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신이란 무엇인가?(9)
“멜, 나 진짜 괜찮아.”
베를리아가 메리쉬를 달래듯이 말헀다. 에를니아가 그녀에게 다시 등장한 이후로 그는 한순간도 긴장을 풀지 못했다. 메리쉬는 마치 분리 불안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베를리아의 곁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제가 있어야 베를리아가 괜찮다고 했잖아요.”
“그렇지만 멜, 너 어젯밤도 못 잤잖아.”
메리쉬의 반박에 베를리아가 한숨을 삼켰다. 그래도 저택을 떠나 외부로 나왔으니 오는 길이 피곤했을 터였다. 그러나 밤을 보내고 일어난 그에게서는 잠을 잔 티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메리쉬가 침대 위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음을 금방 알아차렸다.
“네가 남들보다 튼튼하다고 하지만, 매번 이런 식으로 버틸 수는 없어. 알잖아.”
메리쉬의 입이 꾹 다물렸다. 그도 알고 있었다. 메리쉬는 인간이다. 그가 얼마나 강건한지는 별개로 평생토록 잠을 자지 않고 살 수는 없었다.
“제가 잠든 사이 에를니아가 베릴의 의식 속을 파고들면, 그래서 제가 베릴을 놓치면 어떻게 해요.”
메리쉬가 두 팔을 베를리아의 허리에 감고 그녀의 배에 고개를 묻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는 베를리아가 단두대에 오를 뻔한 뒤부터 제대로 잔 적이 없었다. 잠에 들어도 불안감이 금방 그를 깨우고는 했기 때문이었다.
메리쉬는 철저히 이 사실을 베를리아에게 숨겼다. 숨소리를 속이는 것쯤이야 그에게는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연인이 되기 전까지 그들은 다른 방을 썼다. 보통의 인간은 범접할 수 없는 신체적 능력을 지닌 메리쉬에게 얼마 정도 못 자는 것 역시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그런 메리쉬가 오늘 이렇게 베를리아에게 들키고 만 것은 마침내 그에게도 한계가 온 탓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베를리아와 연인이 된 뒤로는 곁에서 지킬 수 있으니 조금이라도 눈을 붙여 왔지만, 에를니아가 나타났다는 말을 들은 뒤로는 그 잠깐조차 잠을 잘 수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멜, 그저 잠을 자는 것뿐이야.”
“베릴, 전에도… 그저 잠시 임무를 다녀온 사이에 당신이 사라졌어요.”
메리쉬가 피곤한 눈을 꾹 감으며 말했다. 그는 종종 지극히 불안하고 두려웠다.
베를리아를 가두었던 그 회색의 감옥. 그곳으로 그녀가 끝내 메리쉬를 부르지 않았더라면, 그가 마지막으로 찾았을 베를리아의 흔적은 그녀의 잘려 나간 목뿐이었을 것이다.
“…멜.”
베를리아는 그의 이름을 입에 담을 뿐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어쩌면 암암리에 메리쉬가 괜찮아졌으리라 생각했었던 것 같았다. 그가 여태까지 그것을 두고두고 되새기고 있을 줄은 몰랐다.
트라우마란 생각보다 인간의 안에 깊은 상흔을 남긴다. 그리고 그것은 때때로 우리가 즐거움에 빠져 그것을 잊고 있었을 때, 모든 것을 휩쓸어가 버린다. 마치 신나게 쌓은 모래성을 단번에 앗아가는 파도처럼.
이곳까지 절대 닿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파도는 간혹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아주 먼 곳까지 밀려들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는 파도가 남긴 자국을 유심히 봐야만 한다. 파도는 언제든 다시 그곳으로 찾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미안해, 멜. 네가 여전히 괴로워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
그녀는 자신이 이곳에 온 뒤로 너무 들떠 있었음을 재차 인정했다. 카를로스도 안젤라도, 그녀가 책으로만 보며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살아 있었고 그러니 메리쉬의 상처도 가벼울 리가 없었다.
하물며 메리쉬는 제 온 세상을 차지하고 있던 존재의 상실을 겪을 뻔했다. 그녀는 자신이 조금 더 섬세하게 메리쉬의 상처를 보듬었어야 했노라 후회했다.
“그래도 이렇게 계속 무리하는 건 안 돼. 내가 만약 상태가 이상하면 곧바로 널 깨울게, 그러니까 지금은 좀 자. 카를로스를 끌어내릴 때까지 앞으로 계속 일이 많을 텐데 지금처럼 무리하면 못 버텨.”
베를리아가 조곤조곤 메리쉬를 달랬다. 그가 마음이 편해질 때까지 여유롭게 토닥여 줄 수 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카를로스가 메리쉬를 노리고 있었다. 이 시점에 신체의 피로까지 더해진다면 하등 좋을 게 없었다.
“…그러면 잠깐만 잘게요.”
베를리아가 카를로스까지 들먹이자 그제야 메리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억지로 눈을 감았다. 오랫동안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눈이 뻑뻑하니 아팠다. 그러나 좀처럼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
그 뒤로 메리쉬는 한참을 뒤척이고 나서야 잠이 들었다. 베를리아는 그가 자신이 오늘 알아차린 것보다 훨씬 긴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지 않고야 남들보다 월등한 신체 능력을 지닌 메리쉬가 이렇게 지쳐 잠들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동안 내 앞에서 괜찮은 척해 왔던 거구나.’
베를리아의 손이 안쓰러움을 담아 메리쉬의 머리칼을 살살 매만졌다. 제게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썼을 그가 한없이 안타까웠다.
‘너는 항상 내 앞에서는 괜찮은 척을 해.’
