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기만의 끝(2)
쾅쾅쾅, 쾅쾅쾅.
“한밤중에 감히 누가….”
메리쉬가 미간을 찌푸린 채 방문으로 다가갔다. 애초에 대신전에서 위험한 인물을 들일 리는 없었으나, 그는 베를리아의 안위에 관하여 절대적으로 민감한 사람이었으므로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베릴…! 저 좀 도와주세요!”
밖에서 간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녀였다.
“베릴, 제발…!”
그 목소리가 매우 다급해 보였다. 그러나 메리쉬는 문을 열지 않은 채 베를리아가 누워 있을 침대를 돌아봤다.
“…무슨 일이야, 멜?”
베를리아의 질문에 메리쉬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그는 성녀가 얼마나 절박하든 상관없었다. 그저 근래에 저주의 후유증으로 몸이 좋지 않은 베를리아가 이 야밤에 잠에서 깨어야 한다는 게 매우 거슬릴 따름이었다.
“성녀가 찾아왔어요, 베릴.”
메리쉬가 문을 등진 채로 베를리아에게 다가갔다. 그는 그녀가 별도로 말만 하지 않는다면 성녀를 그대로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메리쉬에게는 성녀에게 일어난 일보다 베를리아의 잠이 중요했으니까.
“앤지가…?”
베를리아가 비척비척 상체를 일으켰다. 그녀의 눈에 졸음이 가득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메리쉬의 바람대로 도로 눕지는 않았다.
“무슨 일로…?”
베를리아가 몸을 바로 세워 침대에 앉은 채 물었다. 안젤라가 아무 때나 찾아올 사람이 아닌 것을 알았다. 그런 그녀의 귓가에 다시 한 번 안젤라의 간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베릴, 카를이 내게 청혼을 했어요…!”
그 말에 베를리아가 자리에서 홱 일어났다.
본래 카를로스가 청혼하리라고 예상하던 때는 지금이 아니었다. 카를로스는 현재 에를니아로 인해 매우 유리한 패를 쥐고 있었다. 그런 그가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사실 카를로스에게 있어서 최적의 청혼 시기는 교황의 서거 직후였다. 실제로 교황은 이제 산 송장이나 다름없었고 그는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그런데 갑자기 카를로스가 왜 계획을 바꾼단 말인가.
“앤지, 그게 무슨 소리…!”
“잠깐만요, 베릴.”
갑작스러운 소식에 놀라 문을 열려는 베를리아를 메리쉬가 막아섰다. 철컥. 그가 도리어 안젤라가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문을 잠가 버리고는 말을 이었다.
“뭔가 이상해요. 성녀가 여기까지 왔는데, 신전이 이렇게까지 조용하다는 게 말이 안 되지 않나요?”
그 말에 베를리아가 멈칫했다. 순간적으로 자다 깬지라 판단력이 흐려졌지만, 메리쉬의 말에는 분명 일리가 있었다.
교황이 오늘내일하는 지금, 신전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성녀의 안전에 예민했다. 안젤라를 따르는 성기사들이 레밀튼에서나 그 전보다도 훨씬 늘어난 것이 그 증거였다. 그런데 야밤에 성녀가 빠져나오는데 아무도 그녀를 따라오지 않았다? 이상하지 않게 여길 수가 없었다.
“설마 에를니아가 앤지에게까지 손을 뻗친 건…?”
베를니아의 얼굴이 굳었다. 대놓고 신탁도 내리고 베를리아의 정신에도 파고드는 것이 에를니아였다. 그런데 안젤라에게 그러지 못하리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너무 어리석은 일이 아니던가.
“베릴, 제발요… 몰래 나온 거라 조금 있으면 다들 나를 찾으러 올 거예요. 아침이 되면 다들 카를로스가 내게 청혼한 이야기를 떠들 거라고요….”
방문 밖에서 안젤라의 애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음성이 정말 쫓기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다급해 보였다.
“베릴, 안 돼요.”
메리쉬가 베를리아의 팔을 잡은 채 고개를 저었다. 그는 어떤 가정하에서도 그녀를 위험에 빠트릴 수 없었다.
베를리아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망설였다. 그러나 곧 창밖에서 들려온 수런거림이 그녀를 행동하게 만들었다.
“이 안을 찾아 봐! 성녀님께서 나가신 지 얼마 안 되셨으니 근처에 계실 거야!”
베를리아의 거처가 있는 건물 주변에 성기사들의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창을 통해 기사들이 들고 있는 랜턴의 불빛이 넘실거렸다.
“베릴, 도와줘요…!”
안젤라가 소리쳤다. 베를리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
신전은 안젤라와 카를로스의 결합을 말릴 자들보다 반길 자들이 월등히 많았다. 신전과 황족이 작당을 하면 안젤라는 당할 재간이 없었다.
안젤라는 성녀였지만 지금 그녀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베를리아뿐이었다.
귀족들이 모두 베를리아를 비웃을 때, 베를리아를 대하는 방법이 서투르기는 했어도 유일하게 그러지 않았던 사람이 안젤라였다. 모든 이들이 역병에서 레밀튼을 외면할 뻔했을 때, 그것을 도왔던 것도 안젤라였다.
안젤라는 그런 사람이었다. 더 이상 그녀에게 있어 아무것도 아닐 수 없는.
벌컥!
결국 베를리아는 방문을 열었다.
“어서 들어와요, 앤지.”
끝내 베를리아는 안젤라를 자신의 방 안으로 들여놓았다.
