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이제 모두 대가를 치를 시간이었다(1)
그간 일이 많았기 때문에 안젤라도 잊고 있었으나, 성녀가 축객령을 내렸으니 황태자는 더 이상 성지에 머무를 수 없었다. 그리하여 카를로스는 쫓겨나는 것과 다를 바 없이 급하게 짐을 꾸리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베를리아만을 성지에 두고 떠날 리가 없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었다.
“앤지, 나를 좀 도와줘요.”
그래서 그 전에 베를리아는 안젤라를 찾아갔다.
“우선 앉아요, 베릴. 내가 찾아가도 됐는데….”
베를리아를 보자마자 안젤라가 다급하게 말했다. 그녀의 눈이 분주하게 베를리아를 살피고 있었다.
베를리아는 누가 봐도 위태로워 보였다. 겨우 하나로 질끈 묶었을 뿐인 머리는 제대로 손질되지 않은 티가 확연히 났고, 눈 밑은 거뭇거뭇했다.
안 그래도 창백한 피부는 완전히 질려버려서 차라리 시체의 낯빛이 더 나을 지경이었다. 그러니 안젤라가 걱정하는 것도 당연했다.
“카를로스 에덴버가 내게 황후가 되라고 했어요.”
베를리아가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 평소였다면 안젤라를 생각하여 이렇게 막무가내로 이야기를 시작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러나 배려와 다정은 최소한의 여유라도 있어야 가능한 법이었다. 지금의 베를리아에게는 그런 것 따위 없었다.
“나는 황태자비가 될 거예요.”
이 말이 안젤라에게 배신으로 들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해야만 했다.
“그렇게 해서 카를로스 에덴버의 가장 큰 목줄을 잡아 쥘 거고, 그 자리에서 끌어내릴 거예요. 결정하기 전에 미리 말을 못 한 것은 미안해요, 앤지가 내게 배신감을 느끼고 탓한다고 해도 받아들일게요, 그렇지만 그 전에….”
“잠깐, 잠깐만요. 진정 좀 해요, 베릴.”
그러나 안젤라는 도리어 베를리아를 달랬다. 그녀가 베를리아의 손에 따뜻한 찻잔을 쥐여 주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같이 보여요. 뭘 하든 베릴이 멀쩡하게 버티고 있어야 가능하죠.”
안젤라는 마치 카를로스에 대하여 일말도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가 자신의 시중을 들어주는 신관을 시켜 간단한 요깃거리를 가지고 오게 했다. 그동안 베를리아는 넋을 놓은 채 안젤라를 볼 뿐이었다.
“저 신관은 오래전부터 나와 함께 해온 자이니 베릴이 날 찾아온 것에 대하여 말이 새어나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요.”
안젤라가 침착하게 설명까지 덧붙였다. 그 차분함이 쫓기는 듯 말을 꺼내던 베를리아까지 가라앉혔다.
“내가 카를로스를 성지에서 쫓아내겠다고 하는 말을 들은 후에, 내게 반발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내가 원하는 대로 했으면 좋겠다고 지지하는 이들도 있더군요.”
안젤라는 지금까지 쭉 인애로 사람을 대해왔다. 한때 그녀는 그것이 잘못되었는지 혼란스러웠다. 인애는 권력을 가져다주지는 않았으니까. 그래서 진짜로 권력이 필요할 때, 자신은 그것을 사용할 수 없었으니까.
그러나 이제는 알았다. 안젤라가 제 뜻을 이룰 수 없었던 것은 침묵의 대가였지, 인애로 사람을 대했던 대가가 아니란 것을.
“나는 권력 대신에 믿음을 얻었어요. 베를리아가 아니었더라면 이런 건 알지 못했을 거예요.”
지금까지 안젤라는 단 한 번도 신전의 뜻을 거스른 적이 없었다. 황태자에게도 순종적인 약혼녀였으며 호불호를 크게 표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니 모두 당연하게도 신이 직접 자신의 아들이라 말한 카를로스와 안젤라가 결합하는 일이 그녀의 행복이라 믿었다.
그러나 그게 아님을 알게 된 지금, 많은 이들은 여전히 성녀의 행복을 바랐다.
안젤라가 스스로 목소리를 내지 않았더라면 절대 몰랐을 일이었다.
“그러니까 내게 변명하지 않아도 돼요. 설명해주면 고맙겠지만.”
안젤라는 베를리아를 믿고 있었다. 그게 두 눈에 확연히 보였다.
베를리아는 울 듯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안젤라는 변해 있었다. 그녀가 평생 온실 속 화초이리라 한때 그렇게 여겼던 사람이.
“미안해요, 미안해요, 앤지….”
베를리아가 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안젤라는 변했다. 그녀는 어느덧 스스로 자신이 사랑받을 자격이 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모두가 변해가는 속에서 가장 변하지 못한 것은 자신이었다.
교만으로 인한 대가를 치를 때까지.
그 대가를 자신이 아닌 리리카가 치를 때까지.
이 얼마나 어리석은 종자란 말인가. 스스로의 존재가 대단히 창피하고 수치스러웠다.
“베릴이 제게 뭐가 그렇게 미안한 지 저는 모르겠지만….”
안젤라가 다가와 베를리아의 손을 잡았다.
“만약 그런 게 있다고 할지라도, 용서해줄게요. 그러니까 우선 먹고, 자고, 쉬어요. 그래야 뭐라도 하죠.”
안젤라의 다른 손이 베를리아의 등을 토닥였다. 그 순간의 그녀는 더없이 완벽한 성녀였다. 그래서 베를리아는 더욱 무너져내렸다. 그 끝없는 믿음이 서글펐다.
