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깽판치는악녀님 (90)화 (90/148)

90화. 신이란 무엇인가?(5)


 

진짜 베를리아도, 그녀도 방금 안젤라가 말한 부분에 대하여 의심한 적이 없었다. 베를리아에게는 돈도 많았고 권력도 있었다. 신전이 베를리아를 건드리면 거기에 상응하는 대가를 돌려줄 수 있을 만큼.

신전이 흑마법을 쓰는 베를리아를 멸시하든 말든 그들은 그녀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신전이 베를리아와 마찰을 빚기 싫어 침묵한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베를리아가 바보도 아닌데, 제가 뒷일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아니 성녀에게 패악을 부린 것 아니겠는가.

“물론 신전이 반응을 보인다고 해서 베릴을 곧바로 어떻게 처벌할 수는 없었겠지만, 그래도 모든 귀족이 다 알 만큼 저와 베릴의 사이가 좋지 않았잖아요. 그런데도 신전은 가만히 있었죠.”

베를리아가 가진 의문을 알아차린 듯이 안젤라가 말을 이었다.

“원래라면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조용히 있을 수 없었을 텐데 말이에요.”

안젤라는 성녀로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으나 신전이 추구하는 바가 제 뜻과 완벽히 일치하지 않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신전은 그들의 이익과 정치, 권력을 놓지 않았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터였다.

그래서 체면이 중요했다. 신전에서 성녀나 교황보다 위에 있는 자는 없었다. 그런 성녀가 모욕을 당했다. 그것도 신전이 매번 견제하고 있는 황실과 귀족들의 앞에서, 누구나 알 만하게.

“그냥 넘어간 것에 대하여 신전이 우습게 보일지도 모른다고 길길이 날뛴 사람들도 실제로 있었고요.”

베를리아의 표정에 설마하는 심정이 어렸다. 안젤라가 저렇게까지 말하니 그녀도 신전이 그저 침묵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 과정에서 굳이 개입하여 신전이 나서지 못하도록 막아설 자, 누구겠는가.

“……황태자가 막은 건가요?”

자신의 입으로 말을 내뱉으면서도 베를리아의 얼굴에는 불신이 가득 드러나 있었다. 마치 카를로스가 자신을 위해 그렇게 할 리 절대 없다는 듯이.

“달리 누가 있겠어요.”

안젤라가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카를로스가 처음으로 자신에게서 베를리아를 비호했을 때 그녀도 놀랐기는 매한가지였으니까.

“제게 신전의 반발을 억눌러 달라고 하더군요. 아직 베릴이 필요하다면서요.”

‘아직 베를리아의 힘이 필요해, 앤지. 그러니까 네가 조금만 참아 줘. 다음에는 그럴 일 없도록 할게.’

베를리아가 처음으로 안젤라에게 차를 끼얹었던 날, 카를로스는 베를리아에게 불같이 화를 냈으면서도 뒤로는 안젤라에게 그리 말했다.

그래, 처음에는 그저 드레스가 식은 차를 뒤집어썼을 뿐이니까.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에도 같은 일이 반복됐고 그때마다 카를로스는 비슷한 말을 반복하며 안젤라를 달랠 뿐이었다.

“베릴이 다음부터는 그러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했지만, 베릴은 점점 더 저를 미워했고 당신과의 사이는 점점 더 최악을 달릴 뿐이었죠. 그런데도 카를로스는 제게 비슷한 말을 반복했어요. 베릴이 필요하다고.”

“……그걸 참았어요?”

그녀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물론 베를리아가 한 짓이었으니 안젤라로서는 황당할지도 모르지만…… 제 연인이 그런 식으로 나오는데도 참았다는 사실을 듣고 있자니, 제 일이 아닌데도 답답했다. 그런 마음에 건넨 무의식적인 질문이었다.

“……그러게요, 제가 왜 참았을까요.”

