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깽판치는악녀님 (95)화 (95/148)

95화. 신이란 무엇인가?(10)


 

“…대체 어디를 가는 거예요?”

베를리아가 참다가 못 해 리리카에게 물었다. 그들은 대신전을 벗어나 그 주변을 빙빙 돌고 있었다. 도대체 왜 이런 식으로 시간을 낭비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저도 여기는 오랜만인지라, 문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야 하거든요. 게다가 매일 위치가 바뀌기도 하고.”

리리카의 말은 여전히 알 수 있는 부분보다 그렇지 않은 면이 더 많았다. 베를리아가 한숨을 내쉬며 그의 뒤를 따랐다.

어쩔 수 없었다. 이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그 대단하신 신이라는 존재, 주신 에를니아를 막을 방법이 정말로 절실했으므로.

“…군.”

성지는 출입이 엄격했으므로 현재 베를리아와 리리카는 몰래 나와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난데없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리카, 잠시.”

베를리아가 리리카를 멈춰 세웠다. 들려온 음성이 귀에 익은 탓이었다.

“왜 그래요?”

“가 봐야겠어요.”

베를리아가 흑마법으로 자신과 리리카의 기척을 숨긴 채 발을 옮겼다. 소리가 난 쪽에서 들려온 음성은 분명 카를로스 에덴버의 것이었다.

“때를 노려야 하니 긴장을 풀지 말도록.”

가까이 다가갈수록 베를리아는 자신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그리고 지척에 가까워졌을 때 마침내 카를로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 정말로 우리를 공격할 셈이었나?”

베를리아가 기가 막혀 중얼거렸다. 카를로스는 메리쉬를 죽이려 한다. 그것을 증명하듯이 그의 앞에는 성지로 오는 행렬에는 보이지도 않던 기사들이 쭉 도열해 있었다.

성지에서 전쟁을 치를 일은 당연히 없었다. 게다가 카를로스가 신의 신탁까지 받은 지금 귀족들은 몸을 사리기 바빴다. 무엇보다 성지에서는 피를 보는 게 금지되어 있었으니 저 정도의 기사를 데려오는 것은 허가되지 않을 일이었다. 카를로스가 바보가 아닌 이상 성지에서 제가 데려온 기사들의 존재를 드러낼 리 없었다.

그러니 저 많은 기사의 쓰임새는 결국 한 곳으로 귀결되었다.

“감히…!”

베를리아가 자신도 모르게 읊조렸다. 생각하고 정리할수록 그녀의 머리에 화가 차오른 까닭이었다.

감히, 메리쉬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 그것도 그녀를 죽이려고 했던 카를로스 에덴버가.

베를리아가 손을 움직였다. 저딴 기사들 따위 쓸어버리면 그만이었다.

“안 돼요, 베를리아 양.”

그러나 그것을 리리카가 베를리아의 손을 잡아 제지했다. 그녀가 조금 거칠게 그의 손을 쳐내며 말했다.

“그럼 저것들을 그냥 두라고요?”

“저들을 베를리아 양이 혼자 다 처치했다가는 ‘힘’의 사용으로 인한 부작용이 찾아올 거고, 육체가 약해지면 에를니아에게 더더욱 쉽게 휘둘리게 될 거예요.”

리리카의 말에 베를리아가 움찔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것은 안 될 일이었다. 그녀가 입을 꾹 다물었다. 에를니아에 의해 휘둘리는 것은 질색이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저들을 저대로 둘 수는 없어요.”

베를리아가 다른 손을 들어 흑마법을 시전했다. 메리쉬에게 위협이 될 것이 뻔한 자들이었다. 그저 둘 수는 없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베를리아 양!”

리리카가 목소리를 높였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미 공기 중이 미묘하게 일렁이며 무형의 기운이 카를로스의 기사들 사이로 내려앉았으니까.

그것은 찰나에 일어난, 매우 미세한 변화였기에 카를로스와 그의 기사들은 눈치채지 못한 듯싶었지만.

“…그렇지만 리리카의 충고를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겠죠.”

그러나 기사들은 곧바로 죽지 않았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리리카를 보며 베를리아가 말을 덧붙였다.

“저주만 걸어 놓은 거예요. 저들이 메리쉬를 공격하려고 할 때 발휘되도록.”

그것은 베를리아가 스스로 양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선이었다. 이 정도 조치를 해 둔다면 설령 저 기사들이 전부 함께 덤벼도 메리쉬가 처치할 수 있을 터였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리리카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갑자기 왜….”

“죽이지는 않았다지만, 그저 그런 저주를 건 것은 아닐 거니까요. 강력한 힘을 썼으니… 베를리아 양, 지금 서서히 힘들죠?”

베를리아는 리리카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안심할 수 있을 정도의 저주를 걸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현재 베를리아가 건 저주를 달고 있는 저들은 그 표적이 메리쉬가 아니라고 해도 상대를 죽일 수 없을 터였다.

그래도 타인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보다는 흑마법의 부작용이 덜하니 선택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다수를 향해 마법을 거는 것은 애초에 일반적인 마법사에게도 매우 힘든 일에 속했다. 그런데 부작용이 돌아오는 흑마법을 사용했으니 베를리아의 상태가 마냥 괜찮을 리 없었다.

“…미안해요.”

베를리아가 한숨을 내쉬며 리리카에게 사과했다. 제가 억지를 부려 괜한 발걸음을 한 셈이 되었으니, 미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괜찮으니 가서 쉬어요. 돌아가기 전에만 가면 되니까.”

리리카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두 번 걸음 하는 것쯤이야 무엇이 어렵겠는가. 그에게는 베를리아의 상태가 우선이었다.

결국 두 사람은 그날 아무 소득 없이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베를리아는 한 편으로 안도했다. 카를로스의 위협은 메리쉬에게 더 이상 아무 의미도 되지 못할 것이므로.