***
에를니아가 수작을 부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건만, 베를리아의 방 안에 들어온 안젤라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정말로 불안하기 그지없는 사람처럼 한참을 찻잔을 쥐고만 있던 안젤라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너무 야심한 시간에 찾아와서 미안해요.”
문을 늦게 열어줬던 것에 죄책감이 들 만큼 안젤라는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녀는 짐승에게 쫓기던 사냥감이라도 된 듯이 두려움에 질려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그게 누구였더라도 베를리아처럼 묻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었다.
“카를이 갑자기 날 찾아왔어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가 뗀 안젤라가 말했다.
“어딘가 잔뜩 초조해 보이는 얼굴로요.”
베를리아는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카를로스가 그녀의 날 선 거절 이후 안젤라를 찾아갔다는 것을.
“그리고 내게 청혼을 했죠.”
달그락. 평소 철저히 예법을 지키던 안젤라답지 않게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유독 시끄럽게 들렸다.
“성기사들의 입을 단속시켜 놓기는 했지만, 분명 그들은 교황님과 추기경들 쪽에 이야기를 전했을 거예요…!”
안젤라가 초조함으로 얼굴을 물들이며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녀의 얼굴에 후회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안젤라는 지금까지 권력에 욕심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굳이 권력을 탐하지 않아도 그녀를 둘러싼 모든 것이 충만했다. 도리어 안온한 삶을 보내고 있는 안젤라의 입장에서는 권력판의 투쟁이 비정하고 힘겨워 보였다. 그러니 그 쪽으로는 발을 담구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다 보니 신전 내에서도 안젤라는 자애롭고 존경받는 성녀였지만, 무섭고 어려운 상대는 아니었다. 그 후폭풍이 안젤라에게 힘이 가장 필요할 이때 몰려온 것이다.
“베릴, 나는… 나는 어떻게 하면 좋죠?”
달그락. 탁자 위에 놓인 찻잔이 쓰러졌다. 잔 안에 얼마 남아 있지 않았던 홍차가 하얀 테이블보를 적셨다. 그것도 인지하지 못 한 채로 안젤라는 베를리아에게 매달렸다.
“당장 떨어져.”
메리쉬가 미간을 찌푸리며 성녀를 베를리아에게서 떼어 놓으려했다. 그는 여전히 안젤라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안젤라는 메리쉬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는 것처럼 베를리아에게 매달렸다.
“베릴, 베릴의 도움이 필요해요.”
안젤라의 모습은 한없이 처절해 보였다. 무엇이 그토록 그녀를 이렇게 몰아붙인 것인지, 베를리아는 당황스러웠다.
카를로스가 안젤라에게 청혼하리라는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일전에 베를리아에게 도와달라고 말하던 안젤라는 꽤 의연했었다. 하지만 오늘의 안젤라는 마치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탁.
“베릴…?”
그래서 베를리아는 문득 안젤라에게서 위화감을 느꼈다. 제 손을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갑자기 내쳐 버린 것은 그 때문이었다. 안젤라가 놀란 듯 움찔하여 베를리아를 바라봤다.
“…카를로스가, 앤지를 찾아갔던 게… 정말 맞아요?”
베를리아가 물었다. 평소와는 너무나도 상반되는 안젤라의 태도는 베를리아가 조금 전에 품었던 의심에 불을 붙였다.
어쩌면 에를니아가 안젤라를 통하여 베를리아에게 무언가 하고자 함일지도 모르겠다는.
‘그러고 보니 주위가 조용해졌어.’
문득 어떤 사실을 깨달은 베를리아가 휙, 휙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봤다. 건물 밖에 기사들이 시끄럽게 돌아다닌 것이 언제인데 이제는 사위가 고요했다. 기사들이 이상한 낌새를 못 느껴서 돌아간 거라고 쳐도, 마치 애초에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이토록 조용할 수 있나 싶었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베릴…?”
안젤라가 상처받은 눈으로 베를리아를 바라봤다. 그녀가 잔뜩 떨리는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지금 내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베릴에게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안젤라의 시선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그녀가 떨리는 제 두 손을 꼭 마주 잡은 채로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겨우 열며 대답했다.
“그렇게 나를 못 믿겠으면 베릴이 직접 알아봐도 좋아요.”
안젤라는 자신의 말에 한 치의 거짓도 없다는 듯이 떳떳했다. 그녀가 작게 원망의 말을 덧붙였다.
“내가 생각보다 베릴을 과하게 의지하고 있었던 모양이네요. 나는, 내 말을 베릴이 믿어 주리라 생각했는데.”
그 말에 베를리아가 움찔했다. 만약 에를니아가 안젤라에게 수작을 부린 게 아니라면, 그녀는 괜한 사람을 잡은 셈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안젤라가 갑자기 나타난 타이밍도, 평소와 다른 모습도 모두 너무 이상했으니까.
이곳은 출입이 엄격한 성지였기에 베를리아도 따로 수하를 데려오지 못했다. 그러니 안젤라의 말이 사실인지를 확인하려거든 메리쉬를 보내거나 베를리아가 직접 가야만 했다.
모두 딱히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에를니아가 베를리아에게 손을 쓰려고 했다면 메리쉬의 곁에 있는 것이 좋았고, 같잖은 황비 자리를 거절했는데 이제 와 카를로스를 찾아가면 괜히 기분 나쁜 오해를 살 수도 있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베를리아는 다른 방법으로 확인해야만 했다. 그녀는 가장 의심스러웠던 점을 기어코 입에 담았다.
“그렇다면 앤지, 카를로스가 청혼한 후 왜 바로 나를 찾아오지 않고 이런 새벽이 되어서야 온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