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교만의 끝(5)
베를리아의 시선이 저절로 뒤편으로 향했다. 분명 리리카가 메리쉬를 되살려주겠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그는 메리쉬와 함께 있어야만 했다.
“멜은?”
베를리아가 반사적으로 물었다. 그랬는데, 메리쉬가 보이질 않았다. 그녀가 분주하게 자꾸만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나 어디에도 메리쉬는 없었다.
“리리, 리리카. 멜은? 멜은 어디 있어? 네가 분명히 데려와 준다고 그랬잖아. 그런데 어디에….”
베를리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가 침대 위에서 벌떡 일어났다. 미친 사람처럼 방 안을 이리저리 헤집었다. 정돈되어 있던 곳이 엉망으로 변하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쨍그랑.
유리로 된 장식품이 떨어져 산산이 조각났다. 그것이 바닥에 즐비하게 깔려 있는데도 베를리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메리쉬가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것. 그것 하나만을 믿고 기다렸다. 그러니까 그는 반드시 제게 돌아와야만 했다.
깨진 유리 조각이 즐비한 곳을 헤집고 다니니 그것을 기어코 밟게 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자잘한 유리 조각이 박혀 들어 발바닥이 피로 물들었다. 베를리아가 걸을 때마다 자박거리는 소리와 붉은 발자국이 뒤를 따랐다.
“베릴…! 그만!”
결국 그녀의 행동을 보다 못한 리리카가 베를리아의 허리에 제 팔을 둘러 그녀를 막아 세웠다. 베를리아가 자신도 모르게 이성을 잃은 채로 소리쳤다.
“이거 놔…! 돌려준다며, 다시 살려준다며…!!!”
피를 토할 듯한 절규가 쩌렁쩌렁하게 방 안을 울렸다.
리리카가 잘못한 일이 아니란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죄 없는 곳에 화를 내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저 견딜 수가 없을 뿐이었다.
“…죽일 거야. 죽여 버릴 거야. 카를로스 에덴버 따위-”
베를리아가 음산하게 읊조렸다. 카를로스를 두고 봤던 이유는 오직 메리쉬가 돌아올 자리를 남겨두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가 돌아올 수 없다면 굳이 자신이 이곳에서 버티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베를리아의 얼굴 위로 붉은 낙인이 떠올랐다. 카를로스가 나누어 가져갔던 저주가 어떤 식으로 돌아오든지 상관없었다. 제 목숨보다도 메리쉬의 생을 앗아간 대가를 돌려주고 싶었다.
“…저예요, 베릴!”
그때 리리카가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그가 베를리아의 몸을 돌려 자신과 마주하게 만들었다.
“제가, 메리쉬예요. 베릴.”
그가 고개를 숙인 채로 말했다. 차마 베를리아와 시선을 마주할 수 없다는 듯이.
“리리카, 그자가… 제게 몸을 내어주고 대신 죽었어요.”
“뭐…?”
베를리아가 눈을 깜빡깜빡 했다. 자신이 대체 방금 무슨 소리를 들은 것인지 인식이 되지 않았다.
분명 베를리아의 앞에 있는 사람은 리리카였다. 그런데 그가 지금 자신을 두고 메리쉬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리리, 그런다고 내가 속을….”
“베릴.”
메리쉬가 베를리아의 손을 잡아 끌어당겼다. 그가 그녀의 손에 제 얼굴을 묻으며 고통스러운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리리카가, 나 대신 죽은 거예요.”
“…말도 안 돼. 그런 게, 어떻게 가능해, 그런 게…?”
베를리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말을 꺼냈다. 이미 네 번의 삶을 살고 있는 그녀였으나 이런 경우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이런 일이 가능했다면… 왜, 왜 하필 리리카여야 하는가.
믿을 수 없었다. 이건 무언가 잘못되어 있었다.
“그자의 말이 옳다. 육신은 리리카의 것이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영혼은 메리쉬 리아세이니까.”
그러나 베를리아의 부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성검으로부터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성검 속 신의 영혼 중 하나인 미누엘라였다.
