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깽판치는악녀님 (109)화 (109/148)

109화. 기만의 끝(12)


 

그 길로 베를리아는 텔레포트 스크롤을 찢어 성지 근처로 돌아왔다. 성지는 하필 이동 마법조차도 제한이 걸리는 바람에 곧바로 메리쉬가 있는 곳에 도달할 수 없어 애가 탔다.

“멜!”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베를리아가 방문을 열고 뛰어 들어왔다. 그러자 안젤라가 완전히 울상이 된 얼굴로 베를리아를 돌아봤다.

“베릴…! 어떻게 해요, 상처가…!”

안젤라가 발을 동동 굴렀다. 그녀는 평생 신성력의 축복을 받아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래서 신성력에도 낫지 않는 상처 앞에서 안젤라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베를리아가 메리쉬의 붕대를 풀어 상처를 확인했다.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의 주변으로 썩어가는 냄새가 나고 있었으니까.

베를리아가 메리쉬의 상처에 흑마법을 퍼붓기 시작한 것은 썩어가는 것을 눈에 담은 것과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베릴, 뭐하는…!”

“그만둬라, 베릴!”

안젤라가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그것을 끊고 성검에서 다급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흑마법. 아니, 에르젠타샤의 권능은 질서와 무질서였다. 지금 베를리아는 메리쉬에게 찾아온 죽음의 질서를 어그러트리고 있었다.

“이게 무슨….”

안젤라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베를리아에게 이 상황을 설명해 줄 정신이 있을 리 만무했다.

“멜, 안 돼… 멜…, 정신 차려…!”

상처가 썩어 들어가는 턱에 찬 물로 적신 수건과 냉방 마법을 틀어 놓았어도 메리쉬의 온몸이 뜨거웠다. 그의 숨이 가빴다. 누가 봐도 죽음의 고비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 순간 베를리아의 눈앞에 한 장면이 떠올랐다.

‘왜 이래, 카를…!’

자신이었다. 카를로스를 보며 당황스럽고, 고통스럽고, 슬프고, 억울한 표정을 하고 있는 자신.

카를로스는 딱히 화가 난 표정이 아니었다. 그는 도리어 상냥하기까지 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당연한 것 아닌가? 저 놈이 내 것을 훔쳐 갔잖아.’

성검을 든 카를로스의 손이 메리쉬를 가리켰다. 그는 넝마가 된 채로 흙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핏줄에 타고난 에를니아의 축복과 성검으로 인해 얻은 신들의 힘. 아무리 메리쉬라고 해도 그 모든 것을 얻은 카를로스의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무슨, 무슨 소리야… 멜이 왜 카를, 네 것을 훔쳐 가.’

베를리아는 풀린 다리로 엉금엉금 기어 카를로스의 검 앞을 가린 채로 말을 이었다. 어떻게든 메리쉬에게 겨눠진 그의 검을 제 몸으로 가려 보기 위함이었다.

‘널 훔쳐 갔잖아, 베릴.’

푹.

그 순간 무언가를 찌르는 소리가 났다. 베를리아의 고개가 고철이라도 된 것처럼 아주 느릿하게, 느릿하게 돌아갔다.

“아… 아아아, 아아악…!”

“왜 그래요, 베릴?!”

베를리아가 갑작스럽게 비명을 지르자 안젤라가 놀라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그러나 베를리아는 자신이 보는 환영에서 벗어나지 못해 몸부림쳤다.

그날… 분명히 카를로스의 손에 있던 성검이 갑자기 이동하여 메리쉬의 심장에 박혀 있었다. 그것을 발견하고 그대로 굳어 버린 베를리아를 상대로 카를로스가 했던 말도 선명했다.

‘자, 이제 우리는 돌아가자. 베릴.’

메리쉬의 피가 땅을 적시고 있었다. 비릿한 혈향이 녹음의 숲을 가득 채웠다.

분명 베를리아는 카를로스와 안젤라의 결혼식을 본 후 메리쉬와 함께 제국을 떠나려던 찰나였다.

그런 평화로운 마무리를 굳이 쫓아와 망쳐 버린 카를로스는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굴고 있었다.

