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이제 모두 대가를 치를 시간이었다(2)
카를로스의 시선이 흔들렸다. 황태자보다 더한, 누구도 반박 불가할 절대적인 권력.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 자명한 일이었으니까.
“…지금 나보고 반역이라도 하라는 것인가?”
카를로스가 목소리를 낮춰 베를리아에게만 들리게끔 물었다. 그로서도 조심스럽게 굴지 않을 수 없는 문제였다.
“그건 네가 알아서 할 일이지.”
베를리아가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날 선 말이 이어졌다.
“네가 무슨 일을 하든 나는 관여할 생각 따위 없어. 내가 언제까지고 네 뒤치다꺼리만 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
“도대체 그럴 거면 왜 내 황태자비가 되겠다고…!”
“난 네 황태자비가 되겠다고 한 적 없어.”
울컥하여 소리치는 카를로스의 목소리를 베를리아가 단번에 잘라냈다.
“황후가 되겠다고 했지.”
카를로스가 멈칫했다. 그는 그제야 베를리아가 말한 것과 자신이 받아들인 것이 다르다는 점을 인지했다.
“…지금 황태자비 자리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소리인가?”
“당연한 거 아냐? 내가 겨우 황태자비 따위가 되려고 싫은 네 옆으로 돌아가겠다는 줄 알아?”
베를리아가 코웃음 치며 대답했다. 그녀의 말은 즉, 황태자비의 자리에 오르는 것조차도 황후의 자리를 담보로 할 때만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였다.
“어차피 황태자비의 자리에서 얌전히 기다리면 황후가 될 텐데.”
“내가 널 뭘 믿고 기다려? 그 전에 또 내 뒤통수치지 말란 법 있어?”
대화는 다시 제자리걸음이었다. 카를로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대체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지?”
카를로스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마치 베를리아가 어린아이처럼 생떼라도 부리고 있다는 태도였다. 그는 매번 이런 식이었다.
제 기준에서 어긋나는 순간 상대의 말을 진지하게 듣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베를리아는 이제 그런 카를로스를 설득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네가 알아서 나한테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지. 내가 그거까지 알려줘야 해?”
베를리아의 어조에 한심하다는 감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녀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내가 필요할 때는 잘 이용해 먹더니, 너는 그런 생각조차 못 해?”
카를로스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베를리아가 방금 한 발언은 두 사람의 입장이 정반대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었으니까.
“내가 그렇게 해서까지 너를 황태자비로 들일 거라고 생각하나?”
카를로스가 짐짓 스스로의 말을 취소할 것처럼 굴었다. 그러나 베를리아는 당연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네 손에 곱게 죽어 주지 않을 건데, 그런 나를 네가 곁에 두지 않고 불안해서 견디겠어?”
카를로스의 입이 재차 다물렸다. 베를리아가 픽 웃음을 흘렸다.
“나는 네 생각보다 너에 대해 더 잘 알지, 카를로스 에덴버.”
이것만큼은 오만이 아니었다. 너무나 증오했기에 그만큼 잘 알 수밖에 없었을 뿐이었으므로.
에를니아가 아니었더라도 카를로스는 높은 확률로 베를리아를 놓지 못했을 터였다. 왜냐하면 남의 손에 넘겨주기에 그녀는 너무 유용하고 위험한 무기이니까.
“그러니 이제는 네가 내게 쓸모를 증명해,”
아득- 카를로스에게서 이를 가는 소리가 살벌하게 흘러나왔다. 그러나 베를리아는 그의 대답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다.
카를로스 에덴버의 자존심에 스스로가 쓸모없다는 소리를 듣고는 살지 못할 테니까.
“좋아, 얼마든지.”
이어진 카를로스의 대답은 역시나 예상과 다를 것이 없었다.
***
수도로 돌아온 베를리아는 곧바로 아를레나 공작을 찾아갔다. 카를로스에게는 이 사실을 일부러 숨기지 않았다. 어차피 아를레나 공작이 말을 새어 나가게 둘 리도 없고, 무엇보다 지금의 카를로스로서는 그녀가 공작을 찾아온 이유를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황태자비가 될 겁니다.”
물론 아를레나 공작 또한 베를리아가 이런 용건을 꺼내 들 줄은 몰랐겠지만.
“황태자 쪽에 다시 붙기로 한 건가?”
아를레나 공작이 침착하게 물었다. 그녀에게는 흥분한 기색 따위 일절 보이지 않았다. 마치 베를리아가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아니요.”
그리고 베를리아의 입에서 흘러나온 대답은 역시나 공작을 실망시키지 않는 것이었다.
“적을 죽이려거든, 적의 심장 가까이에 가야 한다는 말이 있지.”
아를레나 공작이 알 만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래, 내가 무얼 도와주면 되지?”
역시나 공작은 쓸데없는 줄타기가 없어서 좋았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아를레나 공작의 말에 베를리아가 흡족하게 미소했다.
아무리 카를로스와 성녀의 사이가 틀어졌다고 해도 여전히 귀족들이 약간은 불리한 상황이었다. 무려 에덴버의 유일신인 에를니아가 그를 지지하고 있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황태자의 약점은 그를 적대하는 모두에게 절실한 것이었다. 그것을 베를리아가 해 주겠다는데 공작이 협조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황태자가 성지에 허가받은 것 이상의 기사들을 데려왔습니다. 그것을 문제 삼아 주세요.”
“에를니아께서 황태자를 직접 제 아들이라 칭한 상황에 그것이 어떤 소용이 있겠는가?”
“소용이 없어도 상관없습니다.”
