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깽판치는악녀님 (97)화 (97/148)

97화. 신이란 무엇인가?(12)


 

“너 혹시 어디 모자라?”

이제는 미쳤냐는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더 이상 네가 주는 건 내가 아무 의미도, 쓸모도 없다는 설명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베를리아는 그저 진심으로 카를로스 에덴버의 머리 어딘가가 망가진 게 아닌지 의심했다.

그런 게 아니라면 되지도 않을 제안을 계속 가지고 오는 게 말이 안 됐으니까.

그러나 카를로스의 얼굴은 퍽 진지했다. 마치 베를리아가 이런 반응을 보이리라 예상했던 듯이.

“네게 기회를 주는 거야.”

카를로스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내게 되갚을 기회.”

그 말은 흡사 카를로스가 자신에게 복수하라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베를리아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그를 빤히 쳐다봤다. 이번에는 무슨 꿍꿍이인지 알 턱이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네 지척에서 너한테 복수하라고?”

베를리아는 자신이 말을 내뱉으면서도 반신반의했다. 무려 그 ‘카를로스 에덴버’였다. 그런 그가 자신이 복수를 당할 만한 잘못을 했다고 인정할 리가 없었다.

“그래. 무엇이든 네 마음대로 해도 좋아.”

베를리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도대체 저게 무슨 바람이 불어서 저런 소리를 늘어놓는지 의아했다.

“그자… 그래, 그자를 곁에 두어도 아무 말 하지 않도록 하지.”

카를로스의 말이 이어질수록 베를리아의 눈매는 가늘어지다 못해 일그러졌다. 메리쉬를 죽이려고 할 정도로 질색했던 황태자였다. 그런데 인제 와서 메리쉬의 존재를 묵인해 주겠다니.

‘그렇게 내가 방심할 틈을 만들어서 메리쉬를 해하려는 속셈일까…?’

온갖 의문과 의심이 베를리아의 안에서 무럭무럭 자라났다. 그래도 황태자의 자리에까지 오른 카를로스인데, 그런 빤한 수를 쓸까 싶었다.

“만약 네가 황비가 되어 준다면 메리쉬 리아세의 목숨도 보장하겠어.”

베를리아의 입이 마침내 딱 다물렸다. 그녀가 머릿속으로 늘어놓을 수 있는 가설들은 이미 모두 끝나 버렸다.

아직도 베를리아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여겨, 그녀를 황비로 삼은 뒤 메리쉬를 죽인다. 그게 카를로스가 할 법한 짓이었으니까.

“…하, 내가 널 어떻게 믿고?”

물론 베를리아는 황비의 자리 따위에 하등 관심 없었다. 다만 카를로스가 뭐라고 대답할지 들어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주신 에를니아의 앞에 맹세한다. 네가 내 황비가 된다면… 내 의지로, 내 손이나 다른 자의 손을 빌려서 메리쉬 리아세를 죽이려고 할 일은 없을 거다.”

카를로스의 입에서 매끄럽게 말이 흘러나왔다. 그에게서 환한 빛이 반짝였다 사라졌다. 그리고 동시에 베를리아의 얼굴은 완전히 굳어 버렸다.

에덴버의 황족들은 에를니아의 축복을 받은 핏줄이다. 즉 에를니아를 두고 거짓 맹세를 하면 그 축복을 잃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카를로스가 무려 그 에를니아를 두고 맹세한 것이다.

“…너, 에를니아를 만났지.”

베를리아가 성큼 카를로스에게로 다가갔다. 말은 흡사 영상석에 녹음된 것처럼 그녀에게서 흘러나왔다. 그저 감이었다.

지난날 꿈에서 보고 오늘날 스쳐가다 들은 적이 있는 것처럼 아주 선명한 감.

‘나한테도 나타났으니, 네놈에게도 나타나지 말란 법도 없지.’

