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신이란 무엇인가?(6)
새까만 공간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나는 …야.’
그곳에서 그녀는 소녀와 마주하고 있었다. 과거의 자신이었다.
‘네가 누구라는 거야?’
입을 벙긋거렸으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답답함에 몇 번이고 더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여전히 말은 그녀의 안에서만 맴돌 뿐이었다.
‘기억해 내, 나는 …야.’
소녀가 다시 아까와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어쩐지 가장 중요할 것 같은 부분만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왜, 닮은 것 같지?’
과거의 제 모습을 한 아이가 하는 말을 입 모양으로라도 알아듣기 위해 아이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어쩐지… 아이가 베를리아 리들턴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아이가 머리와 눈 색을 바꾼 채 자라면 베를리아와 쌍둥이처럼 비슷할 것 같았다.
“아이야, 네가 알 필요 없는 것이다.”
그 순간 공간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누군가 그녀의 두 눈을 가렸다. 새하얀 안대를 눈앞에 두른 듯한 막막함. 시야뿐만 아니라 머릿속도 표백되는 듯한 몽롱한 감각. 의식이 흐려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이의 얼굴이… 누굴 닮았더라?’
눈을 통해 들어온 하얀 빛이 뇌 속을 점령했다. 방금까지 제 과거의 모습이 누군가를 닮았다고 생각한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녀가 멍하니 생각했다.
“잊어라, 잊고 돌아가서….”
갑작스럽게 나타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닥였다. 목소리가 정확히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지만, 그 목소리가 말하는 대로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세뇌당하듯이 고개가 끄덕여지려던 그때, 또 다른 음성이 들려왔다.
“에를니아! 썩 꺼지지 못할까!”
“감히 우리의 아이에게 또 손을 대!”
분노에 찬 목소리들이 공간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 순간 막혀 있던 시야가 탁 트였다.
‘잊어라, 잊고 돌아가서….’
“싫어.”
그녀의 몽롱한 의식 속에 목소리가 뭐라고 속닥였는지 선명하게 떠올랐다.
‘카를로스, 내 아이를 사랑하렴.’
“내가 그딴 놈을 두 번씩이나 사랑할 거 같아…!”
그녀가 분노에 차서 외쳤다.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온 소리였다.
쩌적.
별안간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들어보니 그대로 공간에 금이 가며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안 돼…!”
‘에를니아’라고 불렸던 목소리가 다급하게 말했다. 하얀 광휘가 그녀에게로 훅 다가왔다.
‘일어나요, 베릴.’
그 앞을 또 다른 빛이 막아서는 것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그대로 무너지는 공간과 함께 그녀의 몸이 아래로 훅 추락했다.
그러나 왜인지…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
화려한 샹들리에에서 나오는 빛이 눈에 들어왔다. 베를리아는 정신이 들자마자 이곳이 자신의 방임을 인지했다.
“베릴, 정신이 들어요?”
베를리아의 시야에 메리쉬가 들어왔다. 그녀가 두 팔을 뻗어 그를 와락 껴안았다.
“…베릴?”
쓰러졌다 일어난 베를리아가 깨어나자마자 다급하게 자신을 껴안으니 메리쉬의 목소리에 진한 걱정이 담겼다. 그가 그녀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제게 둘린 팔을 풀기 위한 손짓을 했다.
“잠깐, 잠깐만… 이대로 있어.”
베를리아가 다급하게 말했다. 맞닿아 있으니 메리쉬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 그게 그녀가 이곳에 존재함을 증명해 주는 것만 같았다.
“…얼마든지 계속 이대로 있어도 괜찮아요.”
그녀의 불안함을 눈치챈 것일까, 메리쉬가 베를리아의 등을 토닥였다. 이 손길 역시 아마도 그녀가 베를리아이기 때문에 건네지는 것일 터였다.
그런데 오늘따라 그 행동이 마음을 편하게 했다. 자신이 베를리아가 아님을 알면 거둬질 애정일까 두렵다기보다, 한결같이 변함없는 메리쉬의 사랑이 안온하게 느껴졌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베를리아의 숨이 점차 고른 소리를 내자 메리쉬가 조심스레 물었다.
“성녀가 갑자기 연락을 해 와서 가 봤더니, 베릴이 신전에 쓰러져 있어서 놀랐어요.”
안젤라를 만나러 갔다고 했던 베를리아가 쓰러져 있었다. 그러니 메리쉬는 처음에 당연히 성녀를 의심했다. 그러나 베를리아를 살펴본 결과, 누군가가 위해를 가했다고 하기에는 그녀의 심장 박동도, 호흡도 모두 괜찮았다. 정말로 그저… 잠이 든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의원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하고, 포션도 듣질 않고….”
메리쉬가 흐릿한 표정으로 말을 늘어놓았다. 그런 것들이 통할 리가 없었다. 베를리아는 아픈 것이 아니었으니까.
“꿈에서… 에를니아를 만났어.”
베를리아가 멍하니 입을 열었다. 어쩐지 이 사실을 메리쉬에게 말해야만 할 것 같았다.
“…주신을 만났다고요?”
“나보고 카를로스를 사랑하라고 했어.”
베를리아가 불쾌감에 미간을 찌푸리며 이야기했다. 어째서인지 꿈꿨던 나머지 기억들은 전부 흐릿했다. 꿈속에서 과거의 자신을 만났던 것도 같은데,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이의 모습을 한 자신이 뭐라고 했는지까지도.
“그런데… 흡사 조종이라도 당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일 뻔했고.”
