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기만의 끝(7)
고대 마법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었다. 명확히 말하자면 금기되었다고 알려진 흑마법도 ‘고대 마법’이었다. 단, 오랜 옛날에 사람을 해치는 마법이라 하여 마법사들이 퇴출한 마법이었지만.
그래서 흑마법을 두고는 ‘고대 마법’이라고 잘 일컫지 않았다. 지금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고대 마법이라는 명칭을 들으면 떠올리는 것은 마법이 가장 찬란했던, 마도 시대의 마법이었다.
그러나 네멘 리들턴만큼은 유독 흑마법을 ‘고대 마법’이라 일컬었었다.
‘흑마법의 해석 방법과, 고대 마법의 해석 방법이 똑같아…?’
고대 마도서를 보고서야 베를리아는 네멘이 그렇게 말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마법의 해석 방법이 똑같다는 것, 그것은 즉… 기원이 같음을 의미했다.
‘다른 언어 같지만, 자세히 보면….’
쓰인 언어의 모양은 달랐으나 형태에 미세한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고대 마법과 흑마법 중 한쪽 언어를 제대로 알기만 한다면,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다른 한쪽까지 충분히 해석할 수 있을 터였다.
흑마법도 고대 마도서도 아무도 제대로 접해 본 적이 없을 터였다. 그러니 이에 대해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이거라면 흑마법이 다른 마법들보다 강력한 것도 이해가 가.’
그러나 몇 가지 의문이 남아 있었다. 네멘이 아무리 뛰어났다고 해도, 어떻게 황궁 깊숙이 숨겨졌을 고대 마도서에까지 접근했단 말인가? 게다가 흑마법의 정체가 마법사들이 숭상하는 그 고대 마법 중 하나라면 도대체 왜 흑마법이 그토록 그른 것으로 매도되었는가?
의문투성이였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베를리아에게 달리 궁금증을 풀어낼 방법이 없었다.
므시아로부터 따로 연락이 없는 것을 보니 자신이 이곳에 데려온 므시아의 사람이라고는 메리쉬뿐인 듯했고, 그런 그를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무렇지 않게 두고 와 버렸다. 그런 와중에 그녀는 나갈 수 없었으니 무언가를 알아낼 수 있을 턱이 없었다.
‘…답답해.’
베를리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카를로스와 기껏 좋게 풀렸는데 다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얌전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지만 무언가를 스스로 할 수 없는 상태는 그녀에게 매우 익숙하지 않았고 아주 불편했다.
‘반드시 여기 있어야 해, 베릴.’
그러나 카를로스가 신신당부한 탓에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수도 없었다.
‘왜 이번에는 카를이 나를 시키지 않는 거지?’
그러고 보면 이상했다. 카를로스는 항상 전면에 나서는 법이 없었다. 어떤 일이 있을 때 앞장서는 것은 대부분 베를리아의 역할이었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달랐다. 카를로스는 베를리아가 가만히 있길 바랐다. 그의 말이라면 무조건 들어주는 그녀와 관련하여 대체 무엇이 걱정되길래?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미쳤나 봐.”
그리고 순간, 베를리아는 자신이 카를로스를 의심했다는 사실에 대단히 놀랐다. 감히, 어떻게, 그녀가- 그를 의심한다는 말인가.
그러나 베를리아는 스스로를 책한 것과 달리 좀처럼 진정하지 못했다. 그녀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을 서성거렸다.
카를로스가 자신 몰래 해야 할 일. 베를리아는 그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너한테는 나만 있으면 돼. 그렇지, 베릴?’
지난밤 새로 배정받은 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카를로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응, 카를.’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던 자신까지도.
기분이 이상했다. 베를리아가 한숨을 삼켰다. 제가 한 행동인데도 그 당시 일이 무언가 꿈결처럼 몽롱하게 느껴졌다. 꼭 다른 사람이 제 몸을 조종했던 것만 같았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겠지만.’
베를리아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어쩌면, 어쩌면- 무언가 아주 중요한 것을 잊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게 무엇인지 찾을 수 없었다.
‘잊으렴. 네게 필요 없는 것이란다.’
지끈, 머리가 울렸다. 자꾸만 누군가가 베를리아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그것은 제 목소리 같기도, 전혀 다른 타인의 목소리 같기도 했다.
뚜렷한 의식이 다시 멀어지려던 찰나에 고대 마도서의 필사본이 들어온 것은 우연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언어를 눈에 담는 순간 머리가 맑아진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닐 터였다.
‘태워.’
그리고 맑아진 머릿속에 방금 전보다 또렷해진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지금까지 제 목소리인지 헷갈려했던 게 아니었다. 누가 들어도, 그녀의 목소리와 완전히 달랐으니까.
베를리아가 빠르게 필사본을 집어 들었다. 목소리가 시키는 대로 하면 안 된다고 느낀 것은 본능적인 일이었다.
‘진실을….’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장 태워!’
삐익- 커다란 외침과 함께 베를리아의 귀에서 이명이 울렸다. 그것이 아주 짧게 나타난 다른 음성을 덮어 버렸다.
‘태워, 태우라고!’
신경질적이고 공격적인 목소리가 베를리아의 뇌리를 헤집어 놨다. 바늘로 찌르는 듯이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짜 주제에,’
‘태워 버려! 어떻게 지웠는데, 그대로 사라져 버리란 말이야!’
목소리들이 베를리아의 머릿속에서 싸우고 있었다. 삐이익- 삐익- 삑- 이명이 연달아 울리며 귓가를 때렸다. 소리가 온몸을 돌아다니며 웅웅거렸다. 속이 메슥거리고 식은땀이 그녀를 적셨다.
