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기만의 끝(6)
베를리아는 어쩐지 굳어 버렸다. 자신이 마냥 기쁘지 않다는 사실이 당황스러웠다.
“앤지…. 아니, 성녀는?”
자신이 언제부터 성녀를 애칭으로 불렀던가. 베를리아의 표정이 싸해졌다.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의 연속이었다. 제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의구심이 불어났다.
“베릴.”
그 생각을 카를로스가 끊어 놨다. 그가 베를리아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네가 내 황후가 된다면, 안젤라와는 당연하게 헤어져야겠지.”
참으로 달콤한 말이었다. 그토록 베를리아가 바라 왔던 말이기도 했다.
“베릴, 당신이 진짜로 바라는 게 겨우 그것인가요?”
뒤에서 메리쉬의 목소리가 들리지만 않았더라면 그대로 홀린 듯이 넘어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뭐?”
베를리아가 메리쉬를 돌아봤다. 그의 말이 왜 비수처럼 꽂혀 들어오는지 알 수 없었다.
카를로스의 곁에 있는 것. 평생 동안 목표로 해 온 그것 외에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어가 있단 말인가.
“다시 생각해 봐요, 베릴. 당신에게 카를로스 에덴버는 필요 없어요.”
메리쉬는 단정 짓고 있었다. 그 말에 너무 확신이 담겨 있어서, 베를리아를 흔들리게 할 만큼.
“나는 네가 필요해, 베릴.”
“베릴, 절 봐요.”
카를로스와 메리쉬의 목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베릴, 내 황후가 돼.”
“사랑해요, 베릴.”
웅웅 두 가지 다른 음성이 베를리아의 머릿속을 울려댔다. 찌릿, 날카로운 것으로 쑤시는 듯한 감각이 그녀의 뇌를 찌르고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베릴.”
“베릴….”
“그만…!”
결국 베를리아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숨이 차도록 두통이 강해져서 도저히 평정심을 지킬 수가 없었다. 괴로웠다. 도대체 뭐가 이렇게 괴로운지 알 수 없어서 가슴이 답답했다.
‘아이야, 무얼 고민하느냐.’
그리고 순간 베를리아의 눈동자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낯선 목소리였다.
‘나는 카를을 사랑해.’
아니다. 자신의 목소리였다. 일순 들었던 의구심이 불 위에 물을 끼얹은 듯이 사그라들었다. 베를리아가 손을 뻗었다.
“네 황후가 될게, 카를.”
그래, 자신은 카를로스를 사랑한다. 무얼 망설일까. 베를리아가 웃었다. 그녀는 아주 당연하게 메리쉬의 쪽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메리쉬는 그대로 굳은 채 베를리아를 보며 서 있었다. 누가 봐도 지금 그녀의 상태는 이상했다.
‘이딴 수작을…!’
메리쉬가 이를 아득 갈았다. 에를니아가 베를리아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이 분명했다.
메리쉬가 자리에서 휙 돌아섰다. 베를리아를 카를로스가 있는 곳에 두고 가는 것이 대단히 탐탁지 않았지만, 원하는 대로 그녀를 손에 넣은 그가 지금 당장 베를리아를 어찌할 확률은 낮았다. 그러니 적어도 그녀에게 위협이 되지는 않으리라.
그 틈을 타서 메리쉬는 베를리아가 원래대로 돌아오게 할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비록- 에를니아의 수작에 이가 득득 갈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
“…결국 에를니아가 손을 썼군요.”
리리카는 마치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는 것처럼 말했다. 그는 늘 이런 식이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크게 동요하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메리쉬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매번 안다는 듯이 말하는데… 그럴 거였으면 일이 벌어지기 전에 막아야 했던 게 아닌가?”
아무것도 못 한 것은 메리쉬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비교적 태연해 보이는 리리카를 보고서도 참는 이유는 그것뿐이었다.
“…막을 수 있었다면 당신의 말대로 일찍이 막았겠죠.”
리리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는 마치 무언가에 익숙하게 체념한 얼굴이었다.
“직물을 짤 때, 이미 연결된 실타래의 색을 바꾸려면 어떻게 하는 줄 알아요?”
리리카가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메리쉬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살포시 미간을 찌푸렸다.
“그 실을 끊고, 다른 실을 연결하죠.”
그러거나 말거나 리리카는 말을 이었다.
“사람의 운명도 그래요. 원하는 대로, 제멋대로 바꾸려고 하면 탈이 나는 거죠. 실과 달리, 끊어진 인간의 운명은 다시 이을 수 없는 법이잖아요?”
“…그럼 어쩌라는 거지? 그렇다고 베릴을 저대로 내버려 두라는 건가?”
메리쉬가 날카롭게 물었다. 리리카의 말에 의하면 베를리아가 저렇게 행동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수순이었다.
이미 정해진 운명 앞에 굴복하는 것만이 할 수 없다면, 베를리아를 포기하라는 말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나는 그렇게 안 해.”
메리쉬가 단호하게 말했다. 설령 상대가 신이라 할지라도 그는 이대로 가만히 있을 생각 따위 없었다.
메리쉬의 신은, 세상은, 유일은 에를니아가 아니라 베를리아였으니까.
“네가 포기할 거라면 나 혼자 알아서 하도록 하지.”
“당신이 무얼할 수 있어서요?”
“베릴의 저주를 내게 가져오고, 카를로스 에덴버의 숨을 끊어 버릴 거다.”
“그러다가 당신이 죽을 수도 있어요.”
“그 작자의 손에 베릴이 놀아나게 만드느니, 내 목숨을 바치는 게 나아.”