***

베를리아가 돌아오자마자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메리쉬가 아니라 안젤라였다. 그녀가 신전의 비밀 통로를 통하여 베를리아의 방 옆 응접실로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베릴, 기별도 없이 찾아와서 미안해요.”

안젤라답게 그녀는 자신의 난데없는 방문을 먼저 사과했다. 베를리아가 자리를 권하며 답했다.

“괜찮아요. 앤지가 이런 행동을 했다면 그럴 이유가 있었겠죠.”

그녀는 소설 속에서 나오던 인물들의 모습을 더 이상 믿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그녀가 지금까지 봐 온 안젤라는 적어도 이유 없이 무례한 행동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베를리아가 너무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자, 안젤라의 표정이 잠시 아연해졌다. 그녀가 허탈하게 웃으며 베를리아에게 말했다.

“베릴도 신탁을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주신께서 말하시길, 카를로스에게 그의 반쪽과 함께 성지에 오라고 하셨다죠.”

“그랬죠.”

“방금 그 뒤를 잇는 신탁이 내려왔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베를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성지는 아무래도 에를니아의 힘이 강할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실제로 성지에 들어서자마자 에를니아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던가. 그새를 못 참고 에를니아가 또 나타난 모양이었다.

“나의 아들, 카를로스 에덴버와 그 반려가 제국을 영원토록 부흥시키리라.”

베를리아는 안젤라의 안색을 살폈다. 그녀는 어딘가 음울하면서도 초연해 보였다. 언제나 사랑스럽기 그지없던 성녀의 얼굴은 강제로 자라 버린 어른이 되어 있었다.

‘영원히.’

베를리아는 그 말을 되새겼다. 상황은 갈수록 나빠지고 있었다.

어느 나라든 흥망과 성쇠가 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 에덴버가 지금은 제국으로 존재한다고 한들 언제 제국의 자리를 내놔야 할지, 그 이름이 지도에서 지워질지 알 수 없었다. 여태껏 많은 나라가 그래 왔고, 에덴버만이 예외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에를니아가 지금 그 예외를 만들었다.

카를로스가 있으면 제국은 절대 멸망하지 않는다. 참, 편애적인 대우였다.

“…카를로스가 누군가를 지목하는 순간 한 마디 거부도 못 하고 그놈과 결혼해야겠군요.”

베를리아는 안젤라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그제야 알아차렸다. 신탁은 전적으로 카를로스에게 유리했다. 이런 상황에 그가 혼인의 상대로 정할 게 누구인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냉정하게 말해서 카를로스가 여전히 베를리아에게 집착과 미련을 두고 있다지만, 그는 절대 그녀를 제 황태자비로 맞아들이지 않을 것이 뻔했다. 왜냐하면… 베를리아는 본디 귀족이 아니니까.

‘제 핏줄에 흐르는 어머니의 피에도 예민한 그놈이라면 뻔한 일이지.’

카를로스가 떠오르자 베를리아는 속으로 이죽거렸다. 그는 힘없이 죽어간 제 어머니를 안타까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단 하나의 지지기반도 되어 주지 못하는 어머니를 원망했다.

‘내가 적통 황자였다면 좋았을 텐데.’

약소국의 핏줄이라며 무시당하고 천대받을 때마다 카를로스가 했던 말이었다. 현 황제의 황후와 황비는 각각 개국공신 가문의 공작가와 후작가의 딸이었다. 다른 이들에 비해 이국인의 피가 섞인 카를로스는 다른 이들보다 적통성이 떨어졌다. 그리고 그는 늘 그것을 보충하고 싶어했다.

그런 의미에서 안젤라와의 결합은 완벽했다. 신의 딸, 오직 그 피만이 다른 귀족들보다도 더 위로 올라설 수 있었다.

그러니 카를로스의 선택이 안젤라일 수밖에.

“…앤지는 여전히 카를로스 에덴버와의 결혼을 원하지 않나요?”

상황 판단이 완벽히 끝나자 베를리아가 물었다. 돕고 말고는 자신의 자유였지만, 우선은 안젤라의 정확한 의사를 알아야만 했다.

“그래요, 나는 혼인하고 싶지 않아요.”

안젤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행동에는 주저따위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신의 뜻에 맞설 수 없죠.”

안젤라는 신의 딸이라 불리는 성녀였다. 카를로스의 반려에 관한 것은 무려, 주신 에를니아가 직접 내린 이야기였다. 그러니 그녀가 싫다고 한들, 안젤라를 보호할 유일한 곳인 신전조차도 들어주지 않을 터였다.

“무리하지 않아도 좋아요, 그저 신탁이 카를로스의 귀에 들어가는 것만 늦춰지는 정도로 도와주면….”

“앤지.”

갑자기 도와달라고 하기에는 염치가 없던 탓에 안젤라의 말이 길어졌다. 그만큼 그녀는 절박했다. 베를리아가 그 말을 끊고 안젤라를 불렀다.

“일전에 당신이 므시아를 역병으로부터 도왔을 때, 나는 훗날 그것을 갚겠노라 했어요. 거기에 내가 덧붙였던 조건 기억나요?”

베를리아가 안젤라와 똑바로 시선을 마주쳤다. 마치 자신을 믿으라고 이야기해 주는 것처럼. 멍하니 그녀를 보던 안젤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진짜 원하는 것일 때, 들어주시겠다고….”

안젤라의 말끝이 흐려졌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에는 한 가닥의 희망이 피어올라 싹을 틔우고 있었다.

“그래요. 원하는 것만 말해요, 앤지.”

베를리아가 안젤라의 희망에 햇살을 내리듯 말을 이었다.

“뭐든지, 이뤄 주는 것은 내가 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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