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깽판치는악녀님 (117)화 (117/148)

117화. 이제 모두 대가를 치를 시간이었다(3)


 

장내의 모두가 한참을 침묵했다. 그 끝에 알마데이르가 입을 열었다.

“…그 말을 책임지실 수 있겠습니까?”

베를리아는 어느덧 카를로스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러자 서서히 그의 얼굴에 당황이 미약하게 드러났다. 방금 스스로가 내뱉은 말이 지극히 충동적이었기 때문이다. 카를로스는 자신이 그저 속으로만 생각하고 있던 내용을 입 밖으로 냈다는 사실에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 전하, 설마 책임지지도 못하실 말을 주신의 이름까지 들먹이며 하신 것은 아니겠지요.”

다른 대신관이 카를로스의 대답을 재촉했다. 그가 입술을 꽉 다물었다. 이미 많은 이들 앞에서 나가 버린 말이었다. 돌이킬 수 없었다. 카를로스가 조금 늦게 입을 열었다.

“그대들이야말로, 감히 에를니아께서 내게 내리신 말을 의심하는 것인가?”

카를로스가 고개를 빳빳이 들고 말했다. 내뱉은 말이 거짓일 때는 상대에게 조금의 틈도 보이지 말아야 했다. 게다가- 어차피 에를니아는 그의 편이 아니던가.

그즈음 베를리아가 앞으로 나섰다.

“황태자 전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니 믿어야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녀가 좌중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신탁이 내려오는 방식은 매번 달랐으니…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저희가 알 수 없으니 말입니다.”

베를리아의 말에 카를로스가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일견 그의 편을 들어 주는 말 같았으나, 그녀의 말은 이 자리의 모두가 가진 의심의 형체를 잡아 주는 것과 다름없었다.

다들 하나같이 마음속에 의문 하나쯤은 품고 있을 터였다. 과연 황태자가 말한, 황태자만 아는 그 신탁이 진실일 것인가? 믿는다고 말했으나 허울뿐인 믿음이었다.

“에를니아께서 직접 나를 아들이라 칭하셨다, 그러니 내가 거짓을 전하겠는가.”

카를로스는 완전히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의심 가득한 믿음일지라도, 에를니아의 이름 앞에서 이 이상 거짓이라고 주장하기 힘든 것은 대신관들 쪽도 마찬가지였다. 어찌 됐든 카를로스는 신이 직접 자신의 아들이라 지칭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는 그 점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좋습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믿지 않을 수 없지요, 다만….”

대신관 중 대표격인 헤르메시아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카를로스가 안심하기도 아주 잠깐, 그녀가 사족을 덧붙였다.

“증표를 주실 수 있으실 런지요.”

“증표? 결국 내 말을 못 믿겠으니 증명하라, 이 말인가?”

카를로스가 대단히 불쾌하다는 듯이 헤르메시아의 말에 반문했다. 그녀는 온화하게 웃을 따름이었다.

베를리아는 그 모습을 느긋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아니, 그녀뿐만 아니라 회의장 내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카를로스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설령 대신관들이 믿는다고 해도 귀족들 또한 그러리란 법 따위 없었다. 이곳에는 카를로스를 지지하는 자보다, 그렇지 않은 자들이 훨씬 더 많았으므로.

그러니 다들 원하는 것이다. 카를로스가 자신의 말을 책임질 만한 무언가를.

“제가 어찌 감히 황태자 전하께 그런 것을 요구하겠나이까. 그저 신전의 입장에서는 앞으로 황태자 전하께서 원하실 때마다 성물을 내어드려야 할 텐데… 여기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돌아가면 저희의 처지가 난처해질 것입니다.”

헤르메시아가 눈을 내리깐 후 아주 곤혹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것은 누가 들어도 타당해 보였다.

성물은 이 대륙 위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가장 탐내는 보물이었다. 그런 것을 원할 때 내어주어야 한다는 점은 분명 대단히 불유쾌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대신관들이 순순히 황태자의 말에 네, 하고 긍정한 후 돌아가 봐라. 당연히 신전은 그들을 책할 터였다. 그러니 그럴 때를 대비하여 변명할 거리라도 응당 하나 가져가야 하지 않겠는가.

“좋다.”

카를로스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더 우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단, 이미 지나간 신탁을 어찌 증명해야 할지 나는 모르겠으니… 방법은 그대들이 가져오도록.”

카를로스가 느긋하게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그의 시선이 더없이 오만했다.

신탁을 증명하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그리고 그 방법을 사용하려거든 반드시 성검이 있어야만 했다.

신전은 성검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베를리아가 손에 넣어 제가 빼앗았던 것은 가짜였다. 성검의 행방은 아무도 몰랐고 그래서 카를로스는 두렵지 않았다.

증명할 방법 따위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만약 방법을 가져온다면 기꺼이 따라 주시겠다고 맹세해 주실 수 있습니까?”

가만히 기다리고 있던 알마데이르가 입을 열었다. 그는 베를리아를 쳐다볼 뻔한 것을 애써 참았다. 마치 예언이라도 한 것처럼 모든 일이 베를리아의 말대로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좋아, 에덴버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카를로스가 대답했다. 에덴버의 이름을 건 이상, 이 맹세를 지키지 않으면 그는 황태자위를 내놓아야만 했다. 그 순간만큼은 자신이 무모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어차피 성검을 찾을 수 없을 테니까.

말도 안 되는 무모함, 그건 방금 전 베를리아가 카를로스의 마음을 온통 어지럽힌 탓이었다. 카를로스는 평정심을 찾지 못했고 제 욕망이 원하는 대로 충동적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그녀는 대단히 만족스레 미소했다. 물론, 속으로만.

