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깽판치는악녀님 (118)화 (118/148)

118화. 이제 모두 대가를 치를 시간이었다(4)


 

“아니, 이게 무슨…!”

갑자기 황태자비 이야기를 꺼내더니, 또 급작스럽게 회의를 끝내 버리는 황태자의 행태에 다들 어이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를로스는 그대로 회의장을 나가 버렸다. 누군가 붙잡을 새도 없이 빠른 발걸음이었다.

그곳에서 베를리아 홀로 웃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그 자리에서 그녀만이 알았다.

‘메리쉬가 제때 잘 도착했나 보네.’

또각또각. 높은 구두굽 소리가 회의장에 울렸다.

정치도 한편으로는 결국 누가 가장 그럴싸한 연극을 해내느냐의 싸움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키가 큰 베를리아가 힐을 신고 있으니 그녀의 시선이 훌쩍 위로 올라와 있었다.

회의장 정중앙으로 나오며 울리는 굽의 소리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보랏빛 시선, 그녀의 걸음걸이를 따라오는 길게 늘어진 치맛자락. 그 모든 것이 시선을 베를리아에게로 이끌었다.

베를리아의 손짓에 따라 시녀가 회의장의 문을 닫았다. 황궁에 매수해둔 이들을 미리 배치해 놓은 덕이었다.

그리고 베를리아가 익숙하게 황궁의 사람을 부리는 모습을 중앙 의원들이 빠짐없이 보고 있었다. 그 시선 한가운데에서 그녀는 말을 꺼냈다.

“내가 황태자비가 되는 것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신 분들이 많겠지요.”

기묘한 존대였다. 말끝은 높임말로 끝났으나 시작은 그렇지 않았으니까.

“딱히 나도 이 자리가 좋아서 가지겠다는 건 아닙니다.”

중앙 의원 중에는 카를로스의 사람들도 속해 있었다. 그가 나가자마자 회의장의 문을 닫았으니 그들은 이곳에 고스란히 남았다. 그러니까 지금 베를리아가 하는 말들은 얼마든지 카를로스에게 전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그들의 기억은 자신에 의해 몽땅 흐트러져 버릴 테니까.

“지금 그걸 말이라고….”

베를리아의 말에 누군가 황당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황태자비 자리를 원하는 이들은 수없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하겠다면서, 정작 하는 말은 좋아서가 아니라니. 당연히 단번에 납득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내가 이 자리를 갖지 않는다고 한들, 내게 부족한 것이 있습니까?”

베를리아가 물었다. 그녀는 황태자비 자리에 ‘오른다’고 표현하지 않았다. 황태자비 자리조차 그저 그녀가 가진 수많은 것 중 하나일 뿐이란 듯이.

베를리아가 말을 잇지 않자 침묵이 흘렀다. 지금 형세는 꼭 카를로스가 그녀에게 애원이라도 하여 황태자비로 만든 꼴이지 않은가.

게다가 황태자파 측 귀족들은 어쩐 일인지 죄 입을 닫고 있어 더욱 그런 생각을 부추겼다. 물론 이번에도 베를리아가 손을 썼을 뿐이지만, 그녀를 제외한 다른 이들이 그 사실을 알 턱이 없었다.

더 이상 반발이 들어오지 않자 그제야 베를리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 쓸데없이 내게 땍땍거리지 마세요. 내게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자리- 할 수 있다면 뺏어 가시든지, 아니면 내게 황태자비 자리를 대신하여 그만한 대가를 치르든지 알아서 하시고.”

대가. 그 말에 귀족 중 몇몇 눈이 반짝였다. 베를리아의 말은 일견 그녀를 회유할 수 있다는 것처럼 들렸으리라.

그 시선들을 보며 베를리아가 속으로 웃음 지었다. 그러나 아직은 그 속내를 노골적으로 드러낼 때가 아니었다. 그녀가 자신이 할 말은 이미 다 했다는 듯 그대로 인사도 없이 회의장을 나섰다.

