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깽판치는악녀님 (102)화 (102/148)

102화. 기만의 끝(5)


 

아무리 베를리아가 전날 새벽에 잠이 들었다고 해도 일어나는 게 너무 늦었다. 의아함을 느낀 메리쉬가 그녀의 방문을 열려고 했다.

“베릴?”

철컥, 철컥.

그러나 문이 열리지 않았다. 안에서 굳게 잠긴 것처럼.

메리쉬의 얼굴이 굳었다. 그가 곧장 검을 빼 들었다. 신전의 모든 것은 강한 신성력으로 보호되고 있었기에 쉽게 벨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메리쉬는 검에 망설임 없이 마력을 실었다.

후웅!

검은 기운이 날아가며 단번에 문을 베었다. 쿠궁. 깔끔하게 잘린 문이 그대로 앞으로 넘어졌다. 메리쉬가 그것을 밟고 곧바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베릴, 괜찮…!”

그러나 메리쉬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방 안에서 베를리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카를로스를 찾아가야 해.’

베를리아의 머릿속에서 누군가 끊임없이 속삭였다. 그녀는 그 음성이 원하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몽롱하게 풀린 눈동자는 제가 어디를 향하는지에 대한 의문조차 없었다.

그저 너무 당연했다. 카를로스에게로 가는 것이.

“…베릴?”

카를로스는 눈을 깜박였다. 이른 아침부터 자신을 찾아온 베를리아의 모습을 믿을 수 없었다.

“카를.”

베를리아가 달콤하게 웃었다. 그녀가 카를로스에게로 거리낌 없이 다가갔다. 그녀의 눈동자에 빛이 돌아왔다. 주변의 낯선 풍경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카를로스가 제 앞에 있다는 것만이 중요했을 뿐.

“왜 그렇게 놀란 표정이야?”

베를리아는 마치 카를로스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카를로스의 입장에서는 매우 급작스러운 태도 변화였으니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네가 날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애써 마음을 가다듬은 카를로스가 잠시 후 입을 열었다. 그러자 베를리아는 도리어 그런 그를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내가 네 곁에 있는 건 당연한 거잖아?”

“…그게 당연하다고?”

베를리아는 그간 있었던 일을 모두 잊어버린 것처럼 굴었다. 카를로스가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베를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래야지. 우리는 항상 함께였잖아.”

그녀가 거리낌 없이 카를로스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의 태도가 조금 의아하기는 했으나, 베를리아는 어쩐지 그런 이상한 점들은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성녀만 없었다면- 애초에 우리가 다툴 일도 없었을 거야, 카를.”

카를로스의 눈가가 떨려 왔다. 근래 들어 베를리아가 이렇게 말할 만한 ‘다툼’을 한 적이 있던가? 그녀에게 보이는 자신의 분노, 그녀가 그에게 보이는 증오와 경멸은 겨우 ‘다툼’ 따위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네게 필요한 것을 돌려주마.’

카를로스의 머릿속에 지난밤 꿈에서 들었던 음성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신탁 때 들었던 목소리… 에를니아였다.

“베릴, 너… 어제 뭘 했지?”

카를로스가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어쩌면 그에게 기회가 온 것일지도 몰랐다.

“나 진짜 어제는 아무것도 안 했어…! 네가 나더러 성녀에게 위협을 가했다며 화내고 가 버려서 네 말대로 저택 안에서 얌전히 있었단 말야…!”

베를리아가 진실로 억울하다는 듯이 외쳤다. 그녀는 제가 카를로스에게 의심이라도 받았다는 것처럼 분한 얼굴이었다.

“성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베를리아가 다급하게 변명하듯 말을 이었다. 그 말을 끊고, 카를로스가 그녀를 불렀다.

“베릴.”

카를로스는 웃고 있었다.

확실했다. 베를리아는 그동안의 일을 전부 잊어버렸다. 그것도- 카를로스가 그녀를 죽이려고 했던 것까지 모두.

‘앤지, 나와 결혼해 주겠어?’

