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교만의 끝(3)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에를니아가 어째서 에덴버의 핏줄을 택해 제국의 황제로 세웠는가를 생각한다면.
그 에를니아가 에덴버에게 과연 대가 없이 그런 자리를 주었을까? 신녀들을 모두 죽이려고 할 때 에를니아의 칼이 된 것은 누구일까?
아마 베를리아가 아니었어도 진실을 안다면, 많은 이가 유추할 수 있을 만한 뻔한 정답이 눈앞에 있었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카를로스가 발끈하여 소리쳤다. 그 순간 베를리아의 입꼬리가 길게 올라갔다.
‘난 에를니아가 정확히 무슨 짓을 했다고 말한 적이 없는데.’
카를로스의 표정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 순간 목소리가 들려왔다.
‘악마와 계약하여 세상을 어지럽히니… 마녀를 단죄하라, 나의 아들아.’
에를니아였다.
***
기나긴 기억 속에서 마지막이 어땠는지 명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은 완벽히 에를니아의 계획을 어그러트려 놓았고, 카를로스는 자신을 잡아 단두대에 올렸다.
그리고… 리리카에 의해 두 번째 기회가 주어졌다.
‘나의 아이야, 너를 끝없이 부르는 이가 있구나. 되돌아가겠느냐?’
에르젠타샤께서 말씀하시길, 리리카가 성검에 봉인된 다른 신들에게 대가를 바치고 자신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었다고 했다. 그러나 베를리아는 지쳐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마지막으로 단 한 가지를 확인했다.
‘제가 돌아가면, 이번에는 이 모든 사실을 기억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장담할 수 없다. 시간을 되돌아간다고 해도 모든 것이 그 당시와 똑같을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이번 시간대에서 확고해진 인간들의 신앙심으로 인해 늘어난 에를니아의 영향력은 과거로 간다 해도 그대로일 것이다.’
그렇지만 에르젠타샤의 대답은 절망적이었다. 베를리아는 높은 확률로 다시 기억을 잃을 거라는 의미였다.
‘저는 이제 그만… 쉬고 싶습니다.’
그럴 거라면 베를리아는 이제 제발 그만하고 싶었다. 제가 얼마나 카를로스 에덴버를 사랑했던가는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그토록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이토록 증오하지도 못했을 테니까.
그러니 기억도 없이 돌아갔을 때 또다시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그렇다면 네 원대로 해 주마. 원하다면, 언제든 돌아와도 좋다.’
에르젠타샤는 베를리아에게 봉인된 자신과 다른 신들을 구원하라 하지 않았다. 신은 그녀를 현대 세계로 보내 주었다. 이 세계의 누구와도 엮이지 않고, 새로운 평온을 얻을 수 있는 그곳으로.
***
베를리아는 멍한 정신으로 눈을 깜박깜박했다.
“…깨어났어요, 베를리아 양?”
베를리아가 깨어난 것을 알아차린 리리카가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녀가 시선을 리리카에게로 옮겼다.
에르젠타샤께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도록 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를리아는 현대 세계에 완벽히 속하지도 못한 채 이 세계를 그리워했다. 아니, 정확히는 그녀가 사랑하던 것들을 너무나도.
그래서 돌아오게 된 것이다. 베를리아가 원했으니까.
“…리리.”
베를리아가 확인하듯이 리리카의 애칭을 입에 담았다. 그러자 그의 표정이 마침내 무너졌다.
늘 광대 같던 그 웃음의 부서진 흔적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아, 현실이구나.’
베를리아가 멍하니 생각했다. 그리고 곧… 그녀의 눈에 절망이 차올랐다.
“리리, 내가 네가 준 기회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어. 내가….”
메리쉬가 죽었다. 자신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이번에는 카를로스 에덴버를 사랑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런데도 실패했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울 수조차 없었다. 베를리아에게는 번번이 카를로스 에덴버를 죽일 기회가 있었다. 이 세계로 돌아왔을 때, 므시아를 재건했을 때, 카를로스를 마주했을 때, 아무것도 모르고 행복을 누리던 때 모두!
그런데 그 모든 기회를 놓쳐 버렸다.
왜냐하면 그녀에게 이 세상은 그저 책 속의 이야기였으니까, 카를로스 에덴버는 언제든 그녀가 처리할 수 있는 쉬운 상대였으니까, 복수보다 행복을 누리고 싶었으니까.
교만이었다.
베를리아는 카를로스의 검이 메리쉬를 꿰뚫던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 일만 아니었더라면 상처가 썩어가는 고통 속에서 메리쉬가 죽어가는 일도 없었을 터였다.
카를로스 에덴버만 아니었더라면- 그만 없었더라면, 에를니아도 수작을 부리고 싶어도 부리지 못했을 것이었다.
베를리아는 자신에게 무수한 기회가 있었으나 어리석은 제가 그 모든 순간들을 날려 버렸음을 이제야 알아차렸다.
그러니 교만이었다.
나의 교만은 기어코 내가 아닌 너를 찔렀다.
그래서 베를리아는 죽을 것 같았다. 자신이 아니라 메리쉬가 죽었다는 사실이, 자신을 대신해서 메리쉬가 죽었다는 사실이.
“베릴, 당신 탓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리리카가 일그러진 표정을 감추지도 못한 채 말을 이었다. 이미 처음 정해진 운명을 바꾸기란 아주 힘든 일이었다. 첫 번째 삶에서 베를리아가 죽던 순간, 메리쉬가 리들턴의 이름을 이어받던 순간… 운명이 정한 리들턴은 단 하나뿐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이건 베를리아의 잘못이 아니었다. 절대적인 힘이 벌인 농간에 피해 입은 이를 어찌 탓할 수 있단 말인가.
