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깽판치는악녀님 (96)화 (96/148)

96화. 신이란 무엇인가?(11)


 

신관 가문들에서도 무조건 신관을 배출하지는 못했다. 신관의 기본적인 요건은 아주 조금의 신성력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저 그들 또한 기사 가문이나 마법사 가문이 그러하듯이, 신성력을 가지는 아이가 태어날 확률이 높았을 뿐이다.

그리고 그중에서 신성력이 없어 신관이 되지 못한 아이들이 주로 가문을 이었다. 물론 그들은 그저 후계를 이을 뿐, 실질적으로는 신관이 된 자들이 가문의 권력을 손에 쥐고 있었지만.

어쨌든 신관들의 가문 사이에도 세력 다툼은 존재했다. 그리고 대개 그 세력은 배출한 신관의 지위와 수에 따라 결정되었다.

그리고 여기, 대대로 최소 대신관 급의 신관을 배출했으나 이번 대에 들어 급격히 쇠락하기 시작한 가문이 있었다.

“그러니까 이 자가… 추기경이 될 만한 신성력을 가지고 있단 말입니까?”

델로미아나 가문의 가주, 엘테시타 델로미아나가 물었다. 그의 눈이 의심스럽다는 듯이 리리카를 향해 있었다.

그럴 법도 했다. 신전에서조차 현재 추기경의 수가 어느 때보다도 현저히 적은 판국이었다. 그런데 그런 힘이 ‘외부’에 있었다니. 쉬이 믿기 힘든 일이었다.

“직접 보면 아시겠지요.”

베를리아의 말에 리리카가 앞으로 나섰다. 그의 손에서 새하얀 광휘가 환히 빛났다. 곧 그 빛이 한 곳에 집중되더니 순식간에 공중으로 확 퍼져 스며들었다.

“이건….”

엘테시타는 말을 잇지 못했다. 폐부로 순도 높은 신성력이 스며들었다. 공기 중에서 접하는 것만으로도 피로는 물론 자잘한 질병들까지 나을 정도의 엄청난 신성력이었다.

이조차도 리리카가 자신의 본래 힘을 어느 정도 숨긴 것이라는 건 절대 모르겠지만.

“이 정도 보여 드렸으면 두말할 필요 없겠지요. 신분은 성녀님께서 직접 보증해 주셨으니.”

엘테시타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썩 미심쩍은 것이 많다는 얼굴로 베를리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죽일 듯이 굴던 사이였던 게 베를리아와 안젤라가 아니던가. 그런데 인제 와서 베를리아가 데려온 자의 신원 보증까지 성녀가 직접 해 주다니,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으면 천치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그리 의심하지 않아도 됩니다. 어찌 된 일인지는, 내 제안을 받아들일 경우 설명해 줄 테니.”

베를리아가 느긋하게 다리를 꼬며 말했다. 거래를 제안하러 온 것은 베를리아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유롭기 그지없어 보이는 그녀의 태도는 엘테시타를 위축되게 만들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리리카의 신성력을 눈으로 확인한 지금, 그의 존재가 절실한 것은 델로미아나 가문이었기 때문이다.

가문에 속한 마지막 대신관마저도 세상을 떠났을 때, 델로미아나는 신성력을 가진 자를 입양하려 했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이번 세대 들어 강력한 신성력을 발휘하는 자들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지금까지 이런 일로 가문 외의 사람을 입양할 일이 없었던 델로미아나는 그로 인해 이미 다른 신관 가문들에게 모조리 선수를 뺏긴 지 오래였다.

그런데 다른 가문들이 입양하여 내세웠던 어떤 아이보다도, 눈앞의 리리카는 강력했다. 그러니 엘테시타로서는 그가 절실할 수밖에 없었다.

“…하실 제안이 무엇입니까?”

“첫째, 리리카를 양자로 들이세요. 단, 가주의 자리에는 계속 가지고 계시되 권한은 리리카에게 넘겨 주셔야겠습니다.”