메리쉬에게는 일말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세상에 영원토록 살고 싶었으나… 그게 안 된다면 그가 없더라도 그의 세상은 존재해야만 했다.
“그럴 줄 알았어요.”
리리카가 돌연 홀가분한 웃음을 흘렸다. 그의 시선에 메리쉬에 대한 신뢰가 느껴졌다. 어디서 왔는지, 왜 있는지 모를.
메리쉬는 미간을 찌푸렸으나 어떤 직감이 들었다. 지금껏 그래 왔듯이 리리카는 절대로 대답하지 않으리라.
“걱정하지 마요, 손을 놓자는 건 아니니까.”
리리카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덧붙였다. 그의 손이 척, 메리쉬를 가리켰다.
“당신이 있는 이상, 베를리아 양은 돌아올 거예요.”
리리카는 여전히, 광대처럼 웃고 있었다.
***
베를리아는 옮겨진 자신의 숙소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카를로스가 웬만하면 밖으로 나가지 않길 바랐기 때문에, 그의 뜻대로 하다 보니 이 조용한 성지에서는 딱히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분이… 이상해.’
베를리아가 초점 없는 시선으로 방을 둘러봤다. 아무 의문도, 아무 감정도 들지 않았다. 그냥, 그냥 무언가 좀 이상할 뿐이었다.
자신이 카를로스의 곁에 있고, 카를로스가 제 곁에 있고. 그 모든 당연한 일들이 이루어졌으니 홀가분하게 기뻐해야만 했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카를로스가 하자고 하니 그렇게 할 뿐.
그때, 베를리아가 가지고 있던 통신 아티팩트가 울렸다.
“베를리아…! 이렇게 연락을 안 받으면 어떻게 해!”
그 연락을 승인하자마자 초조한 얼굴을 한 리암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베를리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불렀다.
“리암…?”
“네가 먼저 멋대로 일을 시켜놓고 이러기….”
“잠깐, 잠깐만, 리암.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네게 일을 시켰다고?”
베를리아가 살포시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자신이 리암에게 일을 시켰다니. 그녀는 지금까지 그들의 부탁을 들어줬으면 들어줬지, 어떠한 일을 강제로 하게 만든 적은 없었다.
그런데 리암의 말은 마치 베를리아가 그에게 ‘명령’이라도 한 듯했다. 그러니 당황하지 않을 수가.
“내가 네게 그럴 리가 없잖아. 리암, 너는 내 친군데….”
“…뭐?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
어리둥절함이 드러난 베를리아의 표정에 리암이 멈칫했다. 그는 뒤늦게 그녀가 자신을 ‘리암’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베를리아가 변한 이후로 그녀는 쭉 그를 ‘리암 로베르’라고 지칭했다. 게다가 리암의 이름을 담는 음성에는 어떠한 악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전처럼, 베를리아가 방금 한 말대로 마치 그를 친구인 듯 대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베릴?”
“응, 리암.”
리암이 시험하듯이 베를리아의 애칭을 입에 담았다. 그러자 베를리아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놀라 굳어 버렸다.
오늘의 베를리아는 어딘가 이상했다.
“내가 네게 강제로 시킨 일이라니, 그게 대체 뭐야?”
베를리아가 물었다. 지금껏 자신이 벌인 적 없던 일이었다. 그래서 의문이 들었다.
대체 언제, 왜 리암에게 일방적이었을 ‘명령’을 했단 말인가.
“…아무것도 아냐, 내가 잠시 착각을….”
“리암.”
리암의 변명에 베를리아가 그를 불렀다. 리암과 함께 해 온 세월이 얼마인데, 저런 어설픈 말 돌리기가 통할 리가 없었다.
리암이 머뭇거렸다. 고대 마법에 관한 것을 전해 주는 것은 분명 그의 손해였다. 만약 베를리아가 자신에게 시켰던 일에 대해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는 차라리 이에 관하여 아예 입을 다물고 없던 일로 하는 것이 훨씬 이로웠다.
“리암, 네가 여기서 거짓말을 한다고 해도 내가 알아낼 방법이 많다는 건 알잖아.”
베를리아가 조곤조곤하게 리암을 설득했다. 그녀는 망설이는 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하여 달래듯이 한 말이었으나 리암은 다른 것을 떠올렸다.
‘난 필요하다면 네가 아니어도 어떤 식으로든 마도서를 볼 거야.’
리암이 떠올린 것은 지난날 베를리아가 그에게 했던 협박이었다.
리암의 안색이 하얘졌다. 베를리아에게 도대체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그녀가 굳이 고대 마법에 관해서 알아볼 거라면 차라리 빨리 넘겨줘 버리는 편이 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로는 못 해. 지금 바로 전해 줄 테니까- 그냥 네 눈으로 봐.”
그 말과 함께 통신이 뚝 끊겼다. 베를리아가 그런 리암의 반응에 당황에 빠짐과 동시에 통신 아티팩트가 우웅 울렸다. 아티팩트를 통한 전달 마법이었다. 그녀가 아티팩트에 흑마법을 불어넣자 아티팩트에서 서류 뭉치가 튀어나왔다.
“이걸 내가 왜 부탁을…?”
서류의 맨 앞을 본 베를리아의 얼굴이 굳었다. 그것은 황궁 내부에나 있어야 할법한 고대 마도서의 필사본이었다. 말 그대로 자신이 황실 마법부의 수장인 리암에게 강제로 시킬 만한 그런 것이었다.
그게 아니고서야- 고대 마도서를 외부로 반출할 수는 없으니까.
베를리아가 망설이는 손으로 서류를 집어 들어 그것을 한 장 한 장 넘겨봤다. 그리고 점차 그녀의 얼굴이 혼란으로 물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