“미안해, 내가… 내가….”
그러나 베를리아의 귀에는 리리카의 말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에게는 죄스럽게도, 그녀는 자신이 눈을 뜨고 마주하는 사람이 메리쉬가 아니라는 사실에 절망했다.
메리쉬는 죽었고 그리하여 자신은 평생 그를 다시 마주할 수 없을 테니까.
네가 없는 까만 밤이 끝나지를 않는다. 그런데 나는 아침 오기를 기다리는 시간조차 버겁다.
베를리아는 차라리 이대로 다시 눈을 감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도 없었다.
자신은 살아남았고… 카를로스 에덴버도 살아 있었으니까.
제게는 죽을 자격조차 없었다.
“나를 봐요, 베릴.”
그때 리리카가 단호한 목소리로 베를리아를 불렀다. 그의 표정은 어느덧 평온해져 있었다.
마치 모든 것을 맏아들인 사람처럼.
“내가 메리쉬를 되살아나게 할 수 있어요.”
“내가 뭘 하면 돼?”
순간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제대로 판단할 겨를도 없었다. 그냥, 그냥… 본능적으로 말이 튀어 나갔다.
어떻게 다시 살릴 수 있는지, 그렇다면 왜 메리쉬를 죽게 두었는지 그런 건 단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메리쉬가 제 곁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데- 그 외에 무엇이 중요하단 말인가.
“지금부터 고대 신전에 갈 거예요. 그러니까 베릴은 기다려 줘요.”
베를리아의 눈에 빛이 돌아오자 그제야 리리카가 웃었다.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다.
“나 믿어 줄 수 있죠?”
리리카가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물었다. 베를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 삶에서도, 무려 네 번째가 되어 버린 이 삶에서도- 리리카는 단 한 번도 베를리아를 배신한 적이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 그럴게.”
베를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믿어야만 했다. 그리고 믿는 수밖에 없었다.
***
그 후 리리카는 메리쉬의 시신을 데리고 고대 신전으로 향했다. 베를리아는 초조하게 방 안을 서성였다. 아직도 마음은 불안하게 두근거렸다.
리리카가 자신을 믿으라고 했으나 그에 관한 믿음과는 별개로,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 경우는 지금까지 역사 속에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처럼 아예 시간을 거스른 경우를 제외한다면.
‘그렇지만 나처럼 회귀를 시킬 생각은 아닌 거 같았는데.’
만약 그랬더라면 리리카는 굳이 베를리아에게 고대 신전에 다녀오겠다고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 시간을 되돌릴 때 돌아간 그 시점 이후의 일을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시간을 돌린 당사자, 즉 ‘시간축’에 있던 사람뿐이었다.
그렇기에 베를리아가 회귀했을 때, 에를니아가 그녀의 기억에 손대기도 쉬웠던 것이다. 인과율에 따라 베를리아의 기억은 원래부터 지워졌어야 했을 것이었으므로.
그런데 굳이 베를리아에게 말을 꺼냈다. 즉 리리카는 메리쉬를 회귀시키는 대신 다른 방법을 사용할 가능성이 훨씬 크다는 소리였다.
‘리리카를… 믿자.’
베를리아가 애써 자신을 다독였다. 그녀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로 했다. 이대로 가만히 두 손 놓고 있어서는 안 됐다.
에를니아는 베를리아를 자신의 신녀로 만들기를 원했고, 카를로스는 베를리아를 어떻게든 제 옆에 매어 두려고 했다. 그 둘은 메리쉬가 살아 돌아온다고 해도 분명 위협이 될 터였다.
그러니 그때를 대비해서라도 베를리아는 절망에 빠져 있기보다 대비책을 세워야만 했다. 두 번 다시 자신과 메리쉬의 안위를 위협하는 일 따위 하지 못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베를리아가 통신 아티팩트를 켰다. 신호가 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상대방이 공중에 띄워진 화면 속에 나타났다.
“지금 당장 나와.”
일방적인 선고였다. 그러나 베를리아는 확신했다. 상대가 나오리라고.
***
“…한동안 절대 나를 보지 않으려고 할 줄 알았는데.”
역시나 베를리아의 예상대로 카를로스는 그녀가 부른 장소에 나와 있었다. 제 발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미심쩍다는 얼굴로 베를리아를 보고 있었다.
“메리쉬가 죽었어.”
베를리아의 말에 카를로스가 흠칫했다. 그는 그제야 그녀의 상태가 썩 좋지 않음을 알아차렸다. 핏발 선 두 눈이며, 검게 물든 눈 밑, 창백한 안색과 평소의 베를리아가 입는 옷과는 전혀 다른 수수한 차림. 그 모든 것이 그녀가 얼마나 위태로운 상태인지를 증명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자- 카를로스의 두 눈에는 희열이 떠올랐다.
메리쉬 리아세가 죽었다.
그는 오로지 그 사실 하나가 대단히도 흡족했다.
‘역겨워.’
카를로스의 만면에 가득 찬 희열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자 속이 뒤집힐 거 같았다. 베를리아는 입매가 비틀리는 것을 참지 않았다.
“내게 황후 자리를 준다고 했지.”
베를리아는 적개심을 굳이 지우지 않은 채로 말을 이었다.
“좋아, 받아들이겠어.”
네 놈이 나를 매어 두면, 나를 이전으로 돌릴 수 있으리라 믿고 있다면… 나는 그 착각을 얼마든지 이용해 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