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깽판치는악녀님 (113)화 (113/148)

113화. 교만의 끝(4)


 

“…내 황후가 되겠다고?”

카를로스가 반문했다. 그도 바보는 아니었으니 이 시점에서 베를리아가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충분히 이상하다는 점은 알고 있었다. 카를로스의 표정에 의심이 가득했다.

“네가 좋아서 되겠다는 게 아니야.”

그러므로 베를리아는 구태여 제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애초에 이 격렬한 증오는 희석해 드러낼 수는 있어도, 없애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으므로.

“황후의 자리가 필요하다는 거지.”

“…네가 황후의 자리에 언제부터 관심이 있었다고?”

카를로스의 의문은 타당했다. 베를리아는 첫 번째 삶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권력을 좇은 적이 없었으니까.

베를리아가 원했던 것은 언제나 단 하나뿐이었다. 행복. 권력조차도 그곳에 이르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권력뿐 아니라 돈, 사람, 관계 그 모든 것이 그러했다.

베를리아는 행복하고 싶었다. 정말로.

“내가 네 근처에만 있으면 되는 거잖아, 안 그래?”

베를리아가 입매를 비틀며 말했다. 어차피 카를로스는 그녀를 내칠 수 없었다. 그의 신인 에를니아가 베를리아를 원하는 한 그건 정해진 일이었다.

그러니 베를리아는 조급해할 필요가 없었다. 이 수가 실패하더라도 그녀에게는 다음 기회가 있었다.

에를니아와 카를로스가 자신을 매어두려 하는 한 이 질긴 악연의 고리는 끊기지 않을 터였다. 자신도, 카를로스도 각자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면… 그 곁에서 직접 지옥을 선사해주면 되지 않은가.

“나는 네가 미워, 카를로스 에덴버. 날 버릴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나를 찾겠다는 네가 끔찍이도 미워.”

피 끓는 증오를 미움으로 둔갑시키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베를리아에게는 카를로스 에덴버를 미워할 만한 이유가 아주 차고 넘쳐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했으니까 미워한다, 정도로 착각하게 만들면 그만이었다.

사실은 네가 나를 버린 것 정도로 나는 너를 미워하지 않았다. 사실은 네가 나를 버렸어도 나는 너를 사랑했다. 사실은 네가 나를 어찌하든 행복하길 바라던 적이 있었다.

그 모든 나를 깨부순 것은 기어코 너였다.

그러니 너는 감히 내게 속는 사실을 훗날에조차 분해하지 말라.

“그런데 굳이 네 옆에 있으라니… 황후의 권력이라도 있어야 수지가 맞지 않겠어?”

베를리아의 시선이 똑바로 카를로스에게 향해 있었다. 그녀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가 다시 입을 열고 말을 덧붙였다.

“그래야 네가 또 날 버릴 생각 따위 못하지.”

마치- 여전히 카를로스에게 버림받는 것이 대단히 아프기라도 한 것처럼.

메리쉬가 사라지면 제게 돌아오리라 착각하던 카를로스의 오만. 베를리아는 그것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이 수에 넘어오든 말든 상관은 없었으나 베를리아는 확신했다. 카를로스 에덴버가 끝없는 오만 속에 섞여 있을 일말의 기대를 버리지 않으리라고.

카를로스가 한참의 침묵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돌아가면 황태자비 간택의 결말을 짓도록 하겠어. 내 황태자비는 네가 될 거야.”

베를리아의 입꼬리가 비웃음을 담고 올라갔다.

나의 교만이 나의 사랑을 죽였다. 나는 이제 그것을 알았다.

그러니 너의 교만이 너를 죽이리라.

***

“모시러 왔습니다.”

베를리아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카를로스의 기사들이 찾아왔다. 전에는 없던 더없이 정중한 태도였다.

그러나 베를리아는 카를로스가 기사들을 보낸 이유가 그들의 말 그대로일 것이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비약이라기보다는 그녀가 그를 지나치게 잘 아는 탓이었다.

“왜, 나를 감시하라던가?”

