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기만의 끝(4)
‘베를리아 양,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것을 알아요?’
리리카가 뜬금없이 베를리아에게 해 주었던 이야기가 있었다.
‘누구든 그걸 피해갈 수는 없다는 걸, 기억해요.’
그 말은 베를리아에게 한 가지 가설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주신이라 불리는 에를니아도 혼자서 인간의 모든 것을 결정하고 온전히 제멋대로 휘두를 수는 없다는 점, 리리카의 말과 자신의 꿈으로 미루어보아 신이 여럿일지도 모른다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그녀를 휘두르려고 한다는 점.
그 세 가지를 이어 보면 모순이 드러났다.
에를니아가 주신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유일한 이 땅 위의 신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다른 신들이 막아서는 일을 에를니아의 멋대로 결정하여 베를리아를 제멋대로 인형처럼 조종하려 한다? 그게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니 답은 간단했다. 에를니아가 어떠한 ‘대가’를 지고 있다는 것.
‘무한정으로 치를 수 있는 대가가, 대가일 리가 없지.’
끝없이 대가를 견디다 보면 언젠가는 한계가 오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베를리아는 에를니아의 말을 빌리자면 ‘감히’ 신을 시험해 보기로 했다.
에를니아가 할 수 있는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위험하긴 했지만 감수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베를리아의 목숨을 앗거나, 다른 방식으로 그녀를 지배할 수 있었다면 안젤라까지 동원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이왕이면 그 한계를 넘어 버려, 대가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무너져 버리면 더 좋고.’
베를리아가 속내를 감춘 채 말을 이었다. 베를니아가 카를로스에 대한 흉계를 꾸미는 동안, 에를니아의 대처는 늘 한발 늦는 식이었으니 제 속내를 읽을 염려 따위는 하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었다.
“신이 여럿인데 왜 당신 혼자만 유일신 노릇을 하고 있어?”
베를리아의 손이 확 에를니아를 끌어당겼다. 신은 의외의 상황에 당황한 듯 한 가지 말만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럴 리가, 이럴 리가 없는데….”
“당신이 다 배신 때리고 혼자 그 자리를 차지한 거지? 응?”
베를리아가 에를니아를 추궁하듯 물었다. 그 신에 그 핏줄이라고, 지금의 카를로스를 만든 신이 할 짓이야 뻔하다는 생각으로 어림짐작한 것이었다.
“배신이라니, 나는 정당한 내 권리를 찾았을 뿐이야!”
그 순간 에를니아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베를리아가 머릿속을 울리는 고함에 제 귀를 틀어막았다. 방금의 외침에 신의 힘이 담겨 있었는지 그녀의 귀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것쯤은 참을 만했다. 베를리아는 ‘배신’이라는 단어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에를니아를 보며 확신했다.
그것이 에를니아의 역린이었다.
‘신의 힘은 그들을 따르는 믿음에 따라 정해진다. 마침내 황태자와 성녀가 대륙을 통일하니 그리하여 에를니아의 축복이 온 땅에 내리고. 에덴버는 어느 때보다 강대해졌다.’
그녀의 기억 속 소설에 적혀 있던 내용이었다. 만약 그녀가 진짜 ‘베를리아’라면 소설이 아니라, 기억 속의 이야기가 되겠지만.
“모든 신에게 향하는 믿음을 빼앗아서, 당신이 가장 강력해지고 싶었던 거잖아.”
수많은 신이 사라지고, 단 하나의 신만이 남게 되면 사람들의 믿음은 전부 그리로 향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 베를리아가 품는 또 다른 의문이 있었다.
“그런데 당신… 다른 신들이 사라지기 전에, 그 신을 믿던 자들을 어떻게 한 거야?”
다른 신들이 사라져도 세상은 멀쩡한 것으로 보아, 신의 죽음이 곧 인간의 죽음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에를니아를 제외한 신들이 전부 사라졌더라도 그들을 믿던 인간은 남아 있어야 했다.
그리고 신도들이 남아 있었다면, 오직 에를니아만이 유일신이 되지 못했을 터였다. 살아가는 자들의 기록이 대대손손 계속해서 이어졌을 테니까.
그런데 모든 것이 한순간에 증발하기라도 한 것처럼 사라진 것이다. 단 하나의 흔적도 없이… 신도, 그들을 믿던 자들도.
“그러고 보니까 이상하지. 왜 에덴버의 건국 기록은 ‘신의 은총으로 기적처럼 나라가 세워지니’로 끝나는 걸까?”
보통 나라의 건국은 창대하게 기록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녀의 기억 속 현대 세계에서도, 이 세계의 다른 왕국들의 역사도 대부분 그렇게 전해져 왔다. 그런데 유독 에덴버만이 그런 짧은 몇 마디로 건국의 역사를 정리하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는 오래도록 오직 에를니아만이 유일한 신이었다. 그 까닭에 전 대륙이 주신을 숭상하여 왔으니 아무도 굳이 의심을 품지 않았지만, 사실 충분히 이상한 일이었다.
아주 예전에 배웠던 한 나라의 역사가 갑자기 떠오른 것은 전혀 관계없는 일이 아니었다. 그 땅 위에 오래도록 자리 잡았던 종교를 다른 종교로 대체하기 위해서 그 종교를 믿는 자들과, 그에 관한 서적 그리고 그 외의 기록 모두를 땅에 산 채로 묻어 버렸던 일이.
“혹시 당신… 전부 다 없애 버린 거야?”
베를리아가 물었다. 이건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만약 이 가정이 사실일 경우… 에덴버 자체의 정당성이 사라져 버리는 셈이었으므로.