“어째서?”
“지금 당장은 말씀드릴 수 없지만… 조만간 황태자의 대적자를 데려올 생각입니다. 그 전에 카를로스 에덴버에 대한 여론을 최대한으로 악화시켜 놓으면 좋겠어요.”
아를레나 공작이 잠시 침묵했다. 황태자의 대적자. 그 존재가 누구일지 가늠하는 공작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혹시 교황의 상태가 위태로운 것과 관련이 있나?”
교황이 승하하면 자연스레 다음 대 교황이 추대될 터였다. 현 시점에서 나타날 황태자의 대적자란 그뿐이었다.
그 사실을 단순히 단어 몇 가지만으로 짐작해낸 것이 역시 아를레나 공작다웠다.
“보시면 아시게 될 겁니다.”
베를리아는 답하지 않고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러나 공작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해 주지.”
물론 공작의 대답조차 만족스러웠다.
***
아를레나 공작의 행동은 역시 빨랐다. 신전에서 다음 날 곧바로 카를로스의 행동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해 온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 대신관 몇과 중앙 의원을 맡은 귀족들이 황궁의 회의실에 모여 있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대신관 알마데이르가 소리쳤다.
“아무리 황태자 전하라고 하실지라도 신전에 이리 무례하실 수는 없으십니다! 성지에 허가받지 않은 자들을 출입시킨 것도 모자라 무장한 기사들이라니요! 대신전을 점령이라도 하시려던 겁니까!”
“내가 대신전을 강제로 손에 넣어서 굳이 무얼 한다는 말이지?”
카를로스가 반박했다. 그의 말은 합당했다. 당장 카를로스가 성지를 어찌한다고 해도 얻을 이득은 없었다. 단 한 가지를 제외한다면.
“성검의 주인이라 속이셨던 황태자 전하셨으니, 이번에는 다른 성물을 노리셨던 게 아닐지 누가 안답니까.”
대신관 헤르메시아 제이스가 조곤조곤히 말을 꺼냈다. 헤르메시아는 귀족파에서 오래전부터 매수해 둔 신관 중의 하나였다.
노골적으로 황태자를 성물 도둑 취급하는 말이었다. 그러자 당연하게도 황태자파 쪽에서 들고 일어났다.
“대신관이야말로 무례하다! 감히 황태자 전하께 그런 망발을 하다니!”
“성물의 기본적인 소유권은 신전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황태자 전하께서는 사사로이 성검을 소유하시려던 전적이 있지 않습니까? 가짜였지만요.”
“그러니 저희로서는 타당하게 가질 만한 의혹이 아닙니까.”
다른 대신관들도 연이어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에는 비웃음과 조롱이 담겨 있었다.
에를니아에 의해서 좋게 넘어갔다지만, 황태자가 가짜 성검의 주인 행세를 한 것은 명확한 사실이었다. 신관들이라고 모두 신을 절대적으로 여기는 것도 아니었으니, 회의장의 대신관들은 그 사실을 걸고넘어지는 데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카를로스가 날카로운 어투로 맞섰다.
“그대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는데, 에덴버의 건국 초기까지만 하더라도 성물은 모두 황실에서 보관했었다. 그것을 몇 대 전의 교황이 신탁을 들먹이며 황실에서 앗아갔지.”
“앗아가다니요! 누가 보면 신전에서 강탈이라도 해 간 줄 알겠습니다! 아무리 황태자 전하라고 하시나, 황제 폐하도 아니신데 교황 성하를 상대로 그리 말하실 순 없습니다! 언행에 주의해 주십시오!”
알마데이르가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카를로스의 미간이 팍 일그러졌다.
그놈의 황제, 황제, 황제.
어차피 곧 자신의 자리가 될 터인데 베를리아부터 해서 이놈 저놈 걸고넘어지니 대단히 심기에 거슬렸다.
그때, 카를로스와 베를리아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가 입 모양으로 무언가 속닥였다. 그 순간 베를리아의 목소리가 흑마법을 통해 카를로스의 귓가에 아른거렸다.
“어차피 에를니아는 네 편이잖아.”
베를리아가 후끈한 손등을 드레스 소맷자락으로 감추었다. 에를니아가 더 이상 이 일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회의장 전체에 에르젠타샤의 힘을 써 두었다. 그 탓에 저주의 낙인이 다시 발현되고 있었다.
그러나 베를리아는 티 내지 않기 위해 표정을 최대한 태연하게 유지했다. 얼굴로 타고 오르는 낙인을 막는 것 또한 이를 위한 것이었다. 자신이 힘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카를로스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한 번쯤, 거짓말하는 것도 괜찮잖아?”
베를리아의 자안이 번뜩였다.
에를니아의 권능은 욕망이었다. 에를니아는 그 권능을 이용하여 욕망을 심고 부추겨 사람을 조종했다. 그녀는 그보다 상위의 신인 에르젠타샤의 권능으로 같은 일을 못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르젠타샤의 권능은 질서와 무질서. 그러니 충분히 카를로스의 이성을 흐트러트려 놓고 혼란스러운 그의 마음을 더욱 휘저어 놓을 수 있으리라.
“에를니아를 이용해, 카를. 넌 신의 아들이잖아.”
에를니아가 그랬듯이, 베를리아의 음성이 카를로스의 귓가에서 타락을 부추기는 악마처럼 달콤하게 속닥거렸다. 카를로스가 멍하니 그녀를 보다가 돌연 내뱉었다.
“에를니아께서 내게 말씀하시길, 성물들을 모두 황실로 거둬들이라 하셨다.”
또 다른 거짓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