메리쉬를 보며 생각하던 그녀의 손이 멈칫했다.
‘…항상?’
그녀는 마침내, 자신이 하던 생각에 문득 의문을 가졌다. 아무리 이 베를리아에게 빙의한 지 꽤 시간이 흘렀다지만 방금 자신이 떠올린 생각은 너무 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그녀가 개인적으로 메리쉬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나는 …야.’
순간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녀의 머릿속에 소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과거의 자신이자… 이제는 얼굴조차 기억도 나지 않는 자신의 어렴풋한 모습이. 그리고 꿈의 한 자락이.
꿈에서 제 어린 시절의 모습을 한 소녀는 그녀에게 자꾸만 자신이 누구인지 말하려고 했다. 그 목소리가 전부 들리지 않아 그게 어떤 이름이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대체 내가 누구라는 거야?’
아이가 주장하는 자신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그녀는 더 이상 저번부터 떠오르는 위화감을 무시할 수 없었다.
애초에 누군가에게 빙의했다는 것 자체가 현대 세계를 살다 온 그녀에게는 과학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그저 넘어간 것은 그녀가 자신이 원래 살던 세계에 미련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살던 현대 세상에서의 이름도, 외모도 기억나지 않았지만, 어딘가 소속되지 못한 채로 둥둥섬처럼 끝없이 부유하던 지독한 고독은 선명했다. 가족은 처음부터 그녀의 안식처가 아니었고 다른 누구에게도 마음을 붙일 수 없었다. 그곳은 그녀가 철저히 고립된 세계였다.
그러니 빙의한 후에 원래 제 이름이나 외모가 생각나지 않아도 그러려니 했었다. 이 세계의 악녀에게 어떻게 빙의했는지 그 방법도 이유도 몰랐다. 그래서 그 과정 중에 기억의 상실이 있는 것쯤이야 이상할 것 없다 생각했다.
그러나 어쨌든 제가 어떤 모습, 어떤 이름으로 살았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것이 빙의의 후유증이 아니라면… 다분히 이상한 일이었다. 도리어 그녀에게 ‘진짜 베를리아’의 기억은 종종 지나치게 선명히 찾아들지 않았던가.
‘아이야, 네가 알 필요 없는 것이다.’
쉼 없이 지끈거리던 머리가 다시 음성 하나를 토해냈다. 그것은 그녀가 아는 자의 목소리였다.
주신, 에를니아.
‘설마… 에를니아가 내 기억에 손을 댄 건가?’
그녀의 표정이 바짝 굳어 버렸다. 지금까지는 떠올리지 못했던 가정이었다. 그녀는 그 이유를 금방 깨달았다.
기억에 손을 댈 수 있다면 의식이나 생각까지도 영향을 끼치지 못하리란 법도 없었다. 어쩌면 에를니아가 그녀의 생각이 여기까지 닿지 못하도록 손을 썼을 수도 있겠다는 하나의 가정이 떠올랐다.
‘그럼 이제야 이런 생각이 가능해진 까닭은… 아마도 메리쉬가 에를니아의 수작을 흩트려 놨기 때문인 걸까? 아니면 꿈속에서 내가 만났던 존재들이 나를 도와줬기 때문에?’
본디 암시란 작은 틈이 점차 큰 균열이 되어 무너지는 것이었다. 즉, 지금까지 에를니아가 베를리아에게 행하던 것들이 어긋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그 틈을 메꾸기 전에 완전히 깨 버려야 해.’
메리쉬가 에를니아의 세뇌에서 그녀를 깨운 것도, 에를니아의 세뇌 중 다른 존재가 끼어든 것도 모두 전에는 없던 일이었다. 그러나 이게 일시적인 행운으로 그칠지 혹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효과가 있을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니 때를 놓치지 말아야 했다. 베를리아가 자리에서 조심히 일어났다. 메리쉬는 아직 잠에 들어 있었다. 그녀는 협탁 위에 쪽지를 남겨 둔 후 방을 나섰다.
언제까지나 메리쉬가 불안에 떨며 잠도 제대로 못 자게 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주신 에를니아의 손에 놀아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그녀의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잠깐만, 메리쉬가 깨기 전까지만, 혹은 깨고 나서도 쪽지의 내용을 보고 기다릴 수 있을 정도까지만. 딱 그 정도의 시간만 다녀오면 되리라 여겼다.
***
똑똑똑.
“리리카, 할 말이 있어요.”
베를리아가 찾아간 곳은 리리카의 방이었다. 그녀가 노크를 하자마자 빠르게 문이 열렸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베를리아 양.”
리리카는 마치 베를리아가 자신을 찾아올 줄 알았던 것처럼 이야기했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그가 알고 있지만 자신에게 말해 줄 수 없던 것들, 그것을 스스로 알게 될 타이밍이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리리카가 성지에 오면 에를니아를 막을 방법이 있다고 했잖아요. 그 방법을 지금 알려줬으면 좋겠어요.”
그를 위해서 카를로스의 말이 탐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성지로 가는 일행이 꾸려지는 과정을 돕기까지 했다. 그러니 이제는 그 결실을 거둘 때였다.
“좋아요. 따라와요, 베를리아 양.”
리리카가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방을 나섰다. 그는 흡사 이미 모든 것을 준비해 둔 사람 같았다.
“여기서 멀리 가야 하나요?”
“염려하지 않아도 좋아요, 메리쉬가 걱정하기 전에 돌아올 수 있을 테니.”
베를리아의 질문에 리리카가 웃으며 답했다. 그제야 그녀는 발걸음 가볍게 그를 따라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