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깽판치는악녀님 (106)화 (106/148)

106화. 기만의 끝(9)


 

세상이 멈추는 것만 같았다. 제게 주어진 고통에 괴로워하던 베를리아의 시선이 메리쉬에게 고정되었다.

카를로스의 검이 메리쉬를 꿰뚫고 있었다.

“아… 아아….”

단어가 언어가 되어 나오질 못했다. 온몸을 태워 버릴 듯 뜨겁게 달구는 낙인의 고통도 잊혔다. 어느새 베를리아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되돌아왔는데-.’

까마득한 절망이 베를리아를 점령했다. 또 다시, 그녀의 눈앞에서 메리쉬가 죽어가는 환상이 덧씌워졌다.

“베릴, 정신 차리세요.”

그러나 그때, 메리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손에서 피가 뚝, 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독한 놈.”

카를로스가 아득 이를 갈았다. 등을 보이기에 심장을 찔러넣었으나, 그 사이에 몸을 틀어 심장을 피하고 꿰뚫은 검이 더 움직이지 못하도록 맨손으로 검날을 부여잡고 있었다. 그 힘이 어찌나 강한지 카를로스가 기를 써도 검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챙강!

카를로스의 검이 부러졌다. 메리쉬가 자신이 쥐고 있던 검날의 뒤쪽을 함께 잡아 그대로 몸을 비틂으로써 그의 힘에 의해 부서진 것이었다.

“멜…!”

그 순간 베를리아가 메리쉬에게로 달려왔다. 그녀의 주변으로 순간 무형의 기운이 폭사했다.

‘사랑해요, 베릴.’

제게 사랑을 말하던 메리쉬의 모습이 베를리아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와 입을 맞추던 순간, 그와 보냈던 밤, 그에게 끝없이 사랑을 속삭였던 그날… 그 모든 것들이.

베를리아의 뇌리에서 무언가 부서져 내렸다. 그녀를 가로막고 있던 희뿌연 안개의 벽이 순식간에 옅어졌다.

“안 돼…!”

에를니아가 비명처럼 소리쳤다. 그러나 신의 목소리 따위 더 이상 그녀의 귓가에 들리지 않았다.

메리쉬에게로 가야만 했다.

“어딜…!”

카를로스가 베를리아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것을 새하얀 검이 가로막았다.

“물러서지 않으면 베어 버리겠다.”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알 수 없는 자였다. 빠르게 뒤로 물러난 카를로스가 경악했다.

“네 놈이 어떻게 성검을…!”

눈앞에 있는 것은 ‘진짜’ 성검이었다. 일전에 베를리아가 그를 속이기 위해 가져왔던 가짜와 어떻게 헷갈릴 수 있었을까 싶을 만큼 강력한 신성을 뿜어내는.

카를로스의 시선이 그곳에 고정되었다. 그사이 베를리아가 무너지는 메리쉬의 신형을 받아냈다.

“멜…!”

“괜, 찮….”

아무리 강건한 메리쉬였어도 사람이었다. 피를 쏟고 심장 근처를 뚫렸으니 괜찮을 리가 없었다. 베를리아가 다급히 그의 말을 막았다.

“말하지 마, 치료부터 하자.”

베를리아가 제 드레스 자락을 쭉 찢어내 메리쉬의 피가 흐르는 가슴에 둘러맸다. 그리고는 늘 가지고 다니던 정제 포션을 메리쉬의 입에 넣어 주었다. 리리카가 직접 만든 것이었기에 효과는 확실할 터였다.

“어째서…?”

베를리아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녀가 파르르 떨리는 제 입술을 깨물며 겨우 숨을 삼켰다.

메리쉬의 상처가 낫질 않았다.

‘너희 둘 중 하나는 죽어 줘야겠다.’

그 순간 에를니아의 말이 떠올랐다. 베를리아의 손이 덜덜 떨려 왔다.

처음부터 둘 중 하나가 아니었다.

‘둘 중 하나가 아니라… 메리쉬였던 거야.’

물리적인 지혈까지는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인지 피는 이전보다 덜 흘러나왔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상황이 좋아지지는 않았다.

검에 찔린 부위는 심장은 아니었으나 그곳에 가까웠고, 이대로 둔다면 결코 살아남지 못할 터였다.

“리리카…! 멜이!”

베를리아가 다급하게 고개를 들어 리리카를 찾았다. 카를로스와 검을 나누던 그가 베를리아의 비명 같은 부름에 카를로스를 신성력으로 튕겨내고 그녀에게로 달려왔다. 카를로스가 눈에 불을 켜며 그런 리리카를, 아니 성검을 쫓아갔다.

“제발…! 그만 좀 해!”

그리고 뒤늦게 베를리아를 따라와, 이 모든 참혹한 광경에 굳어 있던 안젤라가 카를로스의 앞을 막아섰다. 그녀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제 연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헤어지기로 마음먹었다지만… 이렇게까지 카를로스가 망가지길 바란 것은 아니었다. 지금의 그는 안젤라가 전혀 모르는 사람 같았다.

카를로스의 뒤에서 주춤거리고 있는 황태자의 기사들이 안젤라의 눈에 들어왔다. 그간 겪어온 것들을 통해서 그녀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카를로스가 오직 저 메리쉬라는 남자 하나를 죽이기 위하여 이들 모두를 데려왔음을.

카를로스는 정말이지, 자신의 마음대로 하고 있었다. 그것은 대의를 위해서도, 그의 신념을 위해서도, 앞으로 있을 미래를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카를로스의 욕망을 위한 일이었다. 욕망. 겨우 그것 하나를 위하여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었다.

안젤라가 가장 명확히 알고 있는 것 한 가지가 있었다. 적어도… 지도자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

“비켜, 앤지.”

