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신이란 무엇인가?(7)
황태자를 성지까지 보필할 일행은 빠르게 꾸려졌다. 오랜 신의 침묵 끝에 내려온 신탁이었다. 듣기로는 황제가 들떠 황궁의 관리들을 직접 채근하였다고 했다. 베를리아가 황제의 측근을 매수해 그를 부채질한 보람이 있었다.
그리하여 지금, 성지로 가기 위해 모인 일행이 막 수도의 성문을 나서고 있었다.
“베를리아 양과 황태자는 최대한 떨어져 있는 것이 좋아요. 에를니아의 목적이 저번과 같다면 말이죠.”
리리카가 베를리아의 옆에 붙어, 앞쪽에 있는 카를로스를 보며 속닥였다. 그는 후드를 뒤집어쓴 채 베를리아의 수하 중 하나로 위장하여 이 일행에 숨어 있었다.
베를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리리카의 말이 옳았다. 에를니아가 카를로스 옆에 베를리아를 붙여 놓고자 한다면 그녀는 필히 카를로스의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아야만 했다.
“그래도 성녀님이 있으니 나한테 쉽게 접근하지는 못할 거예요.”
실제로 일행이 출발한 이후 카를로스가 따로 베를리아에게 말을 걸어 온 적은 없었다. 아무래도 안젤라가 그의 곁에 있다 보니, 아무리 얼굴에 철판을 깐 카를로스라고 할지라도 쉽게 나서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호위가 과도하게 많은 것 같군요.”
메리쉬가 불쾌하다는 듯이 말했다. 겉으로 보이는 일행은 황태자와 성녀를 호위하기에 적당한 인원만을 꾸린 터라, 베를리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숨어 있는 자들이 있어요. 그것도 상당히.”
메리쉬가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자 리리카가 갑자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얼마나 많은데요? 지금 호위하고 있는 인원들보다도 많습니까?”
그 어조가 어쩐지 다급해 보였다.
“엇비슷할 거 같군. 아니… 신전의 호위들을 제외하고, 황실의 기사들만 따진다면 도리어 숨어 있는 이들이 더 많을지도.”
메리쉬의 말에 리리카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일행들은 앞으로 가는데, 그가 가만히 서 있으니 베를리아와 메리쉬 또한 행렬에서 뒤처지게 되었다.
“리리카, 왜 그래요?”
행렬에서 멀어지면 베를리아를 포함한 세 사람이 눈에 띌 것이 뻔했다. 리리카의 존재는 비밀이었기에, 이는 좋은 방향이 아니었다.
황태자와 성녀를 호위하는 기사들 빼고는 귀족들 각자의 일행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러므로 최대한 눈에 띄는 행동은 지양해야만 했다.
일행이 적은 것은 다들 급하게 떠나게 된 데다, 성지로 떠나는 길은 그다지 위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성지가 산지에 있어서 그렇지, 신성 제국인 에덴버는 성지로 가는 길을 아주 잘 정비해 놓았다. 그 덕에 가는 길은 심하게 험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이 나라에서 신을 믿지 않는 것은 죄악시됐다. 그로 인해 대다수 백성이 가진 신앙심이 지나치게 돈독한 까닭에 산적들도 웬만해서는 성지로 가는 길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러니 호위가 많이 필요할 리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무리 황태자가 그림자 호위를 데리고 다닌다 할지라도 그 수가 많은 것은 꽤 이상한 일이었다.
“베릴, 흑마법을 써 주세요.”
리리카가 베를리아에게 말했다. 갑작스러운 요청이 의아했으나, 그녀는 곧 그의 요청대로 흑마법을 사용했다. 주변의 공기가 일렁거리고, 세 사람이 있는 곳의 ‘질서’가 어그러졌다. 공기를 통해 전달되던 소리가 그대로 멈추었다. 그것을 확인한 리리카가 곧바로 그녀와 메리쉬를 이끌고 일행에서 잠깐 벗어났다. 비밀리에 말을 꺼내기 위해서였다.
“짧게 말할 테니 지금부터 제 말 잘 들으세요, 메리쉬.”
리리카가 말을 꺼낸 방향은 베를리아를 향하지 않았다. 그는 메리쉬를 똑바로 바라본 채 목소리를 잔뜩 낮추어 말을 이었다. 방금 베를리아가 흑마법으로 주변을 차단하기는 했으나 사안이 사안인지라 조심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당신은 황태자를 조심해야만 해요.”
리리카는 마치 그 일을 겪어 본 적이 있는 사람처럼 확신에 차 있었다.
“황태자는 기필코 당신을 해하려 들 테니까.”
베를리아의 표정이 굳었다. 절대로 그냥 넘길 수 없는 발언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죠?”
“황태자는 메리쉬만 없으면 베를리아가 자신에게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니까요.”
베를리아의 마음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은 소리였다. 그녀가 정색하며 말을 받았다.
“난 누군가의 소유물이 아니에요.”
“황태자도 그렇게 생각하리라 자신할 수 있나요?”
리리카의 말에 베를리아의 입이 다물렸다. 이미 그녀를 대하는 카를로스의 태도를 통해 알고 있지 않은가.
카를로스 에덴버는 베를리아 리들턴의 마음 따위 단 한 치도 고려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럼 저 많은 기척이 모두 나를 노리고 준비해 둔 거라는 말인가?”
메리쉬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황태자씩이나 되어서 저 하나 잡자고 이런 일을 벌이다니,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었다.
숨어 있는 자들은 상당한 실력자들이었고 그런 이들이 숨긴 기척을 이만큼이나 예민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은 메리쉬뿐이었다. 아무래도 베를리아나 리리카의 예상보다도 일행을 몰래 따라오고 있는 자들의 수가 더 많은 모양이었다.