지난 밤 자신의 청혼에 굳어 버리던 안젤라가 생각났다. 카를로스도 모를 수 없었다.

안젤라는 자신과의 결혼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너를 위해 살 수 없어, 카를!’

안젤라가 직접 했던 말을 카를로스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도 알았다. 누구라도 타인을 위해 살 수는 없었다.

“넌 나를 위해서 어디까지 할 수 있어?”

“알잖아, 네가 원한다면 난 모든 해.”

눈앞의 이 한 사람을 빼고는.

베를리아의 대답에 카를로스가 눈을 번뜩였다. 그가 배부른 맹수처럼 더더욱 짙게 미소 지었다.

어차피 안젤라가 자신의 청혼을 거절하여 틀어질지도 모르는데 좋은 기회를 놓칠 필요 없지 않은가.

“베릴, 내 황비가….”

“베릴!”

그 순간 카를로스의 말을 다른 사내의 목소리가 끊어 놓았다. 제 애칭을 부르는 음성에 베를리아의 고개가 그쪽으로 홱 돌아갔다. 메리쉬가 저 멀리서 달려오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메리쉬?”

베를리아는 자신의 애칭을 부른 사람이 메리쉬라는 것에 멈칫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가 알기로 메리쉬와 자신은 그럴 사이가 아니었으니까.

“왜 여기 있는 거예요.”

“물러나, 베릴.”

메리쉬가 더 가까이 베를리아에게로 다가가자, 카를로스가 그녀를 끌어당겨 제 뒤로 숨겼다. 그 행동에 메리쉬의 표정이 사납게 돌변했다.

“지금 감히 누구에게 손을 대는….”

그러나 그것을 베를리아가 저지했다. 그녀가 늘 카를로스를 지켜 왔듯이,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너야말로 감히 누구에게 이를 드러내는 거야.”

“…베릴?”

베를리아의 목소리가 고압적이었다. 그 적개심 어린 어조에 메리쉬가 멈칫하여 그녀를 돌아봤다.

“메리쉬, 내 그림자로 살려거든- 카를에게 두 번 다시는 이런 태도를 보이지 말라고 내가 말했을 텐데.”

그림자. 연인이 아니라 그림자였다. 자신을 지칭하는 말에 메리쉬의 표정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그는 그제야 베를리아가 자신을 애칭이 아닌 이름으로 부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베릴, 어째서…!”

어째서 갑자기 이러시는가. 돌변한 제 연인의 모습에 메리쉬가 격앙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메리쉬, 네가 언제부터 내 말에 토를 달았지?”

그러나 그조차 베를리아는 들어주지 않았다. 그것은 선이었다. 연인이 아니라, 주인과 그림자 사이임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선.

메리쉬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그는 주춤한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메리쉬가 입술을 잘근 깨물고 두 눈을 꾹 감았다가 뜨더니 도저히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그가 읊조렸다.

“대체 제게 왜 이리 잔인하게 구시는 겁니까, 베릴….”

그것은 명확히 상처받은 자의 음성이었다. 순간 베를리아가 멈칫했다.

이상하게, 상처받은 메리쉬를 보고 있자니 심장이 저릿저릿했다. 그녀가 술렁거리는 제 마음에 당황해 할 말을 잃고 메리쉬를 빤히 바라봤다.

“베릴, 뭐 하는 거야.”

모든 것을 멈춘 채 가만히 서 있는 베를리아를 보며 카를로스가 팍 미간을 찌푸리고 채근했다. 그의 눈매가 의심으로 가늘어졌다.

모든 것을 다 잊어버렸으니 메리쉬도 그 안에 포함될 줄 알았다. 그런데 혹시 그것이 아니었던가? 카를로스의 두 눈에 음습한 감정이 맴돌았다.

“…아, 미안. 카를. 메리쉬, 넌 나랑 나중에 이야기해.”

베를리아가 마법에서 깨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움찔했다. 카를로스는 그제야 자신을 돌아보는 그녀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메리쉬를 지금 당장 벌하지 않고 나중으로 넘겨 버리는 것까지도.