“그건 안 될 말입니다…!”

베를리아의 말에 엘테시타가 움찔하며 반발했다. 신관들의 가문에서 가주는 허수아비일뿐, 가문 내의 가장 강력한 신관이 그 권한을 행사하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입양아라면 말이 달라졌다.

가문의 최고 신관이 그들의 혈연이 아닐 경우, 그럴 때만은 가문의 권한이 온전히 가주에게 쥐어졌는데 그래야만 입양된 이조차 가문의 뜻대로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베를리아는 그것을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나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거래는 없어요.”

그러나 베를리아는 단호했다. 리리카가 에루아트의 성을 찾기 전 잠깐 머물 가문으로는 꼭 델로미아나가 아니더라도 좋았다. 그저 안젤라가 알려준, 가장 절실한 신관 가문이 델로미아나였을 뿐이었으니까.

‘새로운 교황 후보를 알아요.’

안젤라가 자신을 찾아왔을 때, 베를리아는 리리카의 존재를 언급했다. 그것은 일종의 시험이었다.

몰래 베를리아를 찾아온 것은 안젤라가 먼저였다. 베를리아는 지금껏 꾸준히 카를로스를 적대해 왔으며, 안젤라에게도 직접 그가 싫다고 언급했다. 즉 안젤라가 베를리아로 하여금 카를로스의 뜻을 꺾고자 한다면, 그것은 언젠가 그와 대척점에 서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의미했다.

베를리아는 안젤라에게서 그것을 확인하길 바랐다.

‘…제가 돕게 해 주세요.’

그리고 그게 안젤라의 대답이었다.

본래의 안젤라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답이었을 터였다. 하다못해 베를리아를 몰래 찾아와 일을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제 연인에게 직접 이별을 고했을 터였다. 그러나 카를로스는 번번히 그녀의 믿음을 배신했고, 배신은 이렇게 배신으로 돌아왔다.

안젤라에게는 카를로스가 자신을 곱게 놔주리란 확신조차 남지 않았다.

그로 인해 베를리아는 안젤라로부터 엘테시타를 소개받아 비밀리에 대면하고 있었다.

엘테시타는 오래도록 침묵하고 고민했다. 베를리아가 그 고민을 빨리 끝내 주기 위하여 말을 덧붙였다.

“참고로 난 꼭 델로미아나가 아니어도 됩니다.”

엘테시타의 몸이 크게 움찔했다. 그가 침음을 하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굳이, 신관 가문을 통해 저자를 신전 내로 집어넣고자 하심은… 혹, 저자의 출생 신분을 숨겨야 하기 때문입니까?”

엘테시타가 가장 크게 고민하는 점이었다. 리리카의 신성력이라면 현존하는 추기경 중에서도 제일 가는 추기경이 될 수 있을 터였다. 게다가 베를리아가 신전에 막대한 기부금을 냄으로써, 상당수의 신관들에게도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신전 내부에서 암암리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무엇보다도 성녀가 직접 리리카의 신원을 보장하고 있었다. 즉 이미 성녀가 그를 신관으로 인정했다는 말과 진배없는 의미였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베를리아가 굳이 엘테시타를 찾아올 이유가 없었다. 그녀의 힘과 자본, 성녀의 지지, 리리카의 능력이 있는데 왜 굳이.

엘테시타는 그 의문의 답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출신. 그것에 대한 의혹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한 것이리라.

“엘테시타 델로미아나.”

베를리아가 가주의 풀네임을 입에 담았다. 어떤 존칭도 붙이지 않은 오만한 어조였다.

그건 경고였다. 그녀가 말하지 않은 것 이상을 입에 담지 말라는.

“당신은 그저 정하기만 하면 돼요. 리리카는 분명 추기경이 될 테고.”

엘티시타도 알았다. 추기경이 되기에 부족한 것이 전혀 없었으니까.