베를리아의 어조에 노골적인 빈정거림이 드러났다. 카를로스는 100% 그녀를 믿지 않는다. 그건 그가 품은 오만이나 미약한 기대와는 별개의 일이었다. 카를로스는 애초에 신뢰라는 것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으니까.

아마도 카를로스는 지금 열심히 생각 중일 터였다. 베를리아에게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그녀의 말이 어디까지 진심인지에 관하여.

그러니 기사들을 보낸 것이다. 에덴버에 돌아가기 전까지 베를리아가 무슨 수작이라도 부릴까 봐.

“착각하나 본데.”

베를리아가 기사들에게로 다가갔다. 그와 동시에 그들의 몸이 아래로 짓눌렸다.

“윽…!”

단말마와 비명과 함께 강건한 기사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무릎을 꿇었다. 베를리아가 그들을 내려다보며 조곤조곤 오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베를리아 리들턴이다.”

베를리아 리들턴. 그 이름은 다른 이의 증명이 필요 없는 것이었다. 그녀가 모든 삶에 걸쳐 그렇게 만들었으므로.

“나를 모신다는 핑계를 대려거든… 너희들이 나를 지킬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베를리아의 주변을 거센 바람이 휘감았다. 모두가 그녀를 두려운 눈으로 보고 있었다. 베를리아는 연출적인 장면이 인간을 얼마나 좌지우지할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정치든 사교계든 현실이든 결국 누가 가장 완벽한 연출을 해냈느냐가 사람들을 휘어잡을 힘을 정하는 것이었으므로.

꿀꺽- 누군가 침을 삼키는 소리만이 고요한 공간에 유독 크게 들렸다. 베를리아가 선언했다.

“나를 감시하려거든, 너희가 적어도 나보다 약하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해야만 할 거야.”

무형의 기운이 기사들을 단체로 밀어냈다.

쾅. 방문이 그와 함께 닫혔다.

***

붉은 낙인이 베를리아의 얼굴 위로 불타올랐다. 이제 저주는 시도 때도 없이 그녀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네멘 리들턴은 자신의 몸을 개조하여 에르젠타샤의 힘을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가 쓴 힘이 신의 것이었기 때문에 베를리아의 영혼에는 그대로 상흔이 남아버렸다.

에르젠타샤가 베를리아를 다른 세계로 피신시켜 회복하게 했으나, 두 번의 삶 동안 고통받았던 영혼을 전부 낫게 하기란 무리였다. 그 후유증이 이제야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지나간 시간들의 기억이 자꾸만 나타났다.

‘네 그림자를 죽여.’

메리쉬라는 이름조차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던 카를로스 에덴버가 처음 내렸던 명령. 그것이 베를리아를 처형하게 된 첫 계기가 되었다.

‘…그럴 순 없어. 평생 나만 믿고 살아온 내 사람이야.’

베를리아가 세 번째 삶에서 메리쉬를 죽이라는 그 말에 본능적인 거부감을 가졌던 이유였다. 명확히 그것을 거절했기 때문에 그녀는 첫 번째 삶에서 죽었으니까.

카를로스를 적대하길 거부하던 목소리도, 그에게 호의적이던 목소리도, 카를로스를 맹렬히 미워하던 자아도 모두 그녀였던 셈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그리고 네 번째의 베를리아 리들턴.

그리고 에를니아가 한 일이라고는 현대에서의 베를리아나, 네 번째의 그녀가 아닌 첫 번째의 베를리아 리들턴을 불러온 것뿐이었다. 카를로스 에덴버를 지독히도 사랑하던, 그래서 죽음까지도 기꺼이 감수하던 베를리아 리들턴.

‘카를로스 에덴버를 사랑해야 해.’

그 목소리조차 모두 에를니아의 농간이었다.

‘제발 그만.’

그 안에서 처절하게 외치던, 진실을 아는 베를리아의 자아들은 모두 신의 힘에 의해 묻혀버린 채로.

‘널 증오해, 네가 끔찍이도 싫어, 카를로스 에덴버.’

