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기만의 끝(10)
태초에 땅과 하늘이 존재하기 전에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이 무질서 속의 질서였다. 가장 태초의 신은 자신의 이름을 에르젠타샤라 칭했다.
무질서와 질서가 생겨나자 차츰차츰 세상은 많은 것들로 나뉘었다. 또 다른 신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 중 가장 마지막으로 태어난 것이 에를니아였다. 그 후 마침내 인간이 창조되었다.
“신녀요?”
“현재 신전에 있는 성서의 내용과는 달리, 태초에 만들어진 것은 여성체였다고 하더군요. 그중에서 신과 땅을 잇는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일컬어 신녀라고 했다 합니다.”
지금의 성서에 적힌 것들은 날조된 것들이나 다를 바 없었다. 에를니아가 자신이 했던 짓을 숨기기 위하여 아주 오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온 기록들을 모두 지워 버렸기 때문이었다. 지금 남아 있는 기록들은 에를니아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날조하여 에덴버에 전수한 것에 불과했다.
리리카가 잠시 손수건으로 제 입을 가리며 잔기침을 했다. 그는 방금 속에서 역류한 입가의 피를 재빠르게 손수건으로 닦아냈다. 리리카는 베를리아의 이목이 메리쉬에게 쏠려 있는 것이 이때만큼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신녀들은 기본적으로 신과 소통할 힘을 지닌 자들로, 특정한 신을 택하여 모시는 이도 있었으나 어떤 신도 고르지 않고 평생을 자유롭게 지내는 이들도 있었다고 해요.”
속이 따끔따끔했다. 원래라면 이 시기의 베를리아가 몰라야만 할 사실을 자꾸만 언급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메리쉬가 죽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는 건 어차피 리리카가 아는 모든 이야기가 끝나간다는 의미였다. 아마도… 이 뒤부터는 베를리아에게 자신이 필요하지 않을 터였다.
그러니 이제는 말해도 되리라는 판단이 들었다.
“에를니아는 신들을 배신하고 그들을 봉인시켜 자신이 유일한 신이 된 뒤에… 기존에 다른 신들을 섬기던 신녀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그 시절 신과 신녀 사이의 유대 관계는 겪어보지 않으면 절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견고했다. 한 번 섬긴 신을 배반하는 일은 신뿐 아니라 신녀들 사이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일이었다. 그래서 신녀들은 오래도록 신을 지켜본 뒤 선택하기도, 선택하지 않기도 했다.
그런 사이를 에를니아가 다른 신들을 봉인함으로써 강제로 찢어 놓은 것이었다. 그러니 신녀들이 반발하지 않을 리 없었다.
그래서 에를니아는 이미 신을 택한 신녀들을 모두 죽였다. 그러나 에를니아가 간과한 것이 있었으니, 신녀들의 힘은 핏줄을 타고 내려오는 것이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안 자유 신녀들조차 아무도 에를니아를 섬기지 않으려 했죠.”
신인 에를니아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에를니아가 죽인 신녀들은 모두 누군가의 어머니요, 딸이고 사촌이자 조카, 언니, 동생이었다. 그러니 에를니아를 향한 신녀들의 반발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그래서 에를니아는 마침내 자유 신녀들까지도 모두 죽여 없애기로 했죠. 그로 인해 자유 신녀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고요.”
그들이 모시는 신의 기운을 쫓아가면 쉬이 찾을 수 있던 신녀들과 달리, 자유 신녀들을 찾기란 좀처럼 쉽지 않았다. 그러나 에를니아는 집요했고 결국 모든 자유 신녀들을 죽여 제 학살의 역사를 비밀로 묻어 버렸다.
“에를니아가 모두 죽였다고 생각한 신녀의 마지막 핏줄, 그게 베를리아 양이에요.”
그런 베를리아가 하필 에를니아가 직접 축복을 내려 만든 나라의 황족, 카를로스와 만난 것이었다.
지긋지긋한 악연이었다.
“…그럼, 앤지는요?”
“신녀는 모든 신이 함께 창조한 인간 중에 태어났다고 해요. 그런데 더 이상 다른 신들은 힘을 쓸 수 없었으니 에를니아가 자신의 힘으로 신녀와 비슷한 성녀를 만들어낸 거죠. 대신 신녀와 같은 절차를 밟지 않기 위하여 핏줄이 아니라 인간 중 무작위로 태어나도록 했지만요.”
“그럼 에를니아가 왜 나한테 집착했는데요?”
베를리아는 끊이지 않는 의문을 내뱉었다. 에를니아 본인이 직접 만든 자신의 성녀가 있는데, 왜 굳이 그녀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 들이려 했는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를니아 혼자 만든 성녀와 모든 신의 힘으로 만들어진 신녀는 신의 힘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의 크기부터 다르니까요.”
그제야 베를리아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문명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사람들은 신을 점점 덜 찾게 되었다. 예전에는 사소한 치료조차 신관을 통했던 반면에, 이제는 역병 같은 큰일이 아니면 대체로 의원들도 해결이 가능하게 된 것이 그 변화였다.
신의 힘은 그들을 향한 믿음에 따라 정해진다. 에를니아가 신탁을 내리기 싫어서 내리지 않은 게 아니었다. 지상에 참견할 수 있을 만큼의 힘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를로스를 돕기 위해 신탁을 내린 것은 ‘인과율’을 어긴 행동이었다. 에를니아는 신탁 하나도 내리기 힘든 그런 신으로 잊히고 싶지 않았다.
