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기만의 끝(8)
“황태자 전하께서 얌전히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카를로스가 보내온 기사가 메리쉬에게 말했다. 얌전히. 그렇지 않으면 무얼 하겠다는 건지, 누구를 인질로 잡고 하는 이야기인지 그 의도가 너무 명백했다.
“하, 가지.”
메리쉬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베를리아. 그 이름 앞에 그는 늘 어쩔 수 없었다.
“메리쉬, 굳이 갈 필요 없어요. 지금 이 시점에 그 자가 베를리아 양을 어떻게 하지는 못할 테니까.”
리리카의 말이 타당했다. 카를로스 에덴버의 성정상 제 손에 들어온 유용한 패를 굳이 망가트릴 이유가 없었다.
“그자가 납득 갈 만한 이유로 베릴을 단두대에 올리려고 했던가?”
그러나 메리쉬의 반박도 틀린 게 없었다. 이미 카를로스는 베를리아가 메리쉬를 처분하는 것을 주저했다는 사실만으로 그녀를 죽이려고 한 전적이 있었으니까.
“이번에는 다를 겁니다.”
그래도 리리카는 말려야만 했다. 베를리아도 메리쉬의 옆에 없는 이 시점에, 황태자가 그를 왜 부르는지 뻔한 일이었으니까.
“단 1%의 가능성도 없다고 장담할 수 있나?”
그러나 메리쉬의 태도는 굳건했다.
“베를리아가 황태자에 의해 죽을 뻔했을 때도, 에를니아에 의해 이런 상황이 벌어졌을 때도. 그러지 않을 확률이 훨씬 높았지.”
항상 사건사고라는 것은 그런 식이었다. 가장 일어날 가능성이 적은 일부터, 갑작스럽게 일어났다. 그래서 그 틈으로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들이 빠져 나가도록.
그러니까 메리쉬는 만에 하나를 절대 간과할 수 없었다.
“…버텨요.”
결국 한숨을 삼킨 리리카가 방을 나서려는 메리쉬를 붙잡고 말했다.
“어떻게든 베를리아 양을 데리고 올 테니까.”
어차피 여기서 메리쉬를 더 말려 봐야 아무 소용없으리라는 사실을 리리카도 알았다. 애초에 그를 말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이곳에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메리쉬가 잠시 리리카를 빤히 쳐다봤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을 진심으로 살리고 싶어 했다. 그것도 아주 절박하게.
메리쉬는 리리카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눈이 이상한 게 아니라면, 분명 리리카도 베를리아를….
“…그래.”
메리쉬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되었든 믿는 수밖에 없었다.
***
“잘도 정말로 따라왔군.”
카를로스가 진짜로 혼자 나타난 메리쉬를 보며 말했다. 제가 직접 불렀던 주제에 꽤 놀랍다는 기색이었다. 그것을 보며 메리쉬가 입매를 비틀었다.
“네놈이 오라고 해 놓고 말도 많아.”
“무례하다…!”
메리쉬의 말에 황태자의 기사가 버럭 화를 내며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메리쉬가 그를 비웃었다.
“함부로 나서지 않는 게 좋을 텐데.”
콱. 어느덧 기사의 앞에는 단검이 꽂혀 있었다. 기사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주변의 기사들도, 당사자조차도 인식하지 못한 사이에 날아온 것이었다.
“너야말로 경거망동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카를로스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척 봐도 그의 기사들과 메리쉬 사이에 존재하는 실력의 차이는 엄청났다.
하긴, 메리쉬를 제외하면 이곳에서 가장 강한 것이 카를로스였다. 그런 그조차 메리쉬를 이기지 못할 텐데 기사들이라고 다를 리가 없었다.
“베릴이 내 손에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을 텐데.”
그러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저열한 협박을 하는 것은.
그리고 카를로스의 예상대로, 저 자의 역린은 베를리아가 맞았다. 그가 말을 꺼내자마자 메리쉬가 반응을 보이며 모든 행동을 멈추었으니까.