그리고 제게 그런 믿음을 보여주었던 어떤 사람이 이제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아주 지독히도 다가와서… 더없이 고통스러웠다.
***
무언가를 먹는 것조차 죄스러웠으나, 어찌 되었든 뱃속에 음식이 들어가니 기운이 나는 것은 사실이었다. 안젤라가 준비해 준 요깃거리들을 꾸역꾸역 다 먹은 베를리아가 차를 들이켠 후 입을 열었다.
“카를로스 에덴버의 적통성에 문제가 있어요.”
안젤라의 표정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그럴 만도 했다. 카를로스의 적통성은 무려 에를니아가 직접 확인해준 것이었으니까.
“아니, 정확히는 에를니아에게 문제가 있다고 봐야겠죠.”
그래서 베를리아는 곧바로 말을 덧붙였다.
“본디 이 세상에는 에를니아 말고도 신이 여럿이 있었으니까요.”
“베릴, 지금 뭐라고 했어요?”
안젤라가 놀라 반문했다. 어떤 역사의 기록에서도 없던 이야기였다. 게다가 에덴버의 역사 자체가 에를니아의 창세기 신화로 시작되었다. 그렇다는 것은 적통성을 잃는 대상이 비단 카를로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다른 신들을 섬기던 모든 존재를 말살한 이후에 세워진 나라, 그게 에덴버예요.”
마침내 베를리아의 입에서 진실이 흘러나왔다.
“에를니아는 다른 신들을 배신한 후, 자신을 제외한 모든 신을 봉인해버렸고… 에덴버의 핏줄은 그런 에를니아의 명을 따라서 다른 신의 흔적을 전부 지운 후 그 대가로 황제가 된 거죠.”
“…지금… 그러니까… 에덴버가….”
안젤라의 입술이 파르르 떨려왔다. 한순간에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더듬더듬 겨우 말을 이었다.
“에덴버가 학살자의 핏줄이라는 거예요?”
달그락. 찻잔이 잔받침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우아하게 잔을 들고 있던 안젤라가 놀라 힘 조절을 못 한 탓이었다.
“그래요,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안젤라가 해줘야 할 일이 있어요.”
안젤라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무슨 일인지 말해줘요. 최선을 다할 테니.”
언젠가부터 안젤라의 두 눈에 흔들림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그 결연함이 더없이 믿음직스러웠다.
“성지 근처에 고대 신전이 있어요. 그곳을 조사해줘요.”
베를리아가 성검을 내밀며 말했다.
“다른 신의 말에 의하면, 에를니아는 과하게 인간의 운명에 관여한 탓에 더 이상 우리를 세뇌하거나 조종하지 못할 거라고 하더군요. 만에 하나 문제가 있더라도 이 성검이 막아줄 거고요.”
“그럼 베릴은요?”
안젤라는 성검을 받아들면서도 베를리아의 걱정을 잊지 않았다. 그녀가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제는 괜찮아요. 아무리 에를니아라고 할지라도… 아주 강력한 인간의 감정까지 통제할 수는 없으니까.”
벌써 네 번째 삶이었다. 베를리아는 이제 그 긴 세월의 증오를 모두 품고 있었다. 카를로스 에덴버와 에를니아를 향한, 절대 희석되지 않을 그런 증오를.
그러니 에를니아라고 할지라도 더 이상은 베를리아를 어찌하지 못했다.
안젤라가 안타까움을 담아 베를리아를 바라봤다. 그녀가 말하는 강력한 감정, 그것이 무엇인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으니… 부탁해요, 앤지.”
그 시선과 마주하며 베를리아가 애써 웃었다. 안젤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당부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조심해요, 베릴.”
끝까지 상냥한 것이 딱 안젤라다웠다. 그래서 베를리아는 작게나마 웃어버렸다.
“앤지도요.”
***
“어디를 다녀오는 거지?”
성지를 떠나기 위해 짐을 꾸린 후 기다리던 카를로스가 날카롭게 물었다.
그는 제 입으로 베를리아에게 자신의 황후가 되라고 한 주제에 여전히 그녀에 대한 의심을 풀지 못하고 있었다.
그게 딱 카를로스 에덴버다웠다.
“네가 알아서 뭐하게.”
그래서 베를리아도 자신답게 답했을 뿐이었다. 카를로스의 미간이 곧바로 찌푸려졌다.
“내 황태자비가 어디에 갔는지 내가 묻지도 못하나?”
“착각하지 마, 카를로스 에덴버.”
그 말에 베를리아가 곧바로 멈춰 섰다. 말의 형상을 볼 수 있었다면 분명 그녀의 어조에 칼날이 비죽비죽 솟아난 것을 확인할 수 있었을 터였다.
“네가 그딴 식으로 굴겠다면, 난 지금 당장 그 자리 따위 때려치워 버려도 그만이야.”
많은 이들이 바라는 황태자비 자리였다. 그것을 두고 아주 쉬이 말하는 베를리아에 카를로스가 더욱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권력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나?”
“네가 황제도 아닌데, 지금의 네가 줄 권력 따위 내가 얻고자 한다면 쟁취하지 못할 것 같아? 심지어 지금은 성녀에게 쫓겨나 성지를 떠나는 중이면서?”
“그건…!”
카를로스가 발끈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뒤를 이을 말이 있을 턱이 없었다. 안젤라의 명령으로 인해 강제로 수도에 돌아가게 된 것은 지극히 사실이었으니까.
베를리아가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올린 채로 말을 덧붙였다.
“네 권력으로 나를 홀리거나, 나를 좌지우지하고 싶다면… 최소한 그에 걸맞은 절대적인 권력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