‘이거 놔…!’

카를로스가 자신을 잡아 올리자 베를리아가 발버둥 쳤다. 그녀가 제게 닿는 것조차 끔찍하다는 듯이 그의 손을 쳐냈다.

‘하아.’

그러자 카를로스가 한 것은 커다랗게 한숨을 쉬는 일이었다.

‘베릴, 괜한 짓 하지 마. 나 피곤해.’

카를로스는 마치 자신의 피곤함을 베를리아가 이해해야 한다는 듯이 말했다. 하긴, 평소의 베를리아였더라면 그랬을지도 몰랐다.

이미 카를로스는 자신을 한 번 죽였지만, 베를리아는 그것이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했다.

카를로스를 자신이 가진 힘으로 억압하고, 그의 연인을 위협하며, 카를로스에게 집착해서 그가 숨조차 쉬지 못하게 만든 죄. 그 갚을 치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카를로스에 의해 단두대에 올라 죽고 어찌 된 일인지 회귀했을 때도 베를리아는 그가 밉지 않았다. 이번에는 그녀만 잘하면 썩 괜찮은 결말을 맞을 수 있을 테니, 전과 다르게 굴자 다짐했었다.

실제로 베를리아는 되돌아온 삶에서 안젤라와 친구가 될 만큼 잘 지냈다. 지낸 생의 죄값을 갚는 기분으로 카를로스는 물론 안젤라에게도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마침내 두 사람은 모두의 축복 아래 결혼했는데… 그 중에 자신이 대체 무얼 잘못하여 메리쉬가 죽어야했단 말인가. 베를리아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대체… 대체 멜을 왜 죽였어? 멜이 무엇을… 내가, 무엇을 잘못해서…! 이제야 겨우, 나도 행복해지려는데…!’

베를리아가 카를로스에게 원망을 토해냈다. 메리쉬가 제 영혼을 걸고 베를리아의 시간을 되돌린 덕분에 그녀는 두 번째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토록 자신에게 맹목적인 남자라면 사랑 또한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메리쉬를 사랑했고, 그는 베를리아가 원하던 사랑을 주었다. 진심으로 행복했다.

그리고 그것을 카를로스가 끝장내 버렸다.

‘베릴, 네가 나 없이 어떻게 행복해?’

베를리아의 절규에 카를로스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너는 나 없이 행복할 수 없어.’

자신의 뺨을 쓰다듬는 카를로스의 손이 뱀의 피부와 닿은 것처럼 소름 끼쳤다. 베를리아는 그가 그토록 질색하던 집착을 제게 보이는 것을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저자가 죽은 것은 너 때문이야. 네가 감히 나를 벗어나 행복해지려고 했기 때문에 저 자가 죽은 거야. 그러니까 너는 나를 그런 눈으로 봐서는 안 되지.’

카를로스가 자신을 원망하는 시선으로 보고 있는 베를리아의 눈가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나는 내 것을 되찾으려 했을 뿐이고, 이건 모두 제멋대로 군 네 탓인데.’

그 순간 베를리아가 품었던 기대가 와장창 부서져 내렸다.

첫 번째 삶은 모두 자신의 죄였기에 감당하려고 했다. 그런데 자신이 달라진 두 번째 삶도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나빠졌다.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 주었던 사람이, 자신이 사랑했었던 사람에 의해 죽었으니까.

베를리아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녀가 첫 번째 삶에서 그렇게 죽어야 했던 이유는 그녀가 악행을 부려서도, 카를로스에게 더 이상은 필요 없는 사냥견이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저- 카를로스의 ‘소유물’인 자신이 그를 벗어나려했기 때문이었다.

카를로스는 자신을 단 한 번도 동등한 인간으로 본 적이 없었다. 만약 일말이라도 그랬다면… 적어도 이런 짓은 못했을 테니까.

베를리아 리들턴은 카를로스 에덴버의 가장 좋은 ‘물건’이었다.

그녀는 그 사실을 뒤늦게야 깨달은 자신을 저주했다.

‘너를 증오해, 카를로스 에덴버.’

