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깽판치는악녀님 (108)화 (108/148)

108화. 기만의 끝(11)


 

다행히도 리리카는 숨이 붙어 있었다. 다만 몸 상태가 아주 좋지 않았다.

‘제가 여기 있을게요.’

안젤라의 말이 아니었더라면 베를리아는 메리쉬와 리리카를 두고 나올 수 없었을 터였다.

리리카로부터 가장 중요한, 고대 신전에 가는 법을 듣지 못한 터였다. 아마 그도 고통으로 인해 되는 대로 말을 하느라 거기까지는 생각하기 힘들었을 것이었다. 리리카를 탓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대체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그렇지만 너무 막막하다는 사실은 어쩔 수 없었다. 그 날 중간에 돌아오기는 했으나 방법을 알고 있는 리리카도 그때까지 한참을 돌아다녀도 찾지 못한 곳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찾을 수 있을지 베를리아는 자신할 수가 없었다.

‘…아냐, 해야 해.’

베를리아가 이를 악물었다. 에를니아에 휘둘리고 메리쉬가 카를로스에게 당한 상황에서 그녀까지 의지를 잃으면 끝이었다.

이런 식으로 끝나려고 돌아온 게 아니었다. 결단코.

‘에르젠타샤를 깨우는 데 다른 신들이 도움을 줄 거라고 했지.’

한참을 고민하던 베를리아가 자신이 들고 온 성검을 돌아봤다.

‘그렇다면 반대도 가능할 거야.’

베를리아가 성검 속으로 흑마법, 아니 에르젠타샤의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다른 신들이 에르젠타샤를 깨울 수 있다면, 에르젠타샤의 힘 또한 다른 신들을 깨울 수 있어야 옳았다.

“오랜만이구나, 아이야.”

그리고 베를리아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성검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베를리아는 그 목소리가 제 꿈속에서 들었던 음성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사안이 급하니 인사는 되었다. 우선 신전으로 가자꾸나.”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행히도 신들이라고 모두 에를니아처럼 권위적이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우리라고 에를니아가 숨겨 둔 신전이 어디에 있는지 곧바로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가는 법을 알려 줄 수는 있지.”

세 번째로 등장한 음성이 말했다. 하긴, 성검 속 신들의 영혼을 통해 고대 신전으로 가는 길을 알 수 있었더라면 리리카도 그렇게 헤매지 않았을 터였다.

“부탁드립니다.”

베를리아가 빠르게 대답했다. 일 분 일 초가 시급했다.

***

성지의 주변을 13바퀴쯤 돌고 나서야 마침내 고대 신전으로 가는 문을 발견했을 때, 그곳에 들어선 베를리아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곳이… 천여 년 동안 아무도 오지 않은 곳이라고요?”

왜냐하면 에덴버의 긴 역사 동안 그 누구도 들어오지 못했던 곳이라고 하기에는 고대 신전이 너무 멀쩡했기 때문이었다.

“그거야 신들 중에서 제일 약한 존재가 에를니아였으니까.”

“지금 에를니아의 힘으로 이루어 놓은 것들은 너희가 마도시대 혹은 신성시대라고 일컫는 것들에 비하면 별것 아니잖아?”

“맞아, 그때야 모든 신이 각자 제힘을 발휘했으니 땅 위의 생명체들이 지금보다 월등히 많은 것들을 누릴 수 있었어.”

“이 신전도 그 당시의 유물이니 멀쩡할 수밖에.”

성검 속의 신들이 앞 다투어 말했다. 그들의 음성에서 자신들의 힘에 대한 자부심이 넘쳐났다.

“그런데 어쩌다가 에를니아가 모든 신을 봉인하고 주도권을 잡게 된 거죠?”

베를리아가 에르젠타샤의 제단 쪽으로 부지런히 발걸음을 놀리며 물었다. 잠시 성검의 목소리들이 조용해졌다.

“…우습게 봤던 거지.”

잠시 후 한숨 섞인 음성이 들려왔다.

“에를니아의 권능은 ‘욕망’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우리들에게는 딱히 쓸모가 없는 권능이었지.”

말 그대로 신은 뭐든 할 수 있었다. 못할 것이 없었으니 일부러 특정한 것을 욕망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니 그들의 눈에 에를니아의 권능이 얼마나 하찮아 보였겠는가.

“그런데 그게 신이 아닌 존재와 엮이면 달라진다는 것을 우리는 몰랐던 거지.”

신이란 필연적으로 다른 개체들을 이해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누군가를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완전무결했다.

그래서 에를니아는 신이 사랑한 것들을 공략했다.

“동물끼리, 인간끼리, 혹은 인간이 동물을, 그 외에도 다른 종족들끼리… 처음에는 각자의 욕망을 위해서 조금씩 욕심내기 시작하던 게 나중에는 남의 것까지 탐내더군.”

“신이라고 해서 어찌 다들 똑같은 존재를 아끼겠나. 그렇게 각자 아끼는 존재의 편을 들다 보니 어느덧 우리끼리 다투고 있었지.”

그때부터 신들 사이에도 욕망이 생겨났다. 다른 신이 아니라, 자신이 아끼는 누군가가 조금 더, 아니 더 많이, 아니 모두 다 가지기를.

“에를니아는 자신의 권능을 이용하여 모두의 욕망을 더 부추겼고 결국 전쟁이 일어났다.”

“신들끼리의 전쟁이니 결론이 날 리가 있나. 결국 다 같이 힘을 소모하기만 하는 끝없는 전쟁의 연속이었지.”

물론 신들 사이에는 그들을 따르는 자들의 수에 따라 격차가 존재했다. 그러나 그것이 신들의 생존과 소멸을 가를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서 전쟁은 한없이 계속됐다.

“그 사이에 에를니아가 수를 쓴 거군요.”