‘이제 에를니아는 카를로스를 비호할 수 없어.’

베를리아는 확신했다. 에를니아는 인과율을 너무 많이 어겼다. 자신을 세뇌하여 강제로 조종하고 메리쉬를 죽게 만들었다. 그로 인해 에를니아가 더 이상 인간계에 관여할 수 없으리라는 에르젠타샤의 판단이 정확히 맞았다.

그렇지 않다면 카를로스가 저토록 어리석은 판단을 연이어 내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끼어들지 않을 리가 없을 테니까.

“이제 그대들이 꺼낼 안건이 끝났다면, 다음으로 넘어가지.”

“…다음, 안건이라니요?”

대신관 중 하나가 되물었다. 귀족들에게서도 술렁거림이 흘러나왔다. 회의는 성지에 허락받지 않은 기사들을 들인 카를로스를 문책하기 위한 자리였다. 그런데 다른 논제라니. 전혀 듣지 못한 일이었다.

“일전에 에를니아께서 내게 반쪽과 함께 성지에 오라고 하셨던 말씀을 다들 기억하고 있겠지.”

카를로스의 말에 베를리아가 입매를 비틀었다. 이 상황에서 그가 저 이야기를 꺼낼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안젤라와 이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황태자비 관련 이야기를 꺼내 봤자 카를로스에게 좋은 점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그 반쪽을 황태자비로 세우고자 한다. 신께서 직접 내 반쪽이라 내리셨으니, 그대들도 의의는 없을 테지.”

귀족들의 얼굴에 불만이 어렸으나 누구도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에덴버는 에를니아의 뜻에 따라 세워진 나라였다. 그런 신이 직접 정한 반려를 정실도 아닌 후비로 맞이하라 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베를리아가 입술을 남몰래 비죽였다. 어차피 귀족들 사이 그녀의 평판이야 베를리아에게 상관없어진 지 오래였다. 안젤라와 아를레나 공작에게도 미리 말해 놨으니 딱히 손해 볼 일도 없었다. 그저 일시적이지만 카를로스의 옆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대단히 불만스러웠을 뿐.

“설마 지금 성녀님을 황태자비로 맞이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대신관 루시엘라가 잔뜩 얼굴을 구긴 채로 카를로스를 쳐다봤다. 황족을 대하는 태도라기에는 대단히 불경스러웠다. 그러나 그녀는 안젤라가 혼인 의사가 없음을 밝힌 후 가장 먼저 성녀를 지지했던 사람 중의 하나였다. 안젤라가 원하지도 않는데 제멋대로 구는 것이 뻔할 황태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성지에 함께 간 이가 성녀님뿐은 아니지 않나.”

대신관의 질문에 카를로스가 담담히 답했다. 안젤라가 아닌 성녀. 호칭이 이제는 그 둘의 사이가 달라졌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대다수의 시선이 한곳으로 몰렸다. 성녀 외에 카를로스가 제 반려로 삼을 상대. 그에 걸맞다고 짐작할 수 있는 상대는 단 하나였기 때문이다.

“말도 안 됩니다!”

“다른 황태자비 후보들에게도 동등한 기회를 주어야 옳습니다!”

“미래에 제국의 황후가 되실 분을 이리 독단적으로 결정하시면 안 됩니다!”

이번에는 귀족들에게서 반발이 터져 나왔다. 지금까지 일이 많아 황태자비를 뽑는 일이 번번이 미루어졌지만, 여전히 제 여식을 그 자리에 앉히고자 하는 이들은 많았다. 그런데 황태자와 멀어진 듯했던 베를리아가 갑작스럽게 대번에 황태자비가 되다니. 

그렇지 않아도 다수의 귀족에게 위협이 될 만큼 대단한 권세를 가지고 있는 베를리아 리들턴이었다. 그런데 황태자비의 자리에까지 오르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게다가 리들턴 백작은 평…!”

계속해서 이어지는 귀족들의 목소리를 베를리아가 끊고 들어왔다. 어쨌든 카를로스에게 제 입으로 황태자비가 되겠다고 말한 이상 협조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으므로.

“제가 어쨌다는 건지 더 말해 보시죠. 저도 궁금하군요.”

평민. 그 피를 문제 삼으려던 귀족의 입이 다물렸다. 귀족 중에는 여전히 혈통에 집착하는 이들이 많았다. 방금 베를리아의 출신 성분을 문제 삼으려던 자도 그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 귀족은 베를리아와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퍼뜩 정신을 차렸다.

황실이나 신전조차도 어찌하지 못하는 여자. 심지어는 높은 확률로 어쩌면 황후가 될 여자. 그런 이의 심기를 거슬러서 좋을 것이 무어 있단 말인가?

“크흠… 아닙니다. 제가 방금은 실언을 했습니다.”

아무리 한순간에 말을 내뱉었어도 중앙 위원까지 한 자였으니 아둔할 리 없었다. 조금 전 입을 열었던 백작이 돌연 태도를 바꾸었다.

그리고 장내에 침묵이 맴돌았다. 모두가 베를리아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황태자와 베를리아 리들턴이 작당한 일에 그들이 반대를 해 봤자 과연 얼마나 효용이 있을 것인가에 대한.

그 침묵을 뚫고 갑작스레 회의장의 문이 열렸다. 누군가 무례하다고 외칠 새도 없이 카를로스의 기사가 그에게로 다가와 무언가를 속닥였다. 카를로스의 얼굴이 빠르게 굳어 버렸다.

“회의를 이만 파한다, 다들 물러가도록!”

그리고 카를로스가 대뜸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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