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깽판치는악녀님 (100)화 (100/148)

100화. 기만의 끝(3)


 

안젤라가 멈칫했다. 그녀에게서 긴 침묵이 이어졌다.

“앤지?”

베를리아가 안젤라를 채근하듯이 그녀를 불렀다. 그러나 안젤라는 스스로의 생각에 오래도록 빠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왜 이 밤에 베를리아를 찾아왔더라? 내가 언제 잠이 들었지?’

안젤라는 그제야 자신의 행동이 어딘가 이상했음을 깨달았다. 카를로스가 그녀에게 청혼한 후, 안젤라는 불안감에 잠이 들 수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늦은 탓에 아침 일찍 베를리아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그랬는데 자신은 지금 여기에 와 있었다. 안젤라의 등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러니까… 원래는, 아침에 베릴을 찾아오려고 했어요. 그랬는데….”

안젤라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녀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제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요, 베릴.”

안젤라는 믿어 달라는 표정이었다. 그녀가 변명 혹은 해명을 하듯 말을 늘어놓았다.

“그냥… 갑자기 너무 불안해서, 카를로스가 당장이라도 교황 성하의 상태를 알리고 신탁을 빌려 반려가 되어 달라 칭할까 봐… 그게 너무 불안하고, 견딜 수가 없어서, 그래서….”

안젤라의 말은 횡설수설 두서가 없었다. 그녀는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겁에 질려 있었다.

스스로의 행적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 그게 지금 안젤라를 두렵게 하는 점이었다.

그런 안젤라를 보며 베를리아는 확신했다. 에를니아가 안젤라에게 손을 쓴 것이 틀림없었다.

리리카의 말에 의하면 신이 완벽히 인간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안젤라가 스스로의 이상을 느끼는 것도 그런 이유일 가능성이 컸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에를니아의 손이 안젤라에게까지 뻗쳤다는 점이었다.

‘…여기서 앤지를 내쳐야 하나?’

높은 확률로 베를리아의 추측은 사실일 터였다. 다만 에를니아가 안젤라에게까지 수를 써서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그 목적이 불분명했다. 그렇다면 사실 안젤라의 가까이에 접근하지 않는 것이 사실 현명한 처사였다.

베를리아의 시선이 안젤라를 향했다. 그녀가 침음을 흘렸다.

신에게 휘둘리는 게 어떤 느낌인지는 베를리아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몇 번이고 신에게 세뇌당할 뻔한 위기에서 벗어났다지만, 안젤라는 그러리란 법이 없었다.

‘망할 에를니아, 거지 같은 에를니아.’

베를리아가 속으로 에를니아에 대한 욕을 늘어놓았다. 에를니아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한 가지는 알 것 같았다. 베를리아는 자신과 비슷한 상황에 처한 안젤라를 외면할 수 없었다. 에를니아는 적어도 그것을 알기에, 안젤라를 택한 것일 터였다.

에를니아가 안젤라를 이용해 먹을 수 있는 방법은 너무 많았다. 에를니아가 전적으로 카를로스를 편애해 주변 이들을 휘두르고자 한다면, 성녀의 위치에 있는 안젤라 또한 얼마나 좋은 패던가. 그녀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카를로스의 반려로 세우고 카를로스를 믿게 만들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결국 베를리아가 한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앤지,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모두 믿어야 해요.”

베를리아도 자신의 말이 얼마나 안젤라에게 믿음을 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에덴버가 신성 제국임을 둘째치고서라도, 대륙의 유일한 신은 에를니아뿐이었다. 베를리아는 지금부터 그런 신을 모독하는 발언을 할 참이었으니 안젤라가 믿지 못한다 한들 무리도 아니었다.

“앤지는 에를니아를 어디까지 신뢰하나요?”

“베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주신에 대한 존칭도 없는 말투에, 신성을 의심하는 발언이었다. 역시나 안젤라에게서 곧바로 경악성 어린 어조의 말이 돌아왔다.

“나도 앤지와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어요.”

그러나 베를리아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안젤라의 반응쯤이야 이미 예상했던 것이었으므로.

“에를니아가 내게 카를로스 에덴버를 사랑해야 한다고 강요했거든요. 앤지가 갑자기 의식을 잃고 나에게 온 것도 에를니아의 수작일 가능성이 높죠.”

안젤라는 할 말을 잃은 채 베를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일부러 안젤라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똑바로 두 눈을 마주했다.

“내 말을 믿을 수 없나요? 그래도 받아들여야 할 거예요. 에를니아가 카를로스를 돕고자 이용하기에는 나나 앤지나 너무나 적절한 상대니까요.”

안젤라가 꾹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눈을 질끈 감더니 아주 미약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베릴, 나는 성녀예요. 신에 대한 믿음으로 지금까지 살아온.”

베를리아도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솔직히 안젤라가 단번에 제 말을 받아들일 거라고 여기지도 않았다.

“앤지는 자기 자신보다 신이 더 중요한가요?”

그 말에 다시 안젤라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 베를리아는 그 침묵이 곧 답임을 알았다.

“앤지가 신의 뜻이기에 무조건 따르고자 했다면… 에를니아가 카를로스 에덴버의 반쪽을 언급한 후 더 이상 결혼을 피하고자 하지 않았겠죠. 안 그런가요?”