베를리아가 말했다. 애초에 노리고 일으킨 분쟁이었으니 에를니아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채로 뒷짐 지고 지켜봤을 게 뻔했다.

“그래. 한순간의 어리석음으로 인한 대가를 이토록 오래 지게 될 줄은 몰랐지만.”

성검 속 목소리가 긍정했다. 사실 무한한 삶을 사는 신들에게 에를니아가 유일신으로 자리 잡은 그 시간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리 긴 게 아니었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불리지 않고, 누구도 그들을 찾지 않는- 좁은 검 속에 갇힌 시간은 신들조차도 그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만들었다. 끝없이 더디고 한없이 흘러가는 그 시간을.

“저기에 있군, 에르젠타샤의 제단.”

성검으로부터 한 줄기 빛이 흘러나왔다. 그것이 커다랗고 화려한 벽화가 새겨진 벽과 가시 줄기들이 어지럽게 얽힌 오색 빛의 보석 같은 문을 가리키고 있었다.

“저게 제단이라고요…?”

베를리아가 의아함을 품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제단의 모습과 저 문은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인간들의 상식으로 지나간 시대를 떠올려봤자 소용없는 일이야.”

그러자 성검 속 목소리가 대답했다. 맞는 말이었기에 베를리아가 문으로 다가갔다.

“우리를 문에 꽂아 넣으면 된다.”

문 어디에도 문고리라던가 검을 꽂아 넣어야 할 것만 같은 위치는 보이지 않았다. 베를리아가 잠시 고민을 하다가 검으로 무작정 문의 정중앙을 찔렀다.

그 순간 공기가 크게 일렁였다. 시간의 움직임, 공간의 구성, 주위를 이루는 모든 것들. 그것이 아주 느릿하게 베를리아의 주변에서 떠다녔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마침내… 에르젠타샤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의 아이야, 오랜만이구나.”

에르젠타샤가 곧바로 베를리아를 알아보고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겉으로 보이는 신의 몸집은 베를리아보다도 작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어쩐지 에르젠타샤가 대단히 크게 느껴졌다.

“두 번이나 같은 생을 거듭하면서 영혼이 지쳐 보이는 탓에 다른 세계로 보내 주었다만, 그곳에서도 영 잘 지내지는 못 한 모양이야.”

어느덧 에르젠타샤의 손이 베를리아의 뺨에 닿아 있었다. 신의 말에 성검 속 목소리들이 발끈했다.

“너 혼자 한 것도 아니지 않나!”

“우리도 이 아이를 위해 힘을 썼는데 너 혼자 챙긴 척하면 섭섭해, 에르젠타샤-.”

어쩐지 위엄이 넘치던 아까와는 달리 칭얼거리는 듯한 음성이었다.

“알지. 미누엘라, 엔테아, 르누미아, 디히스트, 리드로턴. 너희들 모두 고생해 주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에르젠타샤는 능숙하게 그들을 달랬다. 마치 그 반응조차 예상한 모양새였다.

‘…태초의 신은 원래 이런 건가.’

에르젠타샤는 누가 봐도 신이었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신.

그리고 그런 에르젠타샤라면 반드시 메리쉬를 살릴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에르젠타샤 님, 반드시 들어주셨으면 하는 청이 있습니다.”

베를리아가 에르젠타샤의 앞에 무릎 꿇었다. 자존심 같은 것은 단 하나도 상하지 않았다. 메리쉬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없었다.

“아이야, 일어나렴.”

에르젠타샤가 더없이 자애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네가 아무리 그래도 네 연인은 살려 줄 수 없단다.”

그러나 뒤따라오는 말은 그와 상반되게 잔인했다.

“그렇다면 저는 신을 찾아 올 이유가 없습니다.”

베를리아의 얼굴이 빠르게 굳었다. 그녀가 노골적으로 말했다. 베를리아는 자신이 에르젠타샤를 찾아온 이유도, 제 요청을 들어주지 않을 경우 취할 태도도, 그 무엇도 숨기지 않았다.

베를리아가 용건을 말하기 전부터 그녀의 부탁을 알고 있던 에르젠타샤였다. 그 앞에서 무언가를 숨긴들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 아이는 너를 위해서라도 죽어야 해.”

“저를 위해 메리쉬가 죽어야만 한다면 차라리 제가 죽는 게 낫겠군요.”

베를리아가 결연하게 말했다.

그녀는 살고 싶었다. 그러나 그 대가가 메리쉬의 목숨이라면 그 간절한 삶조차 거부하고 싶었다.

그러자 에르젠타샤가 푹 한숨을 쉬었다.

“지난번에도 그러더니, 여전히 변함없구나.”

에르젠타샤는 마치 베를리아가 이럴 줄 알고 있었다는 듯한 태도였다. 아니, 이미 겪어 본 것 같은 어조였다는 게 더 맞는 말일 터였다.

베를리아의 안에 다시 의문이 자라났다. 자신이 책 속 이야기라고 여겼던 베를리아의 삶이 사실은 자신의 기억이라면, 그녀는 카를로스에 의해 죽은 것이었다. 그런데 언제 또 메리쉬를 살리려 했단 말인가.

“지금 그 말씀은….”

그러나 베를리아가 그 의문에 대하여 입을 떼려던 찰나 통신 아티팩트가 울렸다. 혹시라도 메리쉬나 리리카에게 무슨 일이 있을까 봐 베를리아가 안젤라에게 주고 온 것이었다.

“앤지, 무슨 일이에요?”

베를리아가 통신을 승인한 후 떠오른 영상 화면을 쳐다봤다. 그녀를 확인한 안젤라가 다급하게 말을 꺼냈다.

“베릴, 큰일 났어요! 메리쉬의 상처가 썩기 시작했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