쉬를 얼마나 더 사랑하게 될지라도 두 번은 할 수 없을 사랑이었다.

그때의 베를리아는 자신의 행복보다도 카를로스의 행복이 우선적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녀는 이제 행복해지고 싶었다. 참으로… 오래도록 이어진 더없이 맹목적이고 한없이 자기파괴적인 사랑이었다.

그 누가 그런 사랑을 줄 수 있겠는가. 그러니 카를로스가 인제 와서 아쉬워할 만도 했다. 그저 상부상조를 위하여 베를리아가 내주는 것과 자신의 모든 것을 내주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도 다르니까.

‘넌 어떻게 네가 나에게 무슨 짓들을 해 왔는지 아무렇지 않게 잊은 양 굴 수 있는 거야?’

베를리아는 자신이 카를로스를 너무 잘 안다는 사실조차도 싫었다. 누구에게 대입해 봐도 카를로스가 그녀에게 한 짓을 당한다면 절대 사랑할 수 없을 터였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그는 베를리아의 마음을 바랐다. 대단히 불유쾌했다. 당장이라도 따지고 들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카를로스는 끝까지 언젠가 베를리아가 제게 온전히 돌아올 수 있다는 착각 속에 살아야 했으므로.

“내 사람이길 바라지 않은 건 네가 먼저였잖아, 카를로스. 그런데 지금 와서 아쉬워?”

그래서 베를리아는 시선을 내리깐 채로 말을 덧붙였다. 마치 카를로스를 원망이라도 하는 것처럼.

원망과 증오는 다르다. 원망은 상대에게 바라는 바가 있으나 증오는 없었다. 증오에는 아무것도 없다. 증오가 낳는 것은 끝없이 앗아가는 싸움뿐이었다. 끝내 남는 것이 폐허뿐일지라도.

그래서 베를리아는 자신의 마음을 원망으로 둔갑시켰다.

아직은 절대로… 나는 너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며 그 무엇도 기대하지 않고 오로지 네게서 전부를 앗아 버리고 싶은 마음뿐이라는 것을 들키지 말아야 했으니까.

카를로스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잠시 후 역시나 그는 뻔뻔하게 베를리아의 손을 잡으며 대답했다.

“그래, 네 모든 게 내 것이길 바라.”

카를로스의 두 눈에 기묘한 열기가 돌았다. 그 눈을 마주하자 잡힌 손으로부터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베를리아는 순간 거세게 손을 쳐낼 뻔한 것을 꾹 눌러 참아야만 했다.

베를리아와 카를로스의 말은 일순 같아 보였으나 매우 달랐다.

카를로스 에덴버는 변하지 않는다. 그에게 그녀는 평생토록 그의 소유물이었다.

‘끔찍하기도 하지.’

멍청하고 어리석은 베를리아 리들턴. 그녀는 자조했다.

분명 처음에는 아니었으나, 언제부턴가 카를로스에게 베를리아는 동등한 인격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였는지 사랑에 눈이 먼 자는 알 수 없었다. 오래도록 스스로가 자신의 눈을 가린 채로 살아왔다. 그토록 멍청하고 어리석을 수가 없었다.

베를리아는 손을 쳐내는 대신 스륵 빼내는 것을 선택했다. 그리고 마치 지금 당장은 카를로스의 말에 대답해 주기 싫은 것처럼 말을 돌렸다.

“왜 왔어?”

카를로스가 방금 온기가 머물렀던 자신의 손을 힐끔 봤다가 다시 베를리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일단 응접실로 갔으면 좋겠군. 남들이 들어도 괜찮은 이야기는 아니라.”

카를로스가 리들턴 저택의 하녀와 하인을 의식하여 말했다. 베를리아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리들턴 저택의 이들은 모두 그녀의 사람이었다. 어딘가로 새어나갈지도 모른다는 듯 의심하는 눈길이 대단히 불쾌했다.

그러나 여기서 카를로스와 더 입씨름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필요 이상으로 그에게 적개심을 드러내 봤자 이로울 게 하나도 없었으니까.

“따라와.”

결국 베를리아가 짜증을 삼키며 뒤돌아 응접실로 향했다.

***

응접실에 단 둘만 남고서도 방 안의 소리를 차단하는 아티팩트까지 발동한 뒤에야 카를로스는 입을 열었다.

“성검의 주인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진짜야. 델로미아나가 그자를 직접 입적까지 시켰다고 하니까.”

카를로스가 골치 아프다는 듯이 말했다. 델로미아나는 현재는 쇠퇴했다고 하나 오래도록 신전에서 명망 높은 가문이었다. 성검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아직 소개되지 않았으나 델로미아나가 그 신원을 보장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진위성은 상당 부분 확보된 셈이었다.

물론, 베를리아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델로미아나의 가주에게 이 사항을 지시한 것이 그녀였으므로.

본래는 이쪽에 성검이 있다는 사실은 델로미아나 측에도 이렇게 이르게 알릴 생각이 아니었다. 원래라면 리리카의 신성력만으로도 신전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에는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져 버렸다. 안젤라가 명확히 베를리아의 쪽을 지지하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에를니아의 간섭이 없는 이 때에 모든 일을 끝내야만 했다.

그 모든 진실을 숨긴 채 베를리아는 몰랐던 척 입을 열었다.

“회의장에서 급하게 나갔던 게 이것 때문이었어?”

“그래. 교황의 상태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델로미아나가 성검의 주인을 데리고 온 이유는 뻔하니까.”

“차기 교황의 자리를 노리는 거겠네.”

베를리아가 알만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카를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쪽이 곤란하게 됐어.”

증오는 쓸데없는 것에도 반응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너와 내가 언제부터 우리였다고. 그렇게 빈정거리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베를리아가 말했다.

“너는 황권과 신권을 통합하고 싶어 했으니까.”

교황은 목숨이 위태롭고 성녀인 안젤라는 아직 정치적인 영향력이 없었다. 카를로스에게는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성검의 주인이라는 사실은 신의 아들이라는 것만큼이나 강력한 카드였다. 신전은 이를 이용하여 분명 그의 목적을 막으려 들 터였다.

“그래서 내가 뭘 해 주길 바라는데?”

베를리아가 이 모든 상황을 이해했다는 듯이 물었다. 어차피 이로 인해 카를로스가 자신을 찾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직접 파 둔 함정이었으니까.

그리고 나쁘지 않은 베를리아의 반응에 카를로스가 입을 열었다.

“성검의 주인을 죽여, 베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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