베를리아가 확인사살을 하듯 물었다. 대개 모든 인간이 그렇듯이, 신을 믿고 살아도 신에 무조건적으로 순종할 수는 없었다. 안젤라가 성녀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지금까지는 안젤라가 추구하는 바가 ‘신의 뜻’이라는 이름으로 주어진 의무와 같았을 뿐이었다.

“베릴, 나는….”

안젤라는 완전히 말문이 막힌 채 어쩔 줄을 몰랐다. 그녀의 얼굴에 참담함이 어렸다.

“신의 존재는, 곧 나를 정의하는 것인걸요….”

안젤라는 정처 없이 흔들리다가 결국 견디지 못하고 제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렸다. 태어난 이래로 그녀는 성녀가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 그 말은 즉 단 한 번도 신을 섬기지 않는 삶을 산 적이 없다는 뜻이었다.

제 연인을 믿었기에 안젤라가 카를로스의 뜻에 따랐듯이, 안젤라에게 있어 신도 마찬가지였다. 신과 카를로스. 그 모두 안젤라의 세상에서 너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게 순식간에 무너지니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것도 당연했다.

“그렇다면 이거 하나만 물어볼게요. 앤지는 신이 원한다면 지금 이 상태로 카를로스와 결혼할 건가요? 성녀로서의 삶을 버리고?”

안젤라는 숫제 울 것 같았다. 그녀는 더 이상 제 연인을 믿을 수 없었다. 안젤라가 제 발로 베를리아에게 와서 연인과의 결혼을 막아달라고 한 순간, 사실상 안젤라와 카를로스의 사랑은 막을 내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카를을 믿을 수 없어요.”

결국, 위태위태하던 눈물방울이 안젤라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말은 즉 신의 뜻이라고 할지라도 카를로스와 결혼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신의 뜻을 거스르는 것. 그것은 마침내 안젤라가 살아오던 모든 세계가 부서짐을 뜻했다.

씨앗에서 싹이 틀 때, 애벌레가 나비가 될 때, 새가 알에서 태어날 때, 그 모두 제가 본래 속했던 세상을 깨고 나와야만 하는 법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은 본디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베를리아는 안젤라가 실컷 울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마침내 한참을 울던 안젤라의 눈물이 멈췄을 때 베를리아가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나를 믿어요. 앤지가 신에게 휘둘리지 않도록 내가 도울 테니.”

안젤라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인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

신에게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는 신성에서 멀어져야만 했다. 성녀의 처소는 신전 내에서도 신에게 가장 가깝다고 일컬어지는 곳에 있었으므로 안젤라는 베를리아의 방에서 밤을 함께 보내기로 한 터였다.

안젤라는 슥 상체를 일으켰다. 메리쉬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 덕에 널따란 침대는 베를리아와 안젤라 둘이서 쓰기에 좁지 않았다. 그래서 안젤라의 바로 옆에는 베를리아가 누워 있었다.

안젤라가 물끄러미 베를리아를 내려다봤다. 그녀의 눈에 초점이 없었다. 안젤라가 베를리아에게로 손을 뻗자, 그녀의 손에서 하얀 빛이 어둠을 밝히며 광채를 발했다.

“그만.”

그 순간 베를리아가 안젤라의 손목을 잡아챘다. 인형같이 표정이 없었던 안젤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떻게…? 최면으로 잠이 든 것이 아니었어?”

마치 베를리아에게 꼼짝없이 속았다는 듯한 어조였다. 그에 베를리아가 삐뚜름하게 미소하며 말했다.

“흑마법과 신성력이 상극이라면… 내가 신성력에 취약하듯이, 나라고 당신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리란 법이 없지. 안 그래, 에를니아?”

흑마법이 신성력과 상극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베를리아가 쭉 생각해 왔던 것이었다. 리리카가 그랬듯이, 소설에서 나오지 않은 방식으로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다면- 흑마법도 그러지 말란 법이 없지 않은가.

“…감히.”

안젤라의, 아니 에를니아의 음성에 분노가 어렸다. 베를리아는 자신의 생각이 맞았음에 짙게 웃었다.

안젤라를 통해서는 카를로스만큼 베를리아에게 영향을 줄 수 없는 게 확실했다. 오늘 한 행동으로 보건대, 그렇지 않았다면 에를니아가 지금껏 굳이 안젤라를 ‘사용’하지 않았을 리가 없으니까.

그래서 해 본 시도였다. 카를로스는 제게 극히 위험한 존재였으나 안젤라는 덜했으므로, 신성력을 두고 베를리아가 자신의 가정이 맞는지 확인하기에 적절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베를리아의 실험이 성공한 셈이었다. 에를니아는 베를리아가 최면으로 잠이 든 줄 알고 행동했으니, 신을 완벽히 속인 것이다.

“앤지를 돕다가 실패하더라도… 내가 선택했으니 감안하려고 했어. 그런데 그 위대한 신께서 이렇게 고스란히 속아 주실 줄이야.”

베를리아가 그간의 악감정을 담아 빈정거렸다. 에를니아는 더 이상 안젤라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위로 드러난 신의 형상이 더없이 일그러져 있었다.

“제 신을 닮아 오만한 종자 같으니…!”

에를니아가 분노하여 외쳤다. 그리고 베를리아는 신이 이성을 잃고 입 밖으로 내뱉고만 말을 놓치지 않았다.

“역시, 신이 당신 하나만 있는 게 아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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