“그 속에서 가문의 쇠락을 지켜볼지, 혹은 가문을 팔아서라도- 후세에 가문의 이름을 남길지.”

베를리아가 덧붙인 말에 엘테시타가 질끈 눈을 감았다.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을 때, 혹시라도 닥칠지 모를 미래가 그의 눈앞에 그려졌다.

리리카가 추기경이 되고, 그로 인해 신전에 대한 베를리아의 영향력이 커진다면? 베를리아의 제안을 거절해 그 심기를 거스른 시점에서, 더 이상 가문에 속한 대신관조차 없는 델로미아나가 신전 내에서 버틸 수 있을까?

델로미아나는 베를리아가 아니더라도 이미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그녀의 존재는 유일한 동아줄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실 망해가는 가문의 입장에서, 황태자조차 어찌하지 못하는 상대에게 줄 것이 무어가 있겠는가.

그러니 답은 나와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입적 서류를 준비하겠습니다.”

결국 엘테시타의 입에서 승낙의 말이 나왔다. 그가 부인이 있었다면 입적 동의서가 필요했을 테지만, 그는 미혼이었다. 그런 점 또한 베를리아가 델로미아나를 고른 이유 중 하나였다.

“시점은 성지에서 귀환한 직후가 좋겠군요. 내가 연락하도록 하죠.”

그 시점이라면 신에게 선택받아 성지에 다녀온 카를로스가 한참 고양되어 있을 때였다. 베를리아의 말은 즉 대놓고 황태자와 반목하겠다는 소리였다.

“…예, 그러도록 하죠.”

그러나 엘테시타는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이미 한 배를 타기로 한 시점에 베를리아의 의견에 대하여 반기를 드는 것은 더 이상 아무 의미가 없었으므로.

***

베를리아가 대신전에서 배정받은 방으로 돌아오는 길, 그 입구에 카를로스가 서 있었다. 그는 누가 봐도 그녀를 기다린 듯한 모습이었다.

‘…메리쉬도 없는 판에.’

베를리아가 자신도 모르게 주춤거렸다. 카를로스와 있으면 에를니아가 언제 튀어나와 그녀를 조종하려 들지 몰랐다. 그러니 카를로스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메리쉬는 현재 자리를 비운 터였다. 추기경의 자리만이라면 모르겠으나 베를리아가 최종적으로 노리는 것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러니 가능하다면 리리카의 편이 되어줄 신전 가문들을 더 많이 끌어들여 놓는 것이 좋았다.

성지에는 나이가 지나치게 많거나 신성력이 줄어 뒤로 물러났지만 여전히 권력에 욕심이 많은 자가 상당수 존재했다. 그러니 베를리아가 엘테시타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메리쉬는 그들을 포섭하기 위해 움직인 터였다.

“어디를 다녀오는 거지?”

자신을 보고 멈춰 서 있는 베를리아를 발견한 카를로스가 미약하게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 그녀는 마치 대놓고 그를 꺼리듯이 일정 거리 안으로는 들어오려 하지 않았다. 그게 카를로스의 심기를 거슬렀다.

“거기 서서 말해. 더 다가오지 마. 거기 가만히 있어도 들려. 아니면 그대로 들어가 버릴 거야.”

카를로스가 그러거나 말거나 베를리아는 제가 할 말을 쏟아냈다.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그가 제게 다가서는 것을 노골적으로 거부했다.

어차피 카를로스가 입구 쪽에 있었기 때문에, 베를리아가 안으로 들어가려면 그를 지나쳐야만 했다. 그녀는 찰나라도 카를로스와 가까워지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대충 그의 헛소리를 듣고 돌려보낸 후 제가 들어갈 참이었다.

“너는 대체…!”

그것에 욱한 카를로스가 목소리를 높였다가 이를 악물며 뒤로 물러섰다. 그가 애써 침착하는 듯하더니 짜증스레 한숨을 내뱉고는 말을 이었다.

“베릴, 네게 황비의 자리를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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