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깽판치는악녀님 (98)화 (98/148)

98화. 기만의 끝(1)


 

“…또, 무슨 거래?”

영상을 통해 베를리아와 마주하고 있는 리암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거래’라고는 하지만 그녀가 또 제가 무엇을 시킬지 두려운 탓이었다.

“이번에 성공하면 네 빚은 모두 없애 줄게.”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리암 로베르가 현재 진 빚은 그의 작위와 재산을 모두 팔아야만 할 만큼 어마어마했다. 수도의 귀족이자 황실 마법부 수장을 맡고 있는 자가 가진 것의 전재산. 그렇게 생각하면 정말로 무시무시한 금액이었다.

그것을 지금 단 한 번에 탕감할 기회를 주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대체 뭘 시키려고?”

그러니 리암이 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골적인 말로는 죽지만 않으면 뭐든 해야 할 판이었다.

“별거 없어. 내가 잊어버린 기억이 있는데, 그걸 찾아야겠어.”

흑마법이 기존의 마법보다 강력한 것은 맞았지만, 그렇다고 만능은 될 수 없었다. 그리고 리암은 정신 계열 마법의 대가였다. 이런 일에는 그가 제격이었다.

“겨우 기억 하나를 찾는데 그 많은 돈을 쓰겠다고?”

리암이 반사적으로 물었다. 당연히 쉽게 믿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기억 찾기 마법이 어렵기는 했지만, 빚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만 걸려 있대도 그는 베를리아를 돕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굳이 모든 빚을 없애 주겠다고 하는 건 그만한 위험부담이 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고대 마법이 필요해.”

“미쳤어? 안 해! 난 절대 안 해! 아니, 못 해!”

베를리아의 말에 리암이 기겁하여 날뛰었다. 그쯤이야 그녀가 예상하던 반응이었지만.

고대 마법. 그것은 현재의 마법사들이 만들어낼 수 없는 범위의 마법을 일컬었다. 마법이 가장 창대했다고 알려진 마도 시대의 유물로, 지금에 와서는 그 원리도 알 수 없이 수식만이 남아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당연한 말로 그런 마법을 아무나 사용하게 둘 리 없었다. 고대 마법이 적힌 마도서는 각 국가에서 엄격히 관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마도서를 가장 많이 보유한 곳은 에덴버 제국이었다. 그게 베를리아가 리암과 거래를 하려는 이유였다.

황궁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도 쉬이 의심을 사지 않을 사람이 필요했으므로.

“황실 마법부의 수장이 황실에 있는 고대 마도서를 좀 보는 게 어때서?”

베를리아가 당당하게 말했다. 리암이 기가 막힌다는 듯 반발했다.

“황실 마법부 수장이라고 해서 그걸 아무 때나 볼 수 있는 줄 알아…?!”

물론,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은 베를리아도 알고 있었다. 다만 그런 점 따위 그녀에게는 중요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리암 로베르, 나한테 중요한 것은 네게 유사시에 자유롭게 마도서를 열람할 권한이 있다는 사실이야. 알아들어?”

베를리아가 단호하게 일축했다. 그녀는 더 이상 리암의 찡찡거림을 듣기 귀찮았다.

어차피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테니까.

“난 필요하다면 네가 아니어도 어떤 식으로든 마도서를 볼 거야. 달라질 점은 그 과정에서 다른 누군가 너 대신 내가 줄 이득을 취하는 것뿐이겠지.”

베를리아의 말에 리암이 멈칫했다. 고대 마도서의 1차적인 관리 권한은 황실 마법부의 수장인 리암에게 있었다. 만약 그녀가 고대 마도서를 열람한다면 그는 황실의 질책을 피하지 못할 터였다.

“네가 할 수 있는 건 둘 중 하나야. 네가 직접 조용히 덮던가, 아니면 나중에 일이 벌어지고 나서야 수습하던가.”

베를리아가 리암이 아닌 다른 사람을 통해 고대 마도서에 접근하게 될 경우, 그녀는 굳이 그에게 그 사실을 알려줄 의무가 없었다. 그러니 베를리아의 말대로라면 일이 벌어진 후에야 리암이 알게 될지도 몰랐다. 그 경우, 누군가 고대 마도서에 접근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리암은 자신의 자리를 걸어야 할지도 몰랐다.

“…카를에게 들키지 않을 수 있어?”

한참을 침묵하던 리암이 입을 열었다. 고대 마도서야, 사실 평소에는 누구도 찾지 않는 유물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특별한 일만 없다면 베를리아가 고대 마도서에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조차도 카를로스가 알 리 없었다.

“그 자식이 굳이 알게 할 필요 없잖아?”

베를리아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모든 일은 카를로스가 모르게 진행되는 편이 그녀에게도 좋았다. 에를니아가 직접 제 아들이라 칭한 상대가 카를로스였으니까.

“언제, 까지…?”

리암이 망설이는 투로 물었다. 베를리아는 평소와 달리 웃음기 하나 없이 대답했다.

“최대한 빨리.”

***

“베릴.”

카를로스를 강제로 보내고 방으로 돌아온 메리쉬가 베를리아에게로 다가왔다. 아무래도 그녀가 타인과 이야기 중이라 밖에서 기다렸던 모양이었다.

제게 가까워진 메리쉬를 응시하던 그녀가 문득 말을 꺼냈다. 아마, 지금이 아니라면 앞으로 쭉 내뱉지 못할 질문일 터였다.

“멜, 내가 갑자기 황태자를 적대했을 때… 이상하지 않았어?”

그리고 어쩌면 아주 오래전에 물어봤어야 했던 것이었다.