베를리아의 안에서 어떤 존재들이 주도권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 불안정했다.
“다….”
베를리아가 중얼거렸다.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온 말이었다.
“다, 꺼져…!”
“베릴, 베릴?! 괜찮아요?!”
그때, 누군가 베를리아의 손을 잡아 왔다. 상대가 그녀의 손에 무언가를 쥐여 주는 순간 머리가 맑아졌다. 그제야 숨이 제대로 쉬어졌다.
“천천히, 천천히 심호흡해요.”
베를리아의 등을 쓸어 주는 손은 작았다. 그녀의 가까이서 조곤조곤 말하는 목소리가 상냥했다.
“…앤지? 여기에 어떻게?”
마침내 호흡이 고르게 돌아오자 고개를 든 베를리아의 눈에 들어온 사람은 안젤라였다.
“아니… 성녀, 당신이 왜 여기.”
베를리아가 미간을 다급히 찌푸리며 안젤라의 손을 밀어냈다. 방금 성녀가 자신을 애칭으로 불렀는데도 불쾌하지 않았단 것과, 자신 또한 자연스럽게 그녀를 애칭으로 칭했다는 것, 그리고 성녀의 손에 제게 닿았는데도 세게 쳐낼 수 없다는 것, 모두 베를리아를 당혹스럽게 했다.
“리리카가 보내서 왔어요. 카를이 아직 나와의 관계를 어떻게 할지 밝히지 않은 시점이니, 여기로 베를리아를 도우러 올 수 있는 건 나뿐이라고요.”
리리카의 판단은 옳았다. 안젤라는 성녀인만큼 이곳이 성지의 신전이라고 할지라도 그 내부에 있는 비밀 통로를 모두 알고 있었다. 베를리아가 어디 있는지만 알면 안젤라가 접근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베를리아의 거처를 아는 것 또한 어렵지 않았다. 지난 번 베를리아가 지하 감옥에 갇혔을 때, 그녀를 찾지 못했던 끔찍함을 경험 삼아 메리쉬가 미리 조처해 둔 덕이었다.
게다가 카를로스는 리리카의 존재에 대해서도, 안젤라가 베를리아에게 도움을 요청한 사실에 관해서도 몰랐다. 그러니 메리쉬를 감시하는 동안 리리카가 안젤라에게 접근하기도 쉬웠다. 그로 인해 안젤라는 쉽게 베를리아가 있는 곳까지 올 수 있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성녀, 당신이 왜 나를 돕지? 리리카라니, 난 모르는 사람이야.”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던 사람이 눈앞에 갑자기 나타난 탓에, 베를리아가 한 발 늦게 반문했다. 그러고 보니 방문은 멀쩡히 닫혀 있었다.
베를리아가 고개를 휙휙 돌려보자 방의 벽 한구석이 문처럼 변해 열린 게 눈에 띄었다.
“…정말 신께서, 베릴에게 손을 쓰셨군요.”
방금 베를리아와 닿음으로써, 그녀에게 남아 있는 강력한 신성력을 발견한 안젤라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제가 지금까지 믿고 따라오던 신이 이런 짓을 했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으나 눈앞의 베를리아가 그 증거였다.
베를리아가 카를로스를 미워한 것은 진짜였다. 안젤라는 그것을 알았다. 그녀는 카를로스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마치 모두 잊어버린 사람처럼- 얌전히, 이전과 같이 카를로스의 인형 노릇을 하고 있었다. 인간의 마음과 생각, 기억을 모두 좌지우지하는 일. 그것은 신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돌아가. 네가 카를과 사이가 틀어졌다고 해서, 나와 카를의 사이를 방해할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마. 알아들어?”
베를리아가 습관적으로 적대적인 말을 내뱉었다. 그러나 말투만 사나웠을 뿐, 그녀의 말에는 진실로 적의가 서려 있지 않았다.
사실 베를리아도 그 점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카를로스가 있으라고 한 곳에 몰래 빠져나간다면 그는 엄청나게 화를 낼 것이 분명했다. 그것을 안젤라도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베를리아를 빼내려 찾아 온 터였다. 그렇다면 안젤라는 방해물이 맞는데도 화가 나지 않았다.
정말이지, 정말이지… 이상한 일이었다. 이상한 일투성이였다.
“리리카가 베릴이 저를 따라오는 것을 거부하면 이렇게 말하라더군요.”
짧게 한숨을 삼킨 안젤라가 말을 이었다.
“메리쉬가 위험하다고.”
순간 베를리아가 크게 움찔했다. 뇌리를 거치지 않고 몸이 먼저 반응했다. 그녀는 어쩐지 갑자기 드는 초조함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멜은 강해. 그런 그를 누가 위협….”
자신이 메리쉬의 애칭을 자연스레 입에 담았다는 것도 모른 채로 반박하던 베를리아가 멈칫했다.
메리쉬를 위협할 정도로 그를 싫어하고, 그만큼의 권력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바로 여기에.
그리고 지금 그 사람은 베를리아를 이곳에서 나오지 못하게 한 채로 나가 버렸다.
“이상하지 않아요? 왜 지금까지 그 당연한 사실을 베릴이 못 떠올렸는지.”
안젤라는 마치 베를리아가 방금 깨달은 게 무엇인지 알고 있는 듯이 말했다. 베를리아는 더는 아무 반박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스스로의 상태가 너무 이상했으니까.
“…안내해.”
결국, 베를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앞의 성녀를 신뢰하는 것도, 지금 당장 불분명해 보이는 제 판단을 믿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메리쉬가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사실. 그것이 베를리아의 발걸음을 떠밀고 있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