“…우리는 말렸으나 그 아이가 이렇게 하기를 바랐다.”
“리리카, 그 아이는… 어쩌면 운명을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안 순간부터 이 일을 준비해왔다.”
연이어 엔테아와 르누미아가 입을 열었다. 그들의 음성은 충분히 참담하게 들렸으나,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음을 증명하듯이 담담하게 흘러나왔다.
“운명의 수레바퀴가 정해놓은 결과에 의해 베를리아, 너나 메리쉬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어야만 했다.”
“이미 지나왔기에 정해져 버린 운명을 바꾸기는 어려워도 아직 가보지 않은 미래는 바꿀 수 있는 법이지.”
디히스트와 리드로턴이 설명을 늘어놓았다. 그 목소리가 베를리아에게는 참으로 무심하게만 느껴졌다.
“그럼… 그러면… 리리카는요? 리리는 대체, 어떻게, 아니, 어디에…? 왜, 왜 하필 꼭… 리리카가… 왜….”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조차 제대로 판단할 수 없었다. 베를리아가 할 수 있는 것은 두서도 없이 더듬더듬 말을 내뱉는 것뿐이었다.
“메리쉬의 육신은 이미 죽음의 신에게 닿았기에 소생시킬 수는 없었다.”
“거기서 끊어져야 했을 운명을 잇기 위해서는, 누군가 그에 합당한 운명을 내어놓아야만 했지.”
“메리쉬의 영혼이 윤회의 굴레에 들어가기 전에 때를 맞추려면… 누군가의 희생은 필수 불가결했다.”
미누엘라와 르누미아, 리드로턴이 다시 입을 열었다. 베를리아가 되돌아올 수 있었던 모든 이유 또한 그런 것이었다. 그녀의 영혼이 윤회의 굴레에 빠지기도 전에 그녀를 구하고자 했던 이들이 망설임 없이 자신을 희생한 덕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의 운명을 강제로 빼앗는 것보다 자발적으로 운명을 내어놓는 것이 훨씬 빨랐다.
리리카는 메리쉬를 살리기 위한 가장 최적의 방법을 택한 것이다. 스스로를 희생시켜서.
베를리아는 그대로 말을 잃어버렸다. 툭, 툭. 그녀의 뺨을 타고 소리 없는 물방울이 떨어졌다.
‘나 믿어줄 수 있죠?’
리리카의 그 말은 이런 의미였다. 설령 자신은 돌아오지 못 할지라도… 메리쉬만은 베를리아의 곁으로 돌려 보내주겠다는.
‘내가 메리쉬를 되살아나게 할 수 있어요.’
그러면 너는? 베를리아는 이미 부질없어져 버린 의문을 떠올렸다.
그 말을 할 때 리리카의 표정이 얼마나 평온했던지,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네가 죽을 길로 스스로 걸어 들어갈 거면서 어떻게 그런 얼굴로 나를 볼 수 있었던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네가 이렇게까지 할 가치를 지닌 사람이던가…? 베를리아의 안에서 의심과 의문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그거 알아요, 베릴? 오직 당신만이 나를 구했어요.’
베를리아의 두 번째 삶에서 리리카가 했던 말이었다.
그녀의 뺨을 타고 끊임없이 눈물이 흘렀다. 베를리아는 이제야 그 말의 무게를 깨달았다.
“…그러지 말걸.”
베를리아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두 번째 삶에서 리리카를 구한 것은 순전히 그녀의 변덕이었다. 그를 구한 후에 평소처럼 그냥 지나치지 않고 굳이 거두어주고 보살펴주었던 것 또한 한순간의 쉬운 선택이었다.
리리카를 계속 곁에 두었던 것조차도 다를 바 없었다. 그저 모두가 자신을 미워하는 가운데에서 자신을 애정하는 누군가가 한 명이라도 더 제 옆에 있어주었으면 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결국 처음부터 꼭 리리카가 아니었어도 되었던 셈이었다.
“이런 내가 뭐라고, 이런 선택을 해…. 왜, 날 위해서, 이렇게까지….”