안젤라가 다시 한번 쓰게 웃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었다. 왜 그런 일을 자신이 계속해서 참고 있었던가? 안젤라는 말을 할수록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표정이 되어갔다.

왜였을까. 사실 답은 간단했다. 사랑해서. 두 사람 모두 그 답을 알았다.

사랑은 한 인간을 바보로 만들기에 차고 넘치는 것이었으니까.

안젤라가 말을 할수록 베를리아의 표정도 미묘해졌다. 비록 그 방식이 제멋대로이기는 할지라도, 안젤라는 카를로스가 마냥 아껴 주고 사랑하는 존재였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베를리아도 알다시피, 어떤 일을 할 때 카를로스는 대부분 안젤라의 의견을 묻지 않았다. 심지어는 온전히 안젤라의 편이 되어 주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그는 언제나 그랬듯이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먼저였다. 그리고 그 법칙에서 안젤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젤라는 카를로스를 사랑했다. 그래서 참고 인내했다.

베를리아가 자신에 대한 카를로스의 멸시조차 사랑으로 덮었듯이.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이란 말인가. 베를리아가 그토록 질투했던 안젤라조차 사랑 앞에서는 그녀와 똑같이 닮아 있을 뿐이라는 게.

“솔직히 제가 베릴에게 잘못을 하긴 했지만, 그게 죽임을 당할 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녀가 움찔했다. 베를리아가 안젤라를 미워할 이유는 있었을지 몰라도 죽일 이유는 없었다. 지극히 맞는 말이었기에 마치 책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러나 안젤라의 어조는 담담했다.

“인제 와서 베릴을 탓하고자 하는 건 아니에요. 다만…… 저를 죽이려고 할 만큼 미워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저는 더는 묵과할 수 없었어요.”

누구라도 그럴 터였다. 제 목숨이 위협받는다는데 가만히 있을 자가 누가 있겠는가.

“최소한 제 몸을 보호할 신전의 기사들이라도 동원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그때, 카를로스가 다시 절 말렸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카를. 나 오늘 죽을 뻔했어!’

그날만큼은 안젤라도 참을 수가 없었다. 이어지는 카를로스의 말은 더욱 그녀를 화나게 했다.

“카를로스는 베릴이 일시적으로 ‘폭주’한 것뿐이니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죠. 그래서 카를이 베릴을 죽이려 할 거라고 정말로 생각하지 못했어요. 매번 그런 식이었으니까. 어쩌면 이조차 베릴에게는 변명 같겠지만 이게 사실이에…….”

“……폭주요?”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안젤라의 말을 끊으며 반문했다. 폭주라니. 처음 듣고 처음 알게 된 일이었다. 베를리아의 미간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그러고 보니…… 베를리아가 어떻게 안젤라를 죽이려고 했더라?’

불쾌감과 위화감이 그녀의 안에서 불쑥 치고 올라왔다. 베를리아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녀가 기억하고 있는 것이라고는 ‘베를리아가 안젤라를 죽이려고 했다.’라는 단편적인 사실 뿐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베릴? 왜 그래요?”

제 이야기를 듣던 베를리아의 낯빛이 갑자기 변하자 안젤라가 걱정스레 물었다. 그러나 베를리아의 귀에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지금 깨달은 사실이 충격적일 뿐이었다.

베를리아가 성녀를 죽음으로까지 밀어 넣으려 했다는 사실은 그녀가 소설에서 읽은 내용이었다. 진짜 베를리아의 기억 속에서 떠올린 적도 없는.

그게 너무나 이상했다. 어떻게 누군가를 죽이려고 한 사실에 대하여, 그 당사자의 기억 속에도 없고 소설 속에서는 달랑 한 줄 즈음으로 묘사된단 말인가?

게다가 만약 겨우 그뿐이었다면, 그녀는 어째서 베를리아가 안젤라를 죽이려고 했다고 그토록 확신했단 말인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기억을 못 하는 걸까?’

