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깽판치는악녀님 (93)화 (93/148)

93화. 신이란 무엇인가?(8)


 

‘아이야.’

그 목소리였다. 베를리아의 꿈속에서 그녀를 조종하려던 목소리, 에를니아.

‘어찌하여 사랑하는 이와 대적하려 하느냐.’

‘꺼져…!’

베를리아가 속으로 아득바득 이를 갈았다. 에를니아는 마치 그녀가 당연히 카를로스를 사랑한다는 듯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신이나 그 자식이나 역겹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몸이 굳어 움직이질 않았다. 베를리아가 이를 악물었다.

그 순간 손 하나가 베를리아의 허리 쪽으로 쑥 들어왔다. 단단한 팔이 그녀를 카를로스로부터 떼어놓았다.

“베릴, 숨 쉬어요. 천천히.”

메리쉬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오자 베를리아가 느릿하게 숨을 토해냈다. 그녀는 그제야 자신이 숨조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베릴.”

“더 이상 다가오지 마라.”

베를리아에게로 다가오려는 카를로스를 메리쉬가 막아섰다. 그녀가 카를로스를 적대한 순간부터, 그가 기사들에게 눈짓해 귀족들을 모두 물려놓은 덕에 편히 말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베를리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메리쉬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성지에 막 도착했을 때까지는 괜찮았다. 그 말인즉 카를로스와 가까이했기 때문에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베를리아로부터 카를로스를 떼어놓아야만 했다. 그리고 지금 메리쉬에게는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었다.

“네가 뭔데…!”

“연인에게 들러붙은 놈을 떼어낼 정도의 권리는 있지.”

카를로스가 울컥하여 소리치자 메리쉬가 일갈했다. 그리고는 그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게다가 넌 이제 베릴에게 있어 아무것도 아니지 않나.”

카를로스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메리쉬의 말이 그의 정곡을 찔러버린 탓이었다.

카를로스가 베를리아를 쳐다봤다. 그는 마치 잠시 작동이 멈추기라도 한 마도구처럼 삐걱댔다.

“내가, 베릴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카를로스는 방금 메리쉬가 말한 사실을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처럼 그 말을 되뇄다. 그리고 거기에 마지막 선고처럼 메리쉬가 대답했다.

“그럼 네가 여태껏 베릴에게 대단한 존재일 줄 알았나?”

메리쉬가 삐뚜름히 카를로스를 비웃었다. 그가 베를리아를 얼마나 엉망진창으로 대했는지는 그녀의 그림자로 살았던 메리쉬가 가장 잘 알았다. 그렇게 사람을 깎아 내리고, 휘두르고, 종래에는 버린 주제에 마음을 바라다니. 몰염치도 이런 몰염치가 없었다.

“…그러니까 말이야.”

메리쉬에게 안겨 있는 동안 에를니아의 음성이 지워졌다. 그러자 드디어 목소리가 나왔다. 베를리아가 뒤늦게 말을 꺼냈다.

“어떻게 아직도 저따위가 내게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건지.”

베를리아의 서늘한 눈이 카를로스를 향했다. 그녀의 시선이 멸시를 감추지 않은 채 그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훑어봤다.

“뻔뻔하고 염치없기도, 저리 없을 수가 없어.”

메리쉬의 품에서 느껴지는 그의 체향이 베를리아의 머리를 맑게 만들었다. 메리쉬와 함께 있을 뿐인데 어째서 이토록 진정이 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덕에 그녀는 에를니아의 방해 없이 말을 이을 수 있었다.

“만약 네가 내게 남은 마지막 의미가 있다면… 나는 네가 너무 싫다는 거야.”

그녀가 빙의했을 때부터 쭉 해온 말이었다. 카를로스는 귓구멍이 막히기라도 했는지 도통 들어먹지를 않았지만.

“나는 네가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아니, 네가 죽지도 못한 채 평생을 불행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베를리아가 담담히 말했다. 거기에는 커다랗고 격렬한 감정 따위는 단 하나도 들어있지 않았다.

그저 진실로 그녀는 카를로스가 사라지길, 불행하길 바랐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그 감정에 자신을 불살라 함께 불행해지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나도, 내 사람도 건드릴 생각하지 마.”

베를리아가 두 팔을 메리쉬의 목에 두르며 그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메리쉬와 빈틈없이 밀착한 채로 카를로스에게 경고했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건드리면… 내가 회까닥 돌아버리잖아.”

황태자의 미친개. 그건 옛말이었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었다. 제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베를리아는 무엇도 주저하지 않는다는 것.

“베릴.”

카를로스가 일그러진 얼굴로 베를리아를 바라봤다. 그녀가 몇 번이고 그를 거부했으나, 카를로스는 믿을 수 없었다. 믿지 않았다.

그만큼 지독하게 자신을 사랑했던 베를리아였다. 그게 어떻게 변할 수 있단 말인가.

“너 따위, 이제 내 예외에 속하지 않으니까.”

물론 그녀는 카를로스가 그러건 말건 상관하지 않았다. 카를로스가 베를리아의 모든 예외였던 나날들은 그녀가 빙의함으로써 끝이 났으므로.

베를리아의 시선이 가만히 카를로스를 압박했다. 리리카의 말대로, 진짜 베를리아의 기억대로라면 그가 메리쉬를 죽이려고 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했다. 자신은 메리쉬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럴 힘도, 사람도 있었다. 그러니 카를로스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그동안 카를로스가 메리쉬를 어찌할까 봐 불안에 떨었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가자, 메리쉬.”