“그래서, 나를 죽이려고 저 많은 기사를 여기까지 끌고 왔나?”
메리쉬가 제자리에 선 채로 카를로스를 쳐다보며 비웃었다.
“누가 보면 성지에서 전쟁이라도 나는 줄 알겠군.”
성지는 언제나 평온했다. 오는 길에는 그 흔한 도적조차 없었다. 그런 곳에 있기에 카를로스가 데려온 기사들의 수는 확실히 지나치게 많았다.
메리쉬의 조롱에 카를로스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 많은 기사에게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오만한 메리쉬와, 메리쉬 하나를 죽이겠다고 기사들을 대동한 카를로스 중 누가 더 약한지 선명하게 드러난 셈이었다.
“곧 죽을 놈이 말이 많아.”
카를로스가 미간을 팍 찌푸린 채로 기사단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기사들이 메리쉬에게로 달려들었다.
***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야…! 너희들은 대체 무엇을 하는 것이냐!”
기사들과 메리쉬의 대치를 한참 동안 지켜보고 있던 카를로스가 마침내 인내심의 끝에 달해 외쳤다.
“그… 그게.”
기사들과 함께 카를로스에게 덤벼들던 황태자의 기사단 중, 부기사단장이 당황한 얼굴로 제 주군을 돌아봤다. 그도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 터였다.
“오합지졸이 따로 없군.”
그것을 보며 메리쉬가 단 한 마디로 카를로스의 기사들을 평했다.
그 말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미 검을 겨눈 지 약 한 시간이 지난 무렵이었다. 그런데 카를로스의 기사들은 그 긴 시간동안, 홀로 그들을 상대하던 메리쉬에게 단 하나의 상처도 남기지 못했다.
그뿐인가? 기사들은 태반이 숨을 헉헉거리고 있는 반면에 메리쉬는 지나치게 멀쩡했다. 누군가 본다면 기사들이 메리쉬는 쏙 빼놓고 저들끼리 다툰 줄 알 터였다.
“무… 무언가 이상합니다, 황태자 전하!”
기사 중 하나가 참다못해 말했다. 정말이지 이상했다.
기사들의 대다수가 세 번 중에 두 번은 헛손질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검은 툭하면 원래의 궤적을 어긋났고 발을 삐끗하는 일도 일쑤였다. 게다가 겨우 한 시간 정도 움직였을 뿐인데 숨을 이토록 몰아쉬는 것 또한 기사들에게는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아주 멀쩡한 상태로 검을 겨루어도 그들의 실력은 메리쉬에게 미치지 못했다. 그러니 기사들의 공격이 메리쉬에게 먹힐 리가 없었다.
‘베릴.’
메리쉬는 침착하게 기사들을 둘러봤다.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기운. 그것은 흑마법이었다.
메리쉬는 베를리아가 자신을 위해서 남겨 둔 안배에 입술을 꾹 다물었다. 자신은 중요할 때마다 그녀를 지키지 못했는데, 베를리아는 이미 자신을 지키기 위한 준비를 모두 해 놨다는 게 메리쉬를 울컥하게 만들었다.
이 정도로 많은 이에게 흑마법을 걸어 놓을 정도라면 베를리아가 상당히 무리했을 터였다. 그리고 아마도 이는 베를리아가 에를니아의 수작에 함락당하는 일에 큰 몫을 했을 것이었다.
베를리아가 이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스스로를 지키는 대신 메리쉬를 지키는 것을 선택했다.
‘베릴.’
메리쉬가 끝없이 베를리아의 이름을 속으로 되뇄다. 황태자에게로 향하며 제게 등을 돌린 그녀의 모습에 술렁거렸던 마음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심장이 다른 의미로 가쁘게 뛰고 있었다.
베를리아가 사랑하는 것은 자신이었다. 그것을 재차 확인한 메리쉬가 선언했다.