네가 미웠다. 네가… 네가 불행하길 바랐다. 그 모든 것이 베를리아였다.

‘모두 네 잘못이야.’

그 말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첫 번째 삶의 베를리아는 알지 못했다. 카를로스는 매번 베를리아를 책했다. 귀족들이 그녀를 비난할 때도, 귀족들이 그녀를 골리려 수작을 부린 것에 대하여 더욱 강한 방식으로 돌려줬을 때도, 안젤라가 자신을 동정한 것에 대하여 그녀의 방식대로 불쾌함을 드러냈을 때도.

‘너는 왜 매번 이런 식인 거야?’

베를리아는 다르게 반응하는 법을 몰랐다. 그녀의 삶은 늘 찍어누르고 당한 만큼의 배로 돌려주는 것의 연속이었다.

카를로스 에덴버는 매번 그런 베를리아를 비난했다. 비난. 딱 그것뿐이었다.

누구라도 그게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줄 사람이 있었더라면 베를리아의 삶은 달라질 수 있었을까?

자신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조금은 나아졌으리라.

어쨌든 베를리아는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자신이 유일하게, 평생에 걸쳐 사랑해온 남자가 오직 그녀만을 비난했으니까.

베를리아가 해온 악행에 대해 모두 변명이라고 한다면 굳이 할 말은 없었다.

그러나 명확한 것은 카를로스 에덴버만은 절대 결백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꿈에 끝에 다다랐을 때, 베를리아는 어쩌면 자신이 이미 예상했던 사람을 만났다.

‘베릴.’

길게 이어지던 악몽은 순식간에 절대로 깨기 싫은 꿈으로 탈바꿈되었다.

이게 마지막이라면 눈물에 젖은 못난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베를리아는 우는 듯 일그러진 얼굴로 상대를 보고 웃었다.

‘멜.’

메리쉬가 베를리아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미소 짓고 있었다. 메리쉬가 그녀를 볼 때면 늘 그랬듯이.

메리쉬는 베를리아에게 사랑을 배웠다고 말했으나 실은 그 반대였다. 그녀가 본 것 중에 가장 찬란한 것이 그의 사랑이었으니.

‘사랑해요, 베릴.’

메리쉬가 그 말을 함과 동시에 베를리아의 뺨으로 눈물이 쏟아졌다. 그냥 직감적으로 느꼈다. 이것으로써 자신은 꿈에서 깨어나 네가 없는 현실에 던져지리라는 것을.

“베릴, 울지 말아요.”

메리쉬가 달래듯이 속삭였다. 베를리아가 그의 팔을 붙들었다. 그녀의 팔이 가지 말라는 듯 메리쉬를 끌어당기고 그에게 엉겨들었다.

나를 살리기 위하여 스스로의 심장에 칼을 박아넣던 너의 모습이 생생하다. 지독한 악몽의 순간은, 영원토록 끝나지 않을 것처럼 선명하기 그지없다.

“멜… 멜….”

모든 것을 주기 두려워서 적당한 사랑만을 하느라, 네가 더 나를 사랑하는지 재느라, 내가 이전의 베를리아가 아님을 알아차릴까 봐 조심하느라 네게 너무 많은 사랑을 아꼈다.

“미안해, 내가… 네가 아니라, 내가 살아서….”

베를리아가 메리쉬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으며 눈물을 가렸다. 언제부터 이렇게 울음이 많아졌던가. 이리 나약해져서 너를 잃은 것일까- 또 다시 슬픔과 자괴감이 몰려들었다.

“베릴, 날 봐요.”

제 등을 어루만지는 손의 온기가 따스했다. 마치 진짜처럼.

“베릴.”

메리쉬가 자신을 채근하는 소리에 결국 베를리아가 고개를 들어 메리쉬를 봤다. 눈물로 젖은 탓인지, 꿈속에서조차 몽롱하게 느껴지는 정신 탓인지 시야가 흐릿했다.

그리고 베를리아의 두 눈에 들어온 사람은….

“…리리?”

메리쉬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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