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교만의 끝(1)
메리쉬의 눈이 감겼다. 그의 신형이 무너져 내렸다. 모든 것이 그곳에서 무너졌다.
“멜, 안 돼, 멜….”
베를리아가 쓰러진 메리쉬를 끌어안았다. 피가 멈추지를 않았다. 그녀의 세상이 멈춰 버린 것과는 다르게.
시간이 매우 더디게, 혹은 끔찍이 빠르게 흘러갔다. 메리쉬가 죽어가는 순간순간이 아주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고, 그것을 막으려는 자신의 발버둥은 아무 의미 없이 흘러갔다.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이제는 에르젠타샤의 힘도 소용없다는 것을.
“당신이 그간…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내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멜, 그만 말해, 제발, 멜….”
베를리아도 알았다. 그에게 빌어도 소용없었다. 메리쉬의 얼굴 위로 죽음이 드리웠다. 울컥울컥, 그의 속에서 토해지는 붉은 피가 자꾸만 메리쉬의 말을 막았다.
“그 전의 당신도, 그 후의 당신도… 내게는… 모두, 베릴이었어요.”
심장에서 흐른 피가 메리쉬가 쓰러진 침대의 하얀 시트를 모두 적셨다. 온통 붉었다. 주변도, 메리쉬도, 자신도.
온통 절망뿐이었다.
그녀는 정말로 베를리아 리들턴이었다. 그리고 그녀도 몰랐던 사실을 오직 메리쉬만이 바로 알아보았다.
그래서 메리쉬는 단 한 번도 베를리아가 여전히 자신의 세상임을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랑조차도 너무나 당연하게.
“내 구원이자 사랑인 베를리아 리들턴.”
메리쉬가 웃었다. 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몸이 식어가고 있었다. 눈꺼풀이 죽음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자꾸만 내려왔다.
“왜 그런 말을 해.”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는 베를리아의 목소리가 확연하게 떨려 왔다. 메리쉬는 알았다. 이게 두 사람의 마지막이란 걸.
죽음을 거스르는 건 신들에게조차 허용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너무나 많은 신의 권한을 침범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한 생명의 죽음에는 탄생과 죽음, 운명 그 모든 것이 얽혀 있었다.
베를리아가 이전에 데니안의 심장을 찌르고도 살아나게 했던 것은 그 찰나 신을 속인 편법에 불과했다. 데니안 론델은 애초에 죽을 운명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메리쉬는 달랐다. 그의 생은 시간에 걸쳐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건 베를리아도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이었다.
“심술을, 부려서… 미안, 쿨럭…했어요…. 당신이, 불안할수록, 내게… 윽, 내게… 매달리는 게, 좋아서, 욕심을… 부렸는데.”
참고 있던 신음이 끝내 메리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가 손을 들어 올렸으나, 죽음은 그가 베를리아에게 닿지 못하도록 그를 내리눌렀다. 그녀가 그런 메리쉬의 손을 다급하게 제 손으로 맞잡았다.
메리쉬가 미안함을 담아 웃었다. 욕심을 부렸다. 갑자기 변해 버린 당신이 언제 다시 카를로스 에덴버에게 돌아갈지 몰라서, 그게 무서워서.
그래서 당신이 내게 의지할수록 그것을 놓지 못하고 그 불안함을 방관했다. 베릴, 당신은 불안해할 필요가 없는데.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당신이었음을 알고 있었는데.
많은 것을 말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은, 죽음은 그것을 메리쉬에게 허용해 주지 않았다.
“사랑해요, 베릴.”
겨우 그 한마디를 더 내뱉었을 때, 메리쉬의 눈이 감겼다.
죽음이었다.
“아, 아아… 아….”
나도 너를 사랑한다고 대답해 줘야 하는데.
베를리아가 단어조차 되지 못한 소리만을 내며 멍하니 생각했다.
‘그런데… 말은 어떻게 했더라.’
말도 안 되는 의문과 함께 그대로 베를리아의 의식이 끊어졌다.
***
‘날 위해 죽어라.’