***

세상의 모든 것은 반드시 질서와 무질서로 이루어져 있었다. 태초에 아무것도 없던 세상에 생명이 움틀 때 가장 먼저 생겨났던 것이 질서와 무질서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에르젠타샤의 힘은 신 중에서도 가장 전지전능했다. 그리고 무한한 힘에는 필연적으로 그만한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었다.

쿨럭-

저택에 돌아온 베를리아가 잔기침과 함께 자신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잔기침이 몇 번 더 이어지고 나니 비릿한 맛이 입 안에 감돌았다. 손을 떼자마자 피로 축축하게 젖은 손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베릴!”

그리고 그것을 발견한 메리쉬가 베를리아에게로 달려왔다. 그녀의 얼굴로 어느덧 또 붉은 낙인이 타올랐다.

“베릴, 또 힘을 쓴 거예요? 대체…!”

메리쉬가 표정을 잔뜩 일그러트렸다. 리리카의 죽음 이후, 베를리아는 쉬는 법이 없었다. 특히나 흡사 에르젠타샤의 힘이 화수분이라도 되는 것처럼 모든 일을 처리하기 일쑤였다.

그리고 그것은 베를리아에게 아주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지금처럼.

“에르젠타샤께서도 영혼에 난 상처는 어찌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에르젠타샤는 현재 봉인되어 있기에 자신의 힘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었다. 만약 신이 제힘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더라면 가장 먼저 네멘 리들턴 같은 악인의 손에 들어가게 하지도 않았을 터였다.

그런 상황에서 베를리아가 자꾸만 에르젠타샤의 힘을 끌어오는 것은 순수하게 그녀만의 부담으로 돌아왔다. 게다가 네멘 리들턴이 저주까지 걸어놓은 상황이니 그 부담은 배가 되는 셈이었다.

“베릴, 당신 매번 무리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제발….”

그런데도 베를리아는 무리하고 있었다. 메리쉬로서는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는 일이었다.

“아직은, 괜찮아.”

그러나 베를리아는 이번에도 말을 듣지 않았다. 메리쉬가 두 입술을 꾹 다물었다. 답답했으나 여기서 그녀를 더 추궁해 봤자 나아질 게 없다는 것을 알았다. 침묵을 유지하던 그의 손에서 새하얗게 신성력이 빛났다. 베를리아를 치료하기 위함이었다.

리리카가 성검 속 영혼들과 계약한 후부터 그의 신성력은 에를니아가 아닌 다른 신들의 것으로 바뀌었다. 그의 신성력이 베를리아에게 독으로 작용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였다.

“괜찮아, 멜.”

그러나 베를리아는 또 다시 그것조차 거부했다. 그녀가 메리쉬의 손을 밀어냈다. 메리쉬에게, 아니… 리리카의 힘으로 치료받고 싶지 않았다.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베릴.”

메리쉬가 손을 아래로 떨어트린 채 황망히 베를리아를 바라봤다. 죄악감이 그녀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그것은 눈에 띄는 형체조차 없어 그가 어찌해 줄 수도 없는 것이었다.

“미안해, 그런데 멜… 도저히 안 돼. 못 받겠어.”

저택에 돌아오기 전까지, 다른 이들의 앞에 서 있던 베를리아의 모습은 지극히 멀쩡해 보였다. 그러나 그녀가 하루 중 여지없이 무너지는 매 순간이 있었다.

바로 메리쉬를 마주하는 그때.

“저를 보기가 힘든가요?”

메리쉬가 베를리아를 붙잡지도 못한 채로 물었다. 그는 괴로워보였다. 그래서 그녀는 제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려 버렸다.

“아니야, 네 탓이 아니야….”

베를리아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저 홀로 느끼는 괴로움을 누구 탓하겠는가.