그러나 카를로스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안젤라가 막아 선 뒤편에 고정되어 있었다. 성검과 베를리아. 그를 위한 것들이 있는 곳에.

안젤라가 눈을 질끈 감았다.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눈을 뜬 그녀가 마침내 제 연인을 완전히 버리기로 결심했다.

“카를로스 에덴버, 성녀의 권한으로 당신에게 명령합니다.”

카를로스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왜냐하면… 직위로 따졌을 때, 에덴버에서 안젤라는 분명히 그에게 ‘명령’할 수 있는 위치였으니까.

공식적으로 황제와 성녀와 교황은 동급이었다. 그러나 카를로스는 아직 황태자였다. 설령 그가 에를니아의 ‘신탁’을 받았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황태자와 그의 기사들을 성지에 대한 모욕죄로 성지에서 추방합니다.”

안젤라의 명이 떨어졌다. 그 순간 신성력을 담은 그녀의 목소리에 성지가 반응했다. 그와 동시에 성지 전역에 그 음성이 울려 퍼졌다.

“안젤라…!”

카를로스가 분노하여 소리쳤다. 성지에서 추방당한 신의 아들. 그것은 필연적으로 사람들의 궁금증을 자아낼 것이고, 이로써 에를니아로 인해 확고해졌던 그의 위치가 다시 흔들리게 될 터였다.

“황태자, 내게 예의를 갖추세요.”

카를로스가 제게 다가오려는 것을 안젤라가 신성력을 써서 막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명백히 그에게 ‘선’을 긋고 있었다.

곧 저 멀리서 성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온 진원지로 다가오는 성기사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카를로스가 신전과 전면전을 할 게 아니라면 물러나야만 했다.

“…모두, 검을 집어넣어라.”

카를로스가 이를 악물며 제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그의 얼굴이 더없이 굴욕에 젖어 있었다.

***

베를리아의 얼굴에는 여전히 붉은 낙인이 남아 있었다. 에를니아의 세뇌를 깨버리면서 흑마법을 과하게 쓴 탓이었다. 온몸에서 열이 나지만 않았더라면, 그녀는 결코 카를로스를 그런 식으로 곱게 돌려보내 주지 않았을 터였다.

“…좀 쉬어요, 베릴.”

리리카가 그런 베를리아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고열로 인해 흐릿해진 시선을 그에게 맞췄다.

“…어떻게 해요, 리리카?”

베를리아의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안젤라나 리리카의 신성력으로도 메리쉬의 상처는 낫지 않았다. 그나마 겨우 지혈만 해 둔 것이 전부였다.

상처가 낫질 않으니 그것이 메리쉬의 체력과 정신을 계속해서 깎아 먹었다. 결국 메리쉬는 고통을 견디기 힘들어서, 정확히는 그런 그를 보고 있는 베를리아를 위하여 현재 수면제를 먹고 잠이 든 터였다.

“멜이 이번에도 죽으면….”

베를리아가 횡설수설 말을 늘어놓았다.

“…그러면, 무슨 방법으로 다시 시간을 되돌리죠? 나는 어떻게 된 건지도 모르는데….”

그 말에 리리카가 움찔했다. 그가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기억이 나는 게 있어요, 베릴?”

“…무슨 기억이요?”

리리카의 말에 베를리아가 반문했다. 그녀는 아마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인지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미친놈.’

리리카가 그런 그녀를 보며 자책했다. 이런 상황에서 제 안에 품었던 미약한 기대가 더없이 비겁하고 질 나쁘게 느껴졌다.

“메리쉬의 상처가 낫지 않는 이유는 에를니아의 저주 때문이에요.”

리리카가 그런 스스로를 지워 버리려는 듯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베를리아가 자신의 이런 저열한 속내를 알게 될까 봐 겁이 난 탓도 있었다.

“신의 힘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신의 힘밖에 없죠.”

‘리리카, 끼어들지 마라. 둘 중 하나는 죽었어야 할 영혼이었다.’

‘리리카, 그만해. 누구도 운명의 수레바퀴에 감긴 실이 이어져야 할 방향을 바꿀 순 없어.’

성검 속의 목소리들이 앞 다투어 리리카의 머릿속으로 들려왔다. 인과율은 신조차도 피할 수 없는 것. 그러니 인간인 리리카라고 한들 인과율을 어기고 무사할 리 없었다.

‘그 누구도 죽음을 막아서는 안 돼.’

영혼의 무게는 세상을 지탱하는 가장 큰 축이었다. 오랜 옛날, 죽음으로부터 사람을 살아 돌아오게 했던 신의 아들이 죄의 대가로 죽음을 맞이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에를니아가 인과율의 대가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메리쉬의 ‘목숨’에 관여할 수 있던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베를리아와 메리쉬,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운명에 의하여 죽어야만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순리대로라면 리리카는 베를리아에게 메리쉬를 살릴 방법을 알려 줘서는 안 됐다.

“그러니까 메리쉬를 살릴 사람은 베를리아 양뿐이에요.”

그러나 리리카는 그럴 수 없었다. 베를리아의 두 번째 삶에서 그가 그녀에 의해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이전에 메리쉬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니까.

“…내가 어떻게요? 흑마법으로요?”

베를리아가 물었다. 그녀는 리리카의 말에 반신반의하면서도 절박한 얼굴이었다.

울컥, 리리카의 속에서 뜨끈한 피가 올라왔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꾸역꾸역 삼킨 채로 입을 열었다. 어쩌겠는가, 베를리아가 자신의 눈앞에서 저런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정확히는 흑마법이 아니라… 다른 신의 힘이죠.”

“다른 신… 이라고요?”

“베를리아 양, 당신은 질서와 무질서의 신 에르젠타샤의 신녀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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