“굳이 나중으로 미룰 것이 있나?”

카를로스가 삐뚜름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마무리되려는 상황을 끊어 놓았다.

“네 수하인데, 잘못하면 네가 벌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카를로스가 한 발짝 더 앞으로 나섰다. 그는 이 기회에 메리쉬를 베를리아에게서 완전히 떼어 놓고 싶었다.

“아니, 어차피 내게 저지른 무례이니 내가 벌하도록 하지. 그래도 되겠지, 베릴?”

이것은 일종의 시험이었다. 베를리아의 기억과 함께 메리쉬에 대한 마음까지도 없어졌음을 확인하기 위한.

“…그건.”

그러나 베를리아에게서는 곧바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카를로스가 짜증스레 그녀를 재촉했다.

“내가 원하면 뭐든 하겠다면서… 설마 이것도 안 된다는 건 아니겠지, 베릴.”

베를리아가 연신 입술을 달싹였다. 그렇지만 이번에도 그녀의 입에서 카를로스가 원하는 답이 나오는 일은 없었다.

“…메리쉬는 므시아에 있어 중요한 존재야. 아무리 나라도 메리쉬를 아무렇지 않게 처분한다면 므시아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카를….”

한참을 머뭇거린 끝에 결국 베를리아의 입을 통해 나오는 것은 카를로스의 말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변명뿐이었다. 그것을 더 이상 듣기 싫었던 카를로스가 그녀의 말을 끊어 버렸다.

“그만.”

카를로스가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아득, 곧 이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을 할 거면 제대로 할 것이지.”

카를로스가 분을 담아 중얼거렸다. 상대가 신임은 중요하지 않았다. 베를리아의 기억을 지울 거면 마음도 없애 버릴 것이지, 왜 어쭙잖게 일을 처리하여 거슬리는 것을 남겨 두었단 말인가.

카를로스와는 반대로 그 순간 메리쉬의 두 눈에 희망이 맴돌았다. 베를리아가 돌변한 이유에 신이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현재 베를리아의 반응을 보건대, 에를니아의 수작이 완벽히 들어 먹히지 않은 모양이었다.

“베릴.”

그렇지 않더라도 메리쉬는 이전처럼 방관만 할 생각 따위 없었다. 그가 베를리아에게로 성큼 다가갔다.

자신은 베를리아의 것이었고… 그녀는 제 것이었다.

“사랑해요, 베릴.”

메리쉬의 시선은 오직 베를리아에게 향해 있었다. 그는 마치 그 사이에 카를로스가 없는 것처럼 굴었다. 그 목소리가 한없이 절절했다.

순간 베를리아의 몸이 크게 움찔했다. 그녀의 얼굴에 미미한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베를리아는 메리쉬의 그 말에 자신이 흔들렸음을 깨달았다.

‘왜…?’

자신이 사랑하는 것은 카를로스였다. 그런데 왜 메리쉬의 고백에 심장이 떨린단 말인가. 베를리아가 그런 자신의 상태를 믿을 수 없다는 듯 심장 부근을 손으로 문질렀다.

그런 그녀의 반응을 곁에서 지켜보는 카를로스의 얼굴이 더없이 일그러져 있었다.

“베릴, 당신이 내 욕망이고 사랑이며 내 세상이에요, 그러니까….”

또, 베를리아를 빼앗길 수는 없었다. 카를로스가 다급하게 말을 꺼냈다. 일순, 그녀가 한 번 황비의 자리를 거절했었다는 게 생각이 났다.

“베릴, 내 황후가 되도록 해.”

그 순간 메리쉬에게 집중되어 있던 베를리아의 고개가 카를로스의 쪽으로 돌아왔다. 굳어 버린 메리쉬의 표정과, 제게 집중된 베를리아의 얼굴을 바라보며 카를로스가 대단히 만족스레 웃었다.

베를리아 리들턴은 자신의 것이었다. 영원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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