이곳은 에를니아에게서 가장 가깝다고 일컬어지는 성지였다. 그러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베를리아의 긴 팔이 쭉 뻗어져 그의 멱살을 콱 틀어쥐었다. 강렬한 기시감이 들었다. 그녀는 분명 이 장면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이제 방해물은 사라졌으니… 베릴, 네게 황비의 자리를 줄게.’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자신, 태양빛을 받아 환하게 빛나며 제게 다가오던 카를로스. 그리고 그 속에서 번뜩이던 짐승같은 그 푸른 눈.

“큭, 베릴…!”

카를로스의 멱살을 쥔 베를리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의 손에서 무형의 기운이 넘실거렸다. 그것이 비정상적인 힘을 베를리아에게 부여했고, 그녀의 손이 카를로스의 숨통을 틀어막게 해 주었다.

“말해, 에를니아가 뭐라고 지껄였어!”

베를리아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머릿속이 달아올랐다. 갑작스럽고 말도 안 되는 분노였다. 그러나 기묘한 확신이 함께 있었다.

베를리아에게 목을 졸리는 지금도, 카를로스가 그녀를 제 오러로 억지로 밀어내지 않고 인내하는… 그렇게 해야만 할 이유가 있으리라고.

“이거, 윽… 놔.”

카를로스는 여전히 자신의 오러를 끌어올리지 않았다. 그저 베를리아의 손을 풀어내려 애쓸 뿐이었다. 그러나 단순한 악력이 아니라 흑마법이었다. 그런 행동으로 풀릴 리가 없었다.

“말해, 카를로스 에덴버.”

베를리아의 얼굴 위로 붉은 낙인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미 카를로스의 수많은 기사에게 저주를 거느라 힘을 쓴 터였다. 게다가 여기는 성지였기에 전적으로 베를리아에게 불리했다. 신성력과 흑마법은 서로 반발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에를니아의 힘으로 충만한 성지는 말 그대로 베를리아에게는 천적과도 같은 곳이었다. 그러니 사실상 지금 그녀가 흑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그것을 그녀도 모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주체할 수 없었다. 에를니아와 카를로스가 무언가를 작당했다는 사실이 그녀를 너무나 충동적으로 폭주하게 만들었다.

“베릴!”

그 순간 메리쉬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더라면, 베를리아는 자신이 어떻게 되든지 카를로스의 숨을 끊어 버렸을지도 몰랐다.

“쿨럭…!”

메리쉬가 베를리아에게서 카를로스를 던지듯이 떼어 놓았다. 갑자기 숨통이 트인 카를로스의 잔기침 소리가 시끄럽게 사방을 울렸다. 숨을 급하게 들이쉬느라 비틀거리며 허리를 굽힌 카를로스의 모습을 베를리아의 두 눈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보랏빛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너와 네 신은 늘 지독히도 끔찍해.”

그녀가 읊조렸다. 전혀 주변을 의식하지 않은 탓에, 남들보다 귀가 좋은 메리쉬와 카를로스 모두 듣고 말았지만.

“뭐….”

목을 부여잡고 기침을 연달아 내뱉던 카를로스가 휙 고개를 들어 베를리아를 쳐다봤다. 그가 몸을 움찔했다. 그녀의 표정에서 뿌리 깊은 증오와 경멸을 읽어낸 탓이었다.

이번에는 카를로스의 말문이 막혔다. 그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말로 하룻밤을 계기로, 베를리아는 달라져 버렸으니까.

“에를니아가 네게 뭐라고 그 입을 놀렸는지 모르겠지만.”

“감히, 주신께…!”

“닥치고 들어!”

주신에 대한 최소한의 존칭도 없이 그녀가 말을 꺼냈다. 그에 대하여 카를로스가 반박하자, 베를리아가 그의 목소리를 날카롭게 끊어냈다.

“너 따위의 황비가 되느니-.”

“베릴…!”

베를리아가 카를로스에게로 다가가자 움찔한 메리쉬가 그녀를 막으려 했다. 에를니아 때문이라도 베를리아는 카를로스와 가까이하지 않는 게 좋았다. 그런데 마치 무언가에라도 단단히 홀린 사람처럼 막무가내로 구는 그녀가 그는 매우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메리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카를로스에게 몇 발자국 더 가까워진 베를리아가 말했다.