첫 번째 삶에서 카를, 네가 처음에 그렇게 말했을 때는 모두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했다. 정녕 네가 내게 바라는 것이 그것뿐이라면 그렇게 해 줘야겠다고.
나를 끔찍하게 여기는 네게 내 사랑을 증명할 방법은 이제 그것뿐이었으므로.
‘아이야, 이제 그만 일어나렴.’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났다고 여겼을 때, 그런 나를 에르젠타샤께서 깨웠다.
‘네가 돌아갈 방법이 생겼단다.’
처음 마주한 나의 신은 메리쉬를 가리키고 있었다. 새까만 공간 안에서 너의 모습만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흔히 알려진 악마의 형상을 한 존재와 계약을 하고 있는 메리쉬, 네가 보였다.
‘베를리아 리들턴의 귀환.’
악마는 인간이 할 수 없는 무엇이든 해 줄 수 있었다. 그런데 네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나의 귀환.
어리석은 나는 그제야 내가 카를로스를 위해 너를 버려두고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알기로 악마가 인간에게 바라는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인간의 영혼.
너를 버리고 온 나는 너를 대가로 살아날 자격이 없었다.
‘에르젠타샤시여, 막아 주세요.’
그래서 나의 신이라는 존재에게 빌었다.
‘그럴 수 없다.’
그러나 에르젠타샤는 단번에 나의 말을 거절했다.
‘저것은 악마가 아니라, 나와 같은 신이기 때문이다.’
아주 놀라운 말과 함께.
‘저게… 신이라고요?’
‘자세히 보아라. 너는 저 이를 알고 있을 것이다.’
신의 말에 악마를 다시 돌아본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악마의 모습을 하고 있던 그것의 모습은…
신전에서 늘 보아 왔던 에를니아의 형상과 꼭 같았으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위대한 신께서 무엇하여 악마의 흉내를 내는지.
‘악마가 인간들을 휘저을 때, 그 앞에서 신을 향한 인간들의 믿음은 더욱 강해지는 법이지.’
‘어째서, 그렇게까지…!’
‘신의 힘은 인간의 믿음에 따라 드높아진다. 메리쉬라는 저 아이와 대적하는 에를니아의 아들이 더욱 추앙받을수록, 에를니아를 향한 믿음도 강해지겠지.’
에르젠타샤의 말을 알아들은 나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 뜻은 즉, 메리쉬를 악마의 종자라 앞서 세우고 그런 그를 악마를 몰아낸다는 명목으로 희생시키겠다는 소리였으니까.
‘저 아이를 구하고 싶으냐?’
에르젠타샤가 물었다. 나의 신께서 띄워 준 화면 속의 너는 내가 너를 버린 뒤에도 나를 위해 살았다. 너는 나를 죽인 카를로스를 용서하지 못했고 그에게 복수하는 것만이 네 삶의 전부인 것처럼 굴었다.
그것이 철저히 에를니아의 농간인지도 모르고, 오직 나를 위하여.
‘제발, 제발요, 신이시여….’
그러니 에르젠타샤에게 내어놓을 내 대답은 이것뿐이었다.
나는 죽음의 순간까지도 오직 카를로스에게 매여 있었건만, 너는 어찌하여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하나.
그런 너를 내가 어찌 죽음 이후에도 외면할 수 있을까.
그래서 신에게 빌었다. 메리쉬를 구해달라고.
‘나 홀로는 할 수 없다. 네가 도와주어야만 해, 나의 아이야.’
메리쉬, 너를 위해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해야만 했다. 그게 내가 네게 빚을 갚을 유일한 답이었다. 에를니아에 의해 봉인된 에르젠타샤의 힘에는 한계가 있었고 그런 신을 도우려면 내 영혼이 가진 힘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진짜 신이라면… 내 영혼을 내어 줄 테니 베를리아 리들턴을 되살려 주십시오.’
그러나 메리쉬, 네가 내놓은 답은 끝까지 오롯이 나를 위한 것이었다.
처형을 앞둔 네가 아니라 나를 구명하길 바랐다.