그저 리리카의 얼굴을 보며 메리쉬의 이름을 부른다는 게 너무나도 숨이 막힐 뿐이었다. 제 교만으로 리리카를 죽여 놓고, 메리쉬의 존재에 안도했던 끔찍한 자신. 제 존재 자체가 제 목을 조르고 있었다.

“베릴, 그냥 저를 원망해요.”

메리쉬가 베를리아의 두 손목을 잡아 내렸다. 그 손길이 평소와 다르게 조금 강경했다.

“저는 이렇게라도 당신 옆에 있어서 좋으니까.”

메리쉬가 머리를 숙여 입술을 맞댔다. 그러자 베를리아가 흠칫하며 고개를 비틀었다. 그것을 그의 손이 막았고 기어코 두 입술이 맞닿았다.

“멜, 잠깐…!”

베를리아가 메리쉬를 밀어내려고 했다. 그가 되살아난 이후, 그들은 이렇게까지 가까워졌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두 사람은 여전히 연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언가의 거리가 생겨났고 그것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결국 메리쉬는 그 후 내내 베를리아의 곁을 맴돌기만 했고 그녀는 이 사실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메리쉬는 기다리려고 했으나 그것이 일말의 소용도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밀려나지 않은 채로 말을 이었다.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이 무엇인지 알아요?”

자신을 대신해서 리리카가 죽었다. 그 사실이 메리쉬라고 한들 마냥 괜찮을 리 없었다.

“환희였어요.”

그러나 괜찮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메리쉬는 되돌려 받은 삶이 대단히 기뻤다.

“베릴, 당신 곁에 있을 수 있으니까. 내가 아닌 누군가 당신의 입에 입을 맞추지도, 당신을 이렇게 끌어안지도, 당신에게 사랑을 속삭이지도 못할 테니까.”

메리쉬는 자신이 파렴치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살려 준 이에 대한 고마움이나 미안함보다 제 욕망이, 제 사랑이 먼저였으므로.

“나는 태생이 글러 먹은 인간이라- 은혜도 모르고 내 욕심부터 차리는 것만 할 줄 알죠.”

메리쉬의 두 손이 베를리아의 뺨을 감쌌다. 그녀가 넋을 잃고 그를 바라봤다.

리리카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제 연인이 살아 돌아왔을 때 느낀 그 기쁨. 그것은 방금 메리쉬가 한 말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를 원망해요.”

메리쉬가 다시 한번 말했다. 그가 고개를 숙이자 다시 두 입술이 맞물렸다.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베릴의 머릿속을 꽉 채운 게 내가 아니라 리리카라는 사실에 질투하는 파렴치한이니까.”

메리쉬가 속닥였다. 베를리아가 끝내 눈을 내리감았다. 눈꼬리를 따라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그날의 입맞춤은 매우 짭쪼름하고 너무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를리아는 메리쉬를 밀어낼 수 없었다. 결국, 그였기 때문이다.

사랑한다. 내 죄악까지도 기꺼이 나누어 가지는, 나와 닮은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네가 살아 있음에 기뻐하지 않기에는 너무나-.

그래서 리리카에게 더없이 미안할 만큼.

***

쾅쾅쾅!

어둑한 밤이었다. 누군가 리들턴 저택의 현관문을 거세게 두들겼다.

“누구신데 무례하게…!”

“비켜.”

저택을 지키던 하인이 문을 여는 순간 상대가 그를 퍽 밀고 들어왔다. 요즘 베를리아의 상태가 불안정하여, 대문 밖으로 쳐 둔 결계 또한 완벽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허락받지도 않았는데 강제로 대문을 넘어 들어온 상대에 당황한 하인이 빠르게 그를 쫓아갔다.

그러나 하인이 그를 말리기도 전에 카를로스가 외쳤다.

“베릴! 네가 해 줘야할 일이 있다!”

마치… 베를리아가 여전히 저를 위한 개라도 되는 것처럼 당당하기 그지없는 요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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