“내 영혼을 걸어서라도, 널 죽이고야 말 거야.”

살의였다. 손발 하나 까닥할 수 없었다. 그 지독한 살의가 자신을 향하고, 그 살의의 주인이 베를리아였다. 그 점이 카를로스를 꼼짝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만, 베릴.”

그때, 뒤에서 메리쉬가 베를리아의 두 눈을 제 손으로 가렸다.

“이거 놔, 멜.”

“베릴의 몸을 먼저 챙기세요.”

베를리아가 그의 손을 떨쳐내려 하자, 메리쉬가 속닥였다. 그녀가 카를로스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을 드러낼수록 저주가 마치 보복하듯이 날뛰고 있었다. 낙인이 점점 더 넓게 베를리아의 얼굴 위에 자리하고 있는 게 그 증거였다.

베를리아의 어깨가 미약하게 들썩거렸다. 아직까지도 강렬한 분노가 가라앉지 않은 탓이었다.

“…멜.”

베를리아가 문득 떨리는 목소리로 메리쉬를 불렀다. 방금까지 그녀는 제 뜻대로 리리카를 델로미아나의 양자로 만들고 왔다. 일은 실타래를 풀 듯 술술 풀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왜 급작스럽게 이토록 들끓는 마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걸까. 모든 것은, 그녀의 원대로 흘러가고 있는데.

모든 게 엉망인 기분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잘하고 있는 것인지 돌연 알 수 없어졌다.

“네, 베릴.”

“…나 먼저 들어갈게. 저것 좀 치워 줘.”

베를리아는 메리쉬에게 눈이 가려진 채로, 카를로스를 보지도 않고 말했다. 더 이상 카를로스를 눈에 담고 싶지 않았다. 저주의 낙인이 얼굴을 뜨겁게 덥히고 있었다. 그로 인해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리는 와중에도 단 하나 선명한 것이 있었다.

‘내 영혼을 걸어서라도, 널 죽이고야 말 거야.’

그 말은 그녀의 진심이었다. 그 진심 하나만이 아주, 많이, 선연했다. 그녀는 자신이 카를로스가 그저 망하기를 바랐던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그 정도로는 부족했다. 영혼이 갈가리 찢기고 온몸이 가시밭 위를 구르며, 끝나지 않는 고통 속에서 비명을 지를 때마다 그 입에서 피를 토하기를 바랐다.

밉다? 미움 정도로 표현할 수가 있을까. 이토록 끔찍한 것을.

“금방 갈게요, 베릴.”

메리쉬가 베를리아를 놓아 주었다. 그가 꼼꼼히 가리고 선 덕에 카를로스의 모습은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잠깐, 베릴…! 윽!”

베를리아를 부르던 카를로스의 목소리가 끊겼다. 메리쉬가 무엇을 했는지, 그녀는 돌아보지 않으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돌아볼 생각도 없었다.

그녀는 그대로 자리를 완전히 떴다. 감정은 여전히 수런거렸다.

***

그녀는 방 안의 화장대 앞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거울 속에 있는 모습은 분명 베를리아 리들턴이었다.

그녀가 처음 이곳에 빙의했을 때부터 아주 익숙하고 당연하게 느껴졌던 모습의, 베를리아 리들턴.

머리가 지끈지끈거렸다. 그녀는 그것을 무시한 채로 계속해서 거울을 바라봤다.

‘아이야, 네가 알 필요 없는 것이다.’

에를니아는 이미 그녀의 기억에 손을 댄 전적이 있었다. 심지어는 한 번 손을 댄 뒤로, 시도 때도 없이 그녀를 세뇌하기 위하여 나타났다.

‘그렇다면… 과연 그게 처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녀는 자신의 의심이 타당하다고 여겼다. 그녀는 자신이 잃어버린 기억들을 되찾아야만 했다.

곧 그녀의 손에서 통신 아티팩트가 반짝이며 빛을 발했다. 공중에 영상이 뜨고 누군가가 맞은편에서 나타났다.

“나와 거래를 하자.”

베를리아가 영상 속 상대에게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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