메리쉬의 상처를 계속해서 썩기 직전으로 되돌리는 동안, 베를리아의 머릿속에서는 자신이 두 번째 삶에서 했던 말이 재생되었다.

‘너를 사랑하는 게 아니었어.’

그녀는 끊임없이 카를로스를 저주하고, 저주하고 또 저주했다. 그러나 그는 베를리아를 결코 죽게 놔두지 않았다.

“베릴… 그만해요!”

계속되던 환상이 끊긴 것은 안젤라가 베를리아의 행동을 말린 탓이었다. 그녀가 반사적으로 안젤라의 손을 쳐냈다.

“멜을 살릴 방법은 이것뿐이에요.”

“당신 지금 피를 토하고 있잖아요…!”

베를리아의 단호한 말에 안젤라가 소리쳤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의 목이 따끔하다는 것과 온몸에 저주의 낙인이 타오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언제 피를 토했지?’

베를리아는 자신의 앞섬이 피로 젖어 있는 것을 인지했다. 눈앞을 가리는 환상과 메리쉬를 살려야 한다는 집념이 아마 고통조차도 잊어버리도록 만든 모양이었다.

“앤지.”

베를리아가 힘없이 웃었다.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그녀가 여기서 흑마법을 멈추면 메리쉬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리란 것을.

모든 것에는 대가가 존재한다. 첫 번째 삶에서 메리쉬가 기꺼이 죽었기에 베를리아는 두 번째 삶을 얻을 수 있었다. 두 번째 삶에서는….

‘내가 네 행복을 찾게 해 줄게, 베릴.’

리리카가 또 다시 베를리아에게 기회를 주었다.

‘멍청한 베를리아 리들턴.’

베를리아가 스스로를 비웃었다. 그토록 남들의 희생으로 기회를 얻어놓고도 에를니아의 수작 따위에 기억을 하지 못해 낸 결과가 이것이라니.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니까 그녀는 멈출 수 없었다. 죽어야만 한다면, 이번에야말로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자신이 대가를 짊어져야만 했다.

“베릴!”

울컥- 베를리아가 또 다시 입에서 피를 토했다. 성검에 함께 이동해 온 에르젠타샤가 소리쳤다.

“그만 두어라! 그 이상으로 힘을 쓰면 인과율에 의해 정말로 네가 죽어!”

그쯤이야 베를리아도 알고 있었다. 에르젠타샤의 힘으로 메리쉬의 상처는 아물어가고 있었다. 에를니아의 힘을 상쇄시키는 것도 모자라, 베를리아가 죽음의 질서에서 그를 빼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베를리아는 그럴수록 자신의 몸 안에서부터 많은 것들이 무너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모든 것에는 대가가 존재하고, 원래 죽어 스러졌어야 할 영혼의 무게는 반드시 맞춰줘야만 했다.

메리쉬는 자신을 희생해 베를리아의 운명을 바꿨다. 그로 인해 죽음의 운명은 그에게로 갔고, 또 다시 그것을 바꾸려면 이번에는 베를리아가 희생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만, 둬요… 베릴.”

그때, 상처가 반쯤 아문 메리쉬가 눈을 떴다. 그의 시선에 자신을 대신하여 죽어가는 베를리아가 들어왔다.

“멜, 나는 네가 살았으면 좋겠어.”

베를리아가 웃었다. 진심이었다.

“그래서… 네가 없는 세상보다 내가 없는 세상이 더 나을 거 같아.”

베를리아의 말에 메리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베를리아가 절대로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메리쉬는 베를리아 대신에 자신을 포기하기로 했다.

“베릴, 당신이 없으면 내게는 세상이 없어요.”

그 말과 함께 순간 메리쉬가 그녀를 밀쳤다. 방금까지도 기절한 채 누워 있던 그에게서 그런 힘이 어떻게 나왔는지 기묘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미안해요, 베릴.”

뒤로 넘어졌던 베를리아가 벌떡 일어났다. 메리쉬의 손에 언제 잡은 것인지 모를 검이 들려있었다.

푹-.

“안 돼, 멜…!”

그러나 베를리아의 비명보다도 빠르게, 메리쉬의 검이 기어코 그의 심장을 꿰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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