많은 것들이 기억 속에서 사라졌으나, 베를리아는 그 끔찍했던 감각만은 기억했다. 주신 에를니아가 그녀의 눈을 가리고, 뇌리를 파고들어 자신을 백치처럼 세뇌하려던 그 찰나를.
“…성녀가 말하길, 베릴이 아픈 줄 알고 신성력으로 치유를 하려고 했대요.”
베를리아는 새까만 공간이 갑자기 하얗게 물들던 것을 떠올렸다. 어쩌면 안젤라가 그녀의 몸에 주입한 신성력의 탓일지도 모르겠다는 가정이 머릿속에 생겨났다.
“혹시… 리리카가 말하던 위험이 그것 아닐까요?”
베를리아의 말을 들으며 표정을 심각하게 굳히고 있던 메리쉬가 망설이며 말을 꺼냈다. 아마도 그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신성력이 베를리아에게 주는 영향. 그것을 생각하면 메리쉬의 말은 꽤 신빙성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짐작했음에도 그가 말을 망설인 이유는 하나였다. 그 가정이 사실이라면 상황이 아주 나빠지기 때문이었다.
신이 베를리아로 하여금 카를로스를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직접 세뇌를 한다면? 이번에야 운이 좋아 넘어갔다지만, 다음이 없으리란 법이 없었다. 심지어 베를리아와 메리쉬는 이제 곧 에를니아의 힘이 가장 강한 성지로 떠날 예정이었다.
“…꿈속에서 나를 도와주던 목소리가 있었는데.”
베를리아가 중얼거렸다. 누구였을까? 알 수 없었다. 이 세계의 유일신, 에를니아에게 대적할 수 있는 존재라니. 그런 것을 알 턱이 있을 리가.
“리리카를 불러올게요.”
메리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지금은 리리카를 경계하고 말고 할 것이 없었다. 주신 에를니아가 어떤 식으로든 카를로스의 옆에 베를리아를 붙여 놓고자 한다면 그것을 막을 방법을 찾아야만 했으니까.
만약 리리카의 경고가 주신 에를니아의 이런 행위를 두고 한 것이었다면, 그 대비책 또한 그와 논의하는 수밖에 없었다.
메리쉬가 베를리아의 방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리리카가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왔다. 항상 미소하고 있던 리리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진 채였다.
“에를니아가 베를리아 양의 앞에 나타났다고요.”
리리카는 더없이 진지한 얼굴이었다. 아무래도 메리쉬가 그를 데려오면서 상황을 설명해 준 모양이었다. 입가에서 웃음이 사라지자 리리카의 얼굴은 놀랍게도 음울해 보였다. 그리고 의외로, 늘 광대 같던 그 발랄한 목소리보다 가라앉은 그 목소리가 리리카에게 꼭 들어맞았다.
그것은 아마도 리리카가 본질적으로 그런 인간이기 때문일 터였다.
“…벌써 에를니아가 움직일 줄이야.”
리리카가 이를 악물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 말을 메리쉬는 놓치지 않았다. 그가 리리카를 거칠게 돌려세웠다.
“주신이 이딴 식으로 나오리라는 것을 너는 알고 있었다는 말인가?”
메리쉬의 물음이 사나웠다. 알고 있었다면 일이 일어나기 전에 왜 막지 않았는지 화가 났다.
“놔. 네게 이런 식으로 취급받을 만큼 손 놓고 있지 않았으니까.”
리리카가 싸늘하게 메리쉬의 손을 쳐내며 말했다. 평소와 달리 그도 잔뜩 가시가 돋쳐 있었다.
“네가 미리 말을 했으면….”
“나라고 말하기 싫어서 안 말하는 줄 알아…!”
메리쉬의 추궁에 리리카의 언성이 높아졌다. 베를리아가 놀라 그를 쳐다봤다. 리리카가 이렇게까지 격하게 반응할 줄 몰랐다.
왜냐하면 리리카는 지금까지 베를리아가 감시를 하든, 의심하든, 추궁하든… 매번 능글맞게 웃으며 넘기는 게 다였기 때문이다.
제게 닿는 베를리아의 시선에 리리카는 금세 실수했다는 표정이 되었다. 울컥해서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해 버렸다.
리리카가 거칠기 그지없는 손길로 자신의 머리칼을 마구 흐트러트렸다. 그 행동에서 초조함이 느껴졌다.
“이미 일어난 일을 가지고 이야기해 봤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요. 그러니까 리리카… 주신 에를니아를 막을 방법을 알고 있어요?”
베를리아가 메리쉬와 리리카의 대치를 끊어놓으며 말했다. 두 남자 다 그녀의 안위라면 끔찍하게 여기는 까닭에 날이 서 있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 없음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지금 당장은 방법이 없어요.”
리리카가 깊은 한숨을 억지로 삼키며 대답했다. 곧바로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었더라면 이렇게 기분이 더럽지도 않았을 터였다.
“다만 성지에 도착하면 방법이 생기겠죠.”
“성지에요?”
의외의 말에 베를리아가 되물었다. 지금까지 성지에 가는 것을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던 리리카였다. 그런데 그가 성지로 가야 한다고 말할 줄은 몰랐다.
“꿈속에서 베를리아 양을 도와주었다던 그 존재들을 만나려면 성지로 가야만 해요.”
리리카가 말했다. 그것은 어쩌면 베를리아가 그에게서 들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 답이었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다면, 신을 대적할 수 있는 존재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러면 성지로 가야 하는 날을 앞당기도록 하죠.”
이제는 반드시 성지에 가야만 할 이유가 생겼다. 베를리아의 눈동자가 결연히 빛났다.
에를니아가 절대 자신을 조종하게 두지 않을 것이다. 카를로스 따위, 두 번은 사랑하지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