베를리아가 카를로스에게 먼저 등을 돌렸다. 그 옆에는 나란히 메리쉬가 있었다.

카를로스는 그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어쩌면 자신이 베를리아를 영영 잃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일순 뇌리를 스쳤다.

“아니야. 저자만 없으면 돼.”

그러나 카를로스는 그 생각을 부정했다.

만약에 베를리아가 단두대에 올라 그대로 죽었다면, 카를로스는 지금쯤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베를리아가 카를로스를 위하여 남겨놓은 것들을 고스란히 취했더라면 그녀의 부재 따위 느끼지 못했을 터였다.

그러나 베를리아가 죽지 않고 제 힘을 거둬감으로써, 카를로스는 그녀가 사랑으로 주었던 것들의 부재를 고스란히 알아버렸다.

그래서 카를로스는 이전과 달리 베를리아를 죽일 수 없었다. 그는 베를리아가 필요했다.

그러니까… 메리쉬만 없다면 베를리아는 제게 돌아올 터였다. 카를로스는 그렇게 생각해야만 했다.

***

“미안해요, 도와주지 못해서.”

“괜찮아요, 멜이 있었으니까. 잘 숨어 있었어요.”

카를로스가 다가오자 멀리 떨어져 몸을 숨겼던 리리카가 베를리아에게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카를로스는 성력에 예민한 자였고, 리리카의 성력은 어쩌면 현존하는 성녀와 교황의 것을 뛰어넘을지도 몰랐다. 그런 그가 카를로스와 가까이 있다 보면 정체를 들키는 것도 순식간일 터였다.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리리카도 먼저 몸을 숨긴 것이었다. 베를리아도 그게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했고.

그러나 베를리아의 말을 듣는 순간 리리카의 시선은 오히려 흐릿해졌다. 잠시, 미묘한 표정을 지었던 그가 평소처럼 웃었다. 광대처럼.

“그럼요, 베를리아 양의 곁에는 항상 메리쉬가 있을 테니까요.”

그 말은 다행이란 것 같기도 했고… 마치 다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다짐이 무엇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보다 베를리아 양, 아까 왜 갑자기 말을 멈췄죠?”

멀리서이지만 베를리아를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리리카의 물음에 풀어졌던 베를리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또, 에를니아의 목소리가 들렸어요.”

“저번처럼 황태자를 사랑하라던가, 그런 소리를 하던가요?”

메리쉬가 미간을 확 찌푸렸다. 눈앞에 있는 카를로스는 위협을 가하여 쫓아낼 수라도 있지만, 어디에 있는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주신 에를니아는 제재할 수조차 없었다. 그게 더욱 화를 치밀게 했다.

그러나 메리쉬는 화를 꾹 내리 참았다. 그 대상이 앞에 존재하는 것도 아닌데, 괜히 베를리아가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미간을 찌푸리는 것만이 메리쉬가 최대로 참을 수 있는 한계였다.

“그래, 그런데 멜 네가 나를 안고 있으니 괜찮아졌어.”

그러고 보니 에를니아가 베를리아의 꿈에 파고들어 세뇌하려고 했을 때도 그녀를 깨운 사람이 메리쉬였다. 의아했다. 베를리아 혼자서는 도통 벗어날 수 없던 에를니아의 힘에서 어떻게 메리쉬의 존재만이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인지.

“…그건 아마도, 베를리아 양이 메리쉬를 많이 사랑하기 때문이겠죠.”

리리카가 한발 늦게 입을 열었다. 그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에를니아라고 해서 인간의 마음을 조종할 수는 없거든요.”

그건 또 처음 듣는 소리였다. 베를리아가 의문을 표하기 전에 리리카가 먼저 설명했다.

“대개 다들 신은 전지전능할 거라고 생각하죠. 그러나 꼭 그렇지만도 않아요.”

그건 리리카의 입장으로선 아주 다행인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베를리아에게 마지막 기회를 줄 수 있었으니까.

“신마다 가지고 있는 권능이 다르거든요. 그리고 그 권능 밖의 것에서는 권능만큼 힘을 못 쓰죠.”

리리카의 말은 마치 신이 여럿 존재한다는 것처럼 들렸다. 그녀가 읽었던 원작에서는 이 역시도 나오지 않았던 말이었다. 그러나 그의 말이 이어졌기에 베를리아는 떠오른 생각을 나중에 물어보기로 했다.

“사랑만 해도 그래요. 우리는 사랑을 단 한 단어로 표현하지만, 그 안에는 애틋함, 그리움, 설레임 그 모든 것이 들어 있잖아요. 그 모든 감정을 에를니아 혼자서 거짓으로 조종할 수는 없어요. 그래서 인간의 마음은 신이 건드리기 힘든 부분이에요. 생각을 조종하면 몰라도.”

베를리아는 에를리아가 자꾸만 그녀에게 카를로스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처럼 말한 이유를 깨달았다. 리리카의 말대로라면 마음을 움직이기는 어려우니 생각을 거짓으로 만들어내려는 것이었을 터였다.

“다행이네요. 그래도 에를니아의 힘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아서.”

리리카가 안도한 듯이 말했다. 그 표정이 어딘가 초연한 것 같았다. 그는 평소와 똑같이 광대처럼 웃고 있었으나 어쩐지 그녀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메리쉬, 어떤 순간이라도 베를리아 양의 곁에 있어주세요.”

리리카가 메리쉬에게 당부했다. 그리고는 베를리아를 돌아봤다.

“그거라면 다 괜찮을 거예요.”

리리카의 그 말이 어쩐지 베를리아를 달래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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