그나마 지금 할 수 있는 가정 중에 가능성이 있는 것은 그녀가 소설의 내용을 잊어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가설마저도 금방 그녀의 안에서 힘을 잃었다.

잊어버린 것과는 달랐다. 드문드문 떠오르지조차 않았다.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기억도 나지 않았다.

‘……소설, 소설 제목이 뭐였지?’

그녀가 다급히 머릿속을 더듬었다. 무언가 두려움이 엄습했다. 멀쩡히 디디고 있던 땅이 푹 꺼지는 느낌이었다.

소설의 제목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저자는? 책은 어디서 샀더라? 그걸 왜 읽게 됐지? 어떻게 생긴 책이었더라?’

그녀의 안에서 무수한 물음표가 생겨났다. 그러나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단 하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녀는 책을 읽고 나서 소설 속의 ‘베를리아 리들턴’을 한심하게 여기면서도 연민했다. 그리고 카를로스를 증오했으며, 리암이나 데니안도 싫었다. 안젤라에 대한 반감도 가지고 있었다.

그 모든 감정의 시발점이 소설이었다. 그토록 강렬한 감정들을 가져다준 소설에 대해서 제목조차도 생각나지 않는 상황이었다.

“베릴……!”

안젤라가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베를리아가 순간 휘청거린 탓이었다. 다행히도 소파에 앉아 있던 탓에, 바닥으로 넘어지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괜찮아요? 갑자기 왜 그래요?”

안젤라가 안절부절못하며 물었다. 그녀가 걱정이 담긴 표정으로 말했다.

“어디가 아픈 건가요? 제가 치유라도…….”

안젤라의 손에서 순간 새하얀 신성력이 빛을 발했다. 그러자 속이 울렁거렸다. 베를리아는 무언가 역류할 것 같은 기분에 제 입을 다급히 막으며 안젤라를 밀어냈다.

“괜찮아요, 괜찮으니까…….”

베를리아가 신성력으로 치유될 수 없다는 사실은 그녀의 측근이나 카를로스가 아니면 몰랐다. 그러니 안젤라가 일부러 그랬을 리는 없지만, 신성력이 베를리아에게 아주 잠깐 닿았을 뿐인데도 속이 가라앉질 않았다.

‘나는 ……가 아니야.’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그 기억은 혼란스러운 머릿속에 뒤섞여 그녀를 더더욱 괴롭게 했다. 울렁거리던 속이 더 헤집어지는 느낌에 그녀는 숫제 눈이 꼴딱 넘어갈 것 같았다.

‘그럼 네가 대체 누구라는 거니!’

신경질적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음성은 지치고 낡아 있었다. 마치 언제라도 포기하고 싶은 것처럼.

목소리 중 하나는 어렸고, 하나는 꽤 나이 있는 사람의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 목소리들을 모두 이미 들어 본 적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박유빈이 아니야.’

아이의 음성이 다시 귓가에 들어왔다. 박유빈. 그것은 그녀가 어쩐지 떠올리지 못했던, 베를리아가 되기 전의 이름이었다.

현대 세계에서, 한 때의 ‘그녀’이자 더 이상 ‘그녀’가 아닌 아이는 자신의 이름을 끊임없이 부정하고 있었다. 이 역시도 그녀의 기억 속에는 없는 일이었다.

‘내가…… 어려서 저런 말을 했던가?’

기억이 떠오르면 떠오를수록 머리가 아팠다. 그녀의 부들거리는 손이 겨우겨우 소파를 집고 제 몸을 지탱했다.

‘나는 ……야.’

그러나 다음으로 아이가 자신이 누구인지 말하는 순간, 머리를 커다란 바늘로 푹 찔린 것처럼 커다란 고통이 밀려들었다.

“베릴……!”

경악에 찬 안젤라의 외침이 들려왔다. 그러나 베를리아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대로 눈꺼풀이 제멋대로 감겨 버렸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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