베를리아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순간순간의 선택들은 많은 것을 바꾼다. 그녀는 그 사실에 대하여 신중하지 않았고 교만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는 그럴 능력이 있었으니까. 그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부유한 자가 거지에게 동전을 던져 주는 것과 제 행동이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베를리아는 자신이 하는 행동의 무게가 타인의 삶을 어찌 바꿔버릴지 전혀 생각지도 않았다.
대개 굶주리고 가엾은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겨우 물 한 모금, 빵 한 조각, 애정 한 줌이었다. 해줄 수 있는데도 외면할 이유가 없었다. 이 얼마나 가볍고 오만하기 그지없는 행동이었던가.
“차라리, 차라리 나보고 죽으라고 하지, 차라리….”
베를리아가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차라리 제게 죽으라고 했다면 기꺼이 메리쉬를 대신하여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리리카는 그러지 않았다. 그 이유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베를리아가 행복하기를 바랐으니까.
“혹시… 처음, 내게 다시 기회를 주기로 했을 때부터… 이렇게, 결심했던가요?”
차마 리리카의 이름은 입에 담지도 못한 채로, 베를리아가 성검에게 물었다. 그리고 그들은 침묵했다.
그 침묵이 답을 대신하는 셈이었다.
“아, 아… 아아, 리리카….”
숨이 턱 막혔다.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았다. 그런데도 모른 척했다.
그렇지만 당신이 나를 이토록 사랑하는 줄 알았더라면… 나는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베를리아가 자신의 가슴을 퍽퍽 내리쳤다. 숨이 너무 막혀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베를리아의 두 번째 삶에서, 리리카는 언제나 그녀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랬으니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베를리아가 모를 리 없었다.
교황인 아비에게 버려지고 권세에 눈이 먼 자들이 어린아이조차 죽이려드는 상황에서 겨우 살아남은 것이 리리카였다. 어떻게든 제 치부인 친아들을 밟으려 드는 아비의 손속에서 아득바득 기어올라 교황이 된 사람이었다.
그 모든 미래를 포기하고 시간을 되돌린 대가가 이것이었다.
죽음.
그 사실이 너무나 참혹해서… 제 스스로가 증오스러웠다. 제가 미웠다. 베를리아는 자신을 견딜 수가 없었다.
“리리카… 리리카….”
눈앞에 그토록 되찾고 싶었던 연인이 있는데도, 베를리아는 메리쉬를 볼 수가 없었다. 죄스러워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살아 있음에 한 편으로 마음이 술렁였던 스스로가 너무나 끔찍해서.
“베릴, 그만…!”
자학하는 베를리아의 손길이 점차 거세지자 메리쉬가 그녀의 두 손을 잡아챘다. 탁, 그녀가 그것을 뿌리쳤다.
“내가 죽었어야 했어, 내가….”
베를리아에게는 무려 세 번의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도 결국 여기까지 왔다.
첫 번째 삶에서는 메리쉬의 희생으로, 두 번째 삶에서는 리리카의 희생으로, 그리고 이제는… 리리카의 죽음까지도 기어코 그 대가로 바쳐서.
베를리아는 후회했다. 지독히도 후회스러웠다. 그녀가 돌아오지 않았어야 했다. 누구나 그렇듯이 죽음 앞에 순응했어야만 했다.
그랬다면 제 교만을 대신하여 리리카가 이런 식으로 죽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런 베를리아를 끌어안는 메리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 말을 하면 당신이 더 고통스러울 것을 알았으나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살아요, 베릴.”
말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베를리아가 죽어버릴 것 같았으니까.
“리리카가… 마지막까지도, 당신에게 행복하라고 했으니까.”
메리쉬가 베를리아의 손에 작은 쪽지 하나를 쥐여 주었다. 그곳에는 리리카의 필체로 단 한마디만이 적혀 있었다.
『부디 이번에는 아주 오래도록 행복하시기를, 베릴.』
제 사랑도, 대신하여 죽은 제 자신에 대한 이야기도 아닌… 오직, 베를리아만을 위한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