“…카를로스 에덴버라면 가능한 일이야.”
베를리아의 반응은 메리쉬와 달랐다. 카를로스는 이미 이전에도 그를 죽이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베를리아는 황태자의 말을 거부했다.
“내가 네게 해를 끼치는 걸 막으리라는 것을 알 테니까.”
베를리아와 메리쉬의 전력만으로도 웬만한 이들로는 소용도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두 사람이 함께 있다면 황태자가 눈에 보이게 데려온 자들과 그의 그림자 모두 끌어들인다고 한들 이기리라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베를리아 양과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요. 황태자는 분명 그때를 노릴 거예요.”
“그래, 조심하는 게 좋겠어. 미친놈은 원래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리리카의 말에 베를리아가 맞장구쳤다. 눈이 돌아 그녀에게 집착하던 카를로스를 생각하면 어떤 짓이든 하고도 남을 놈이었다.
“…알겠어요, 베릴.”
베를리아의 염려에 결국 메리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위기감은 들지 않았다. 그것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었다.
메리쉬에게 기척을 읽힐 만큼의 상대들. 그런 이들이 여럿이 된다 한들 객관적으로 그에게 위험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어떤 사고라도 일어나지 않는 이상, 황태자가 그를 위협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대화가 끝난 후 세 사람은 다시 원래 빠진 적도 없는 것처럼 일행에 섞여들었다. 그 순간 정확히 메리쉬와 황태자의 시선이 마주쳤다.
메리쉬는 별안간 어쩌면 황태자가 그림자 호위조차 그에게는 위협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황태자는 무엇을 노리고, 어떤 방식으로 메리쉬를 해할 것이란 말인가. 아직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성지로 가는 길은 어렵지 않았다. 성지가 있는 산 입구의 신전에서 성지로 바로 갈 수 있는 워프 게이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허가 받은 자들만이 이용할 수 있었고 하루에 이용할 수 있는 인원이 정해져 있었지만, 무려 황태자의 행차였다. 그런 게 문제가 될 리 없었다.
그리고 성지에 도착하자마자 베를리아는 제 입과 코를 손으로 막았다.
‘이게 무슨….’
베를리아는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성지에 가득히 차 있는 신성력을 느끼자마자 역겨운 것이라도 들이마신 듯이 속이 울렁거렸다.
“베릴?”
베를리아의 이상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메리쉬가 그녀를 붙잡았다. 베를리아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그에게 힘없이 기댔다. 폐부로 들어오는 공기가 죄 역겨워 죽을 것만 같았다.
“곧 괜찮아질 거예요, 조금만 참아요.”
그때 리리카가 베를리아의 손을 잡아 왔다. 맞닿은 피부 사이로 그의 신성력이 흘러들었다.
“이제 천천히 숨을 쉬어요.”
리리카가 말했다. 그 말에 베를리아는 참고 있던 숨을 조금씩 내쉬고 들이쉬었다. 그러자 정말 그의 말대로 숨 쉬는 것이 조금씩 편해졌다. 더 이상 공기가 역겹지 않았다.
“이제 괜찮나요, 베릴?”
베를리아가 괜찮아 보이자 메리쉬는 은근슬쩍 베를리아를 붙잡은 리리카의 손을 떼어냈다. 리리카가 머쓱하게 물러나는 것을 보며 베를리아가 말했다.
“응, 이제 괜찮아. 고마워요, 리리카. 덕분에 한결 나아졌어요.”
“성지에 있는 동안 종종 이럴지도 몰라요. 그러면 내게 말해 줘요.”
방금 질투심에 리리카의 손을 떼어냈으면서도 메리쉬는 베를리아가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가 언제 질투했냐는 듯 곧바로 리리카의 말을 이었다.
“그래요. 그냥 참지 말고 도움 받아요, 베릴.”
“그럼 부탁할게요, 리리카.”
“기꺼이요.”
메리쉬가 베를리아와 손을 맞잡았다. 자신이 그녀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생각에 질투도 나고, 억울하기도 했다. 그래도 베를리아가 나아질 방법이 있다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베릴.”
그리고 그들의 대화 사이로 타인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세 사람이 몸을 돌리니 카를로스가 거기 서 있었다.
“안젤라는 어쩌고 내 쪽으로 와?”
카를로스를 보자마자 베를리아는 노골적으로 얼굴을 구겼다. 그녀가 결코 곱지 않은 어투로 그에게 말했다.
“하나뿐인 성녀가 성지에 왔으니, 대신전을 둘러보아야지.”
대륙 상의 신전 중에서는 성지에 있는 신전이 당연히 가장 컸다. 그만큼 돌봐야 할 곳도 많았다. 신전의 최고 권위자는 성녀와 교황이었으니, 아무래도 안젤라가 대신전의 동태를 먼저 살피러 간 모양이었다.
“박쥐 같은 놈.”
그것을 보며 베를리아가 중얼거렸다. 제 필요에 따라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왔다 갔다 하느라 정신없는 카를로스의 꼴을 보아하니 딱 우화에 나오는 박쥐 같았다.
“이제야 틈이 났을 뿐이야.”
카를로스가 변명하듯이 말했다. 물론 베를리아에게는 그가 변명하든, 화를 내든, 어떤 염병을 떨든 중요하지 않았다.
“제게 친한 척하지 말아 주시겠습니까, 황태자 전하.”
베를리아가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많은 귀족이 보고 있는 와중에 제게 굳이 다가온 카를로스가 대단히 얄미웠기 때문이다.
그러자 카를로스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모두의 앞에서 대놓고 질척인다는 소리를 들은 셈이었다.
“저는 황태자 전하가….”
싫습니다, 라고 말하려던 베를리아의 입이 다물렸다. 갑작스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