“나를 이용해서 자신의 힘을 펼치려고 했군요.”
성녀보다 더 커다란 신성력을 발휘할 수 있는 마지막 신녀의 핏줄. 심지어 자신의 정체도, 신녀들이 당한 학살의 진실조차 모르는 존재.
에를니아에게 있어서 베를리아는 그런 존재였다. 가장 유용하고 가장 탐나는 꼭두각시.
에를니아는 자신의 진정한 위용을 인간들에게 보이고 싶었고 거기에 베를리아가 필요했던 것이다.
“정말 어쩌면 그렇게… 둘이 똑같이 끔찍한 거죠?”
분노로 인해 베를리아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카를로스나 에를니아나 다를 것이 없었다.
이미 에를니아에게는 성녀가 있었다. 그런데 제 힘을 더 많이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을 가진 베를리아가 탐난다고 하여 새로운 신녀를 세운다면? 제가 직접 성녀를 만든 주제에, 버리려고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에를니아가 베를리아 양으로 하여금 카를로스 에덴버를 사랑하게 만들려고 한 이유도 그와 같습니다.”
리리카가 그 말을 하는 순간 베를리아는 어쩐지 에를니아가 카를로스를 도운 이유조차도 알 것 같았다.
“아무리 봉인되어 있다고는 하나 태초의 신인 에르젠타샤는 에를니아와 격이 너무나 다른, 위대한 신이죠. 그러니까 신녀인 당신이 에르젠타샤를 직접 포기하도록 조종하고 싶었던 거예요.”
베를리아는 기억상 어떤 신을 택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짐작 가는 것이 있었다.
마도 시대의 마법을 두고 마법사들이 일컫기를, 그것은 신이 인간에게 내려준 선물이라고 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고대 마법과 근본이 같은 흑마법 또한 신의 힘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아마도 네멘 리들턴이 베를리아에게 가르친 힘이 에르젠타샤의 것이었던 모양이었다.
베를리아가 자신도 모르게 섬기게 된 신이 태초의 신 에르젠타샤라는 점은 에를니아가 그녀를 노리는 시점에서 유일한 방패였다. 에를니아는 그 방패를 카를로스를 이용하여 치우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제 내가 뭘 하면 돼요?”
아직도 리리카에게 들어야 할 것이 많았으나 베를리아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메리쉬의 안위였다. 당장 급한 내용은 들었으니 그를 괜찮게 만들 방법을 알고 싶었다.
“저번에 나랑 어딘가로 가려다가 황태자의 기사들에게 저주를 거느라 베를리아 양의 몸이 안 좋아져서 돌아왔던 거 기억해요?”
베를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일의 여파가 지금까지도 오고 있으니 잊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우리가 가려던 곳은 고대 신전이에요.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에를니아가 사장해 버린 다른 신들의 신전이죠.”
리리카가 순간 미간을 살포시 찌푸렸다. 눈앞이 흐려진 탓이었다. 몸에 점차 한계가 오고 있었다.
“리리카…?”
베를리아가 그제야 리리카의 이상을 알아차린 듯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늘 진실을 말하지 않고 숨기던 그가 오늘따라 아주 많은 말을 했다는 것을 그녀는 뒤늦게 깨달았다.
“당신, 괜찮은 거예요…?”
베를리아가 보기에도 리리카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지금까지 어떻게 그렇게 태연하게 말을 이었나 싶을 만큼.
“잘 들어요, 베를리아 양.”
그러나 리리카는 괜찮다는 대꾸도 없이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그가 도저히 참지 못하고 울컥 피를 토해냈다.
끼이익, 쿵.
“리리카…! 당신…!”
베를리아가 기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앉아 있던 의자가 요란한 소리를 냈으나 그런 것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모든 것에는 대가가 있다. 베를리아는 리리카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고대 신전으로 가서 에르젠타샤를 깨워요. 방법은- 컥…!”
속을 불로 지지는 듯했다. 리리카가 조금 전보다 더더욱 많은 피를 토하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베를리아는 그것이 리리카가 인과율을 어긴 대가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메리쉬를 치료하고 싶어도 리리카더러 죽으라고 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리리카의 얼굴은 곧 죽어도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방금까지도 멀쩡히 서 있던 남자의 얼굴은 병상에 누워 있는 메리쉬보다도 창백했다. 베를리아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나중에 말….”
“나중은 없으니까 들어요!”
그러나 그것을 리리카가 단호하게 끊어 버렸다. 단언컨대 그에게서 베를리아가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성검을 가지고 가요, 거기에 다른 신들의 영혼이 봉인되어 있으니 에르젠타샤의 봉인을 푸는 데 힘을 보태 줄….”
삐이이익- 귓가에 이상한 소음이 쨍하게 들려왔다.
“리리카…!”
리리카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베를리아가 다급하게 그의 이름을 부름과 동시에 그의 눈꺼풀이 무참히 감겨 버렸다.
리리카는 서서히 제 몸이 어둠 속에 잠겨 드는 것을 느끼면서도 생각했다.
그대, 부디 이번에는 행복하게 살아남기를.
그가 살아온 이유이자 유일한 바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