인간을, 생명을 창조하여 이 땅을 사랑과 자비로 지켜 온 주신 에를니아가 실은 대학살의 주범이었다면? 주신의 이름으로 오래도록 제국의 이름을 지켜 온 에덴버를 주변국들이 과연 그냥 두고만 볼까?
답은 명확했다.
“짓밟고 짓밟아도 기어코 기어 나오는 벌레들 같으니.”
베를리아가 자신의 안에 든 말을 떠드는 동안 내내 입을 닫고 있던 에를니아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신의 사나운 눈빛이 홱 베를리아를 향했다. 에를니아가 음산하게 읊조렸다.
“에르젠타샤의 딸, 네가 항상 문제였지.”
‘에르젠타샤…?’
갑작스럽게 등장한 이름에 베를리아가 의문을 표할 새도 없었다. 순식간에 다가온 에를니아가 베를리아의 목을 틀어쥐고 그녀를 침대에 처박았다. 그 힘이 과히 인간의 것이라 할 수 없었다. 베를리아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그대로 목이 부러져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윽, 비켜…!”
베를리아가 흑마법을 일으켜 에를니아를 밀어냈다. 그 순간 몸이 뒤로 훅 날아갔던 에를니아가 아무렇지 않게 바닥에 착지해 곧게 섰다.
“그 영혼을 부수고, 또 부숴도 또 돌아오지. 지긋지긋한 에르젠타샤 같으니. 하필 너 같은 걸 만들어서는-.”
그 눈은 더 이상 안젤라의 것이 아니었다. 에를니아가 기이한 안광을 빛내며 베를리아를 내려다봤다. 분명 키는 안젤라보다 그녀가 더 컸음에도, 신의 위압감이 베를리아로 하여금 그렇게 느끼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베를리아는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지금 에를니아에게 밀리면, 굳이 도발한 이유가 사라지는 것이었다.
‘모든 일에 대가가 따른다면… 리리카가 진실을 말해 주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는 이야기야.’
그거라면 리리카가 매번 많은 것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을 속으로 삼키던 이유가 될 만했다.
인과율.
어쩌면 그는 이미 그것을 상당히 어기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베를리아는 이 자리에서 모든 것을 알아내고 싶었다.
자신이 이 세계에 오게 된 것인지, 혹은… 돌아온 것인지도.
“당신의 말은, 내가 ‘진짜’ 베를리아 리들턴이라는 것처럼 들리는데.”
베를리아가 에를니아를 떠보듯이 말했다. 그러나 신은 의외로 당황한 기색도 없이 대꾸했다.
“하, 그래. 네가 진짜 베를리아 리들턴이란다, 에르젠타샤의 아이야.”
맥이 탁 풀릴 만큼 간단한 대답이었다. 베를리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에를니아가 무슨 의도로 저렇게 순순히 진실을 말해 주는지 그에 대한 의심이 먼저 솟아올랐다.
“그래서… 네가 진짜면 무언가 달라질 것 같으냐?”
에를니아가 한 발 한 발 베를리아에게로 다가왔다. 신이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그녀가 에를니아를 제게서 떨어트리기 위하여 다시 흑마법을 불러일으켰다.
“그 빌어먹을 에르젠타샤의 힘 좀 치워!”
신이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순간 공간이 일렁이고 쩌정- 쩡! 쨍그랑! 온갖 파열음이 들리며 방 안의 도자기와 유리, 창문이 깨지고 금이 갔다. 쩌적-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파열음들과 다른 소리에 에를니아를 쳐다보니 안젤라의 몸에 마치 물건이 망가지듯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이 쓰레기 같은 게…! 당신의 성녀잖아!”
베를리아가 기겁하여 소리쳤다. 에를니아는 엄연히 신이었고, 그녀는 인간이었음에도 대적할 수 있던 이유는 에를니아가 안젤라의 몸에 있기 때문이었다. 신의 힘과 인과율의 대가를 인간인 안젤라의 육체는 견딜 수 없었던 까닭에 에를니아도 자제하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에를니아는 지금 자신이 저야 할 대가를 안젤라에게로 돌리고 있었다. 신은 더 이상 제 성녀의 육신이 어떻게 되든 신경 쓰지 않을 작정인 듯싶었다.
“내가 만든 것도 아닌데, 신녀 따위 또 찾으면 그만이다!”
에를니아가 베를리아의 비난을 비웃었다. 그러다 돌연 무언가를 깨달은 듯이 섬뜩하게 웃었다.
“아니, 그래-.”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베를리아가 자신도 모르게 주춤했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너로 하면 되겠어.”
눈도 깜박이지 않았는데 어느덧 에를니아가 베를리아의 코앞에 바짝 다가와 있었다.
“큭…!”
에를니아의 손아귀가 베를리아의 목을 틀어쥐었다. 아까와는 확연히 달랐다. 실제로 안젤라의 손은 훨씬 작았을 텐데도, 지나치게 큰 손이 목을 압박하는 느낌이었다.
베를리아가 다시 한번 흑마법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 힘은 안젤라의 몸에 균열이 가게 할뿐, 에를니아를 저지하지 못했다. 신이 제가 떠올린 생각에 대단히 흡족한 듯 중얼거렸다.
“그래, 에르젠타샤에게서 너를 빼앗으면 될 일이 아니냐.”
마치 물속을 휘젓듯이 베를리아의 머릿속으로 에를니아의 손가락이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그 순간 빠르게 그녀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세 번, 그 이상은 나도 힘드니- 이제는 끝내자꾸나.”
몽롱해진 의식 속으로 에를니아의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베를리아는 그 내용을 인식하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