그렇게 하면 너는 죽을 것이 뻔한데도.
‘너희 두 사람 모두 서로를 살리길 바라니… 이번만은 내가 도와주마, 나의 아이야. 다만 에를니아를 조심하려무나.’
결국 에르젠타샤께서는 나와 메리쉬 모두를 살리는 쪽을 택하셨다. 우리 둘이 가진 영혼과, 봉인된 신이 그보다 더한 힘을 사용할 때 질 대가를 감수하시면서.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두 번째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러나 세상은 에를니아의 권역이었기에, 그 힘에 밀려 나의 신과 있었던 일은 모두 잊은 채로. 아주 조금이나마 다행인 것은 메리쉬 너에 대한 것은 기억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삶에서 리리카를 만났다.
무정한 제 아버지와, 에루아트의 남은 자산들을 노리는 자들이 보낸 살수들에게 쫓기는 그를.
모든 것을 잊은 나는 두 번째 삶에서 내가 잘한다면 비극을 맞지 않으리라고 여겼다. 그래서 카를로스에게만 매달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최대한 많은 이들과 어울리려고 노력했다.
그러니까 그런 생각을 한 내가 리리카를 구해 줬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갈 곳이 없는 그에게 머물 곳을 만들어 주는 일도, 자신의 신분을 되찾고 싶다는 말에 도와주는 것도 모두 내게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다행이기까지 했다. 리리카를 도우면서 정신이 그리로 쏠리니 카를로스에게 가졌던 집착 또한 옅어졌으니까.
‘너는 나 없이 행복할 수 없어.’
모든 게 좋아지리라 생각했다. 카를로스에게서 그 말을 듣지만 않았더라면.
내가… 너를 어떻게 했으면 좋았을까, 카를로스.
메리쉬와 연인이 되었어도 나는 너를 사랑했다. 이전과 같이 네가 없으면 죽을 것 같은 사랑은 아니었으나, 데니안이나 리암과 같이 네가 행복해지기를 바랐다.
우리가 연인이 되지 않더라도 나는 우리가 함께한 시간들이 서로에게 의미가 있었으리라 생각했다. 나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를로스, 네가 나를 죽이기 전까지… 네가 참 많이도 내 악행들을 감내해 주었다는 사실을.
그래서 나만 달라진다면 다 괜찮아질 것이라고 여겼다.
‘저자가 죽은 것은 너 때문이야. 네가 감히 나를 벗어나 행복해지려고 했기 때문에 저자가 죽은 거야. 그러니까 너는 나를 그런 눈으로 봐서는 안 되지.’
멍청하고 어리석은 베를리아 리들턴. 나는 카를로스, 너와 내가 함께한 시간이 서로에게 각자 다른 의미를 가졌음을 너무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행복해지고 싶었고 네 행복을 바랐다. 그러나 카를로스, 네가 바란 것은 오로지 너의 행복이었다.
‘네가 아프지 않고 행복했으면 좋겠어, 베릴.’
어린 날 네멘 리들턴에게 벌을 받아 괴로워하던 내게 소년이 해 주었던 말은…처음부터 이런 것이었을까, 아니면 변질되어 버린 것일까?
그런 것은 알 수 없었다. 적어도 카를로스, 지금의 네가 바라는 내 행복이란 ‘네가 허락한 행복’뿐이라는 점이었다.
‘나는 내 것을 되찾으려 했을 뿐이고, 이건 모두 제멋대로 군 네 탓인데.’
왜냐하면 나는 네 ‘소유물’이었으니까.
‘너를 증오해, 카를로스 에덴버.’
첫 번째 삶에서도, 두 번째 삶에서도 나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너를 사랑했다. 카를로스, 너는 기어코 그 기나긴 사랑을 증오로 바꾸어 놓았다.
‘너를 사랑하는 게 아니었어.’
그래서 내 목에 칼을 박아 넣어 네 앞에서 숨을 끊었다. 더 이상 네 손에서 놀아나고 싶지도 않았고, 내 하나뿐인 연인을 따라가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죽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