“사람이 한순간 뒤바뀐 것처럼, 맹목적인 사랑이 찰나에 지독한 증오로 바뀌어 버린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메리쉬의 말이 매끄럽게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 내용만큼은 그녀에게 매끄럽게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눈에 띄도록 움찔하고 말았다.

그녀가 처음 메리쉬에게 사랑을 말했을 때, 그는 그것을 어렵지 않게 받아들였다. 베를리아에게 맹목적인 메리쉬와 그의 맹목이 마음에 들었던 그녀가 연인이 되는 과정은 매끄럽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메리쉬가 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이상하긴 했습니다.”

메리쉬가 여상스럽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긴장하고 있는 것은 그녀만인 듯했다.

“그렇지만 혹시 베릴이 어딘가 불안해 보이던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다면….”

메리쉬가 한 걸음 훌쩍 베를리아에게로 다가왔다. 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뺨을 감싼 채 부드럽게 매만졌다.

“그래도 베릴은 베릴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메리쉬의 어조에는 확신이 들어 있었다. 그는 이전과는 달리 갑작스럽게 돌변한 그녀의 모습에도, 마치 단 한 치의 의심도 해 본 적이 없는 것처럼 말했다.

“당신이 어떤 베릴이든, 베릴이라면 되니까요. 다른 것 따위 저에게는 중요하지 않아요.”

“…내가, 네가 아는 베를리아일 거라고 믿어?”

그녀가 물었다. 그러자 메리쉬가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입을 맞췄다.

“당신은 언제나 베를리아 리들턴이었어요. 내 세상이자, 이제는 내 사랑인.”

그녀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확인받고 싶었다. 그녀가 짐작하고 있는 것이 진실이리라는 것을.

흔들림 없는 메리쉬의 말이 그녀를 붙들어 주었다. 에를니아가 그녀에게 부린 농간, 어쩌면 그것은… 자신을 잊게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진짜 베를리아일지도 몰라.’

그렇다면 그녀는 두 세계를 오간 것이 된다. 상상도 못 할 일이었으나, 애초에 다른 세계로 와서 누군가의 몸에 빙의했다는 것 자체도 남들에게 설명 못할 일이기는 매한가지였다.

게다가 다른 사람의 몸에 빙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익숙했던 일, 이 세계에 오고서도 전혀 당황스럽지 않았던 일, 카를로스를 마주하기 전부터 그가 너무나 미웠던 일, 겨우 책 속 등장인물일 뿐인데도 메리쉬가 안타까웠던 일, 그 모두가 그녀의 추측이 진짜라면 단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사랑해, 멜.”

‘그랬으면 좋겠어.’

그녀가 메리쉬의 허리에 두 팔을 감아 안기며 생각했다. 그래서 아무 두려움이나 죄책감 없이 그를 사랑하고 싶었다.

***

‘안젤라, 나의 딸아.’

들어 본 적 없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안젤라는 그 목소리를 어쩐지 거부할 수 없었다.

‘에르젠타샤의 아이를 내게로 데려오렴.’

목소리가 안젤라를 휘감았다. 정신이 몽롱했다. 그 상태로 안젤라는 잠에서 깨어났다. 안젤라가 차분히 침대에서 일어나 치장했다. 그 모습은 아주 멀쩡한 사람이 평소와 같이 행동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준비를 끝낸 안젤라가 방문으로 다가갔다. 그녀가 손을 뻗어 문을 여니 잘 관리된 문이 소리 없이 밀렸다.

“…성녀님? 어디를 가시는 겁니까?”

성녀의 방문 앞을 지키던 성기사가 물었다. 어딘가를 가기에는 야심한 시각이었기 때문이다.

“신께서 부르셨네. 나 홀로 조용히 다녀올 테니, 그대는 소란 떨지 말고 자리를 지키도록.”

안젤라가 대답했다. 평소의 그녀와는 달리 위엄이 넘치면서도 어딘가 고압적인 말투였다.

“…그렇다면 제가 성녀님을 호위하겠습니다. 성녀님을 위험하게 홀로 가시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에 잠시 멈칫했던 성기사가 다시 말을 이었다. 소란을 피우지 말라고 했으니 안젤라에게 다른 호위를 붙이는 것은 무리였다. 아무리 대신전 내에서 성녀를 위헙할 자 있을 리 없다지만, 안젤라는 성녀였으므로 최소한의 호위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이 호위를 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방금 그대에게 뭐라고 말했지? 내가 두 번 말해야 하나? 아니면 성녀인 내 말을 무시하는 것인가? 일개 성기사인 그대가?”

안젤라의 말투가 매우 날카로웠다. 성녀에게서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어조였다. 그에 흠칫한 성기사가 다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게 아니오라… 성녀님의 안전이 염려되오니, 다시 한 번 재고해 주시면….”

쯧. 어디선가 혀 차는 소리가 들린 것만 같았다. 성기사의 목소리는 그 다음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안젤라가 성기사에게 뻗었던 팔을 거둬들였다. 성기사는 아까 멀쩡했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순식간에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성녀님, 이게 무슨…!”

성녀의 방을 지키는 자들은 둘이었다. 맞은편에서 성녀와 성기사의 대치를 안절부절못하며 보고 있던 다른 성기사가 놀라 다가왔다. 그러나 안젤라가 손을 뻗어 그 성기사의 이마를 톡 건드리자 그녀 또한 정신을 잃은 채 바닥을 나뒹굴게 되었다.

안젤라는 그대로 두 성기사를 지나쳐 걸어갔다. 그녀는 뒤조차 돌아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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