“네 기사들은 절대 날 죽이지 못해, 카를로스 에덴버, 나는 반드시 여기서 살아남아 베릴에게로 돌아갈 테니까.”
베를리아가 자신을 원하는 한, 메리쉬는 절대로 죽어 줄 생각 따위 없었다.
“네놈 따위가 어딜….”
메리쉬의 두 눈이 생생하게 살아났다. 그것을 확인한 카를로스가 아득 이를 갈았다.
베를리아가 제게 올 때까지만 해도 좌절하던 얼굴이었다. 그런데 무엇이 저놈을 다시 살아나게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카를로스가 그에 대하여 아주 확실한 불쾌감을 느낀다는 점이었다.
“돌아가? 누구 멋대로.”
스릉-
기사들과 메리쉬의 대치를 지켜만 보던 카를로스가 검을 빼 들었다. 그가 기사들의 틈에서 앞으로 나섰다. 카를로스의 검이 메리쉬에게 겨눠졌다.
“베를리아 리들턴은 내 것이다. 네놈 따위가 아니라!”
까강! 검이 부딪히며 검날이 갈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를로스의 검을 제 검으로 막아낸 메리쉬가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쳐다봤다.
“네놈이 그러니, 베릴을 가질 수 없는 거다.”
메리쉬가 입매를 비틀며 말했다. 베를리아는 누군가가 멋대로 소유하고 휘두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그녀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베를리아가 메리쉬에게 자신을 기꺼이 내준 덕이었다. 그는 그것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카를로스 에덴버는 그 사실을 영원토록 모를 터였다.
“네놈만 죽으면 돼…!”
카를로스의 공격이 무차별적으로 메리쉬에게 쏟아졌다. 메리쉬는 능숙하게 그 공격들을 모두 막아내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는 카를로스를 공격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돌연 깨달은 카를로스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내걸렸다.
“네놈, 날 공격할 수 없군. 그렇지?”
메리쉬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으나 그 침묵이 곧 답이었다.
카를로스와 메리쉬 모두 알고 있었다. 카를로스의 목에는 베를리아의 안위까지 함께 달려 있었다. 그가 죽으면… 그녀도 저주로 인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네놈이 먼저 지치는지, 내가 먼저 지치는지 보면 알겠지.”
카를로스가 확신에 차 더욱 검을 거세게 휘둘렀다. 끝없이 공격하는 쪽과 끝없이 방어하는 쪽. 그 구분이 너무나도 명확한 공방이 오고 갔다.
카를로스는 모르겠지만, 에를니아의 축복 덕에 그에게는 베를리아의 저주도 통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결국 자잘한 상처가 늘어나는 것은 메리쉬뿐이었다.
그 순간 대치중인 두 남자의 사이로 베를리아의 목소리가 뚫고 들어왔다.
“멜!”
베를리아는 막 뛰어온 듯 벅찬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녀를 데려온 성녀가 그 뒤로 다급하게 따라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베를리아가 황태자의 기사를 세뇌하여 메리쉬가 있는 장소를 알아낸 뒤 곧바로 달려온 터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 와중에 그녀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채로 나온 부름이었다. 베를리아는 위험한 상황에서 제 머릿속을 꽉 채운 상대가 메리쉬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베를리아!”
베를리아의 입에서 나온 이름이 제가 아닌 메리쉬라는 것을 확인한 카를로스가 분노에 차 소리쳤다.
“너희 둘 중 하나는 죽어 줘야겠다.”
그리고 동시에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베를리아가 목소리의 주인이 에를니아임을 인지하기도 전에, 그녀의 온몸에 붉은 낙인이 타올랐다.
“아악…!”
“베릴!”
강한 고통이 베를리아를 지배했다. 메리쉬가 모든 것을 잊은 채로 그녀에게로 내달렸다.
푹.
그리고- 검이 생살을 가르는 소리가 선명하게 그 공간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