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신이란 무엇인가?(4)
‘네놈은 어차피 이 힘에서 멀어질 수 없을 게야, 내가 그렇듯… 네놈의 본질도 이쪽이니까.’
네멘 리들턴은 메리쉬의 타락을 장담하듯 말했었다. 그때, 메리쉬는 자신이 베를리아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럴 수도 있었으리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인간들이 거부감을 가지는 흑마법에 메리쉬만은 유독 반감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때, 네놈은 이 힘이 탐나지 않더냐?’
베를리아가 강해질수록 메리쉬에게 건네지는 네멘 리들턴의 제안은 은밀해졌다. 아마 네멘 또한 알았으리라. 어느 순간부터 베를리아가 자신보다 강해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네멘을 치기 전까지, 베를리아가 그야말로 몸을 납작 낮추고 있어 처음에는 들었던 의심조차도 희미해진 모양이었지만.
‘그럴 일 없습니다.’
어쨌든 그때는 단호하게 거절했었다. 메리쉬가 네멘 리들턴의 수작에 넘어가는 것을 베를리아는 바라지 않을 테니까.
그렇지만 네멘이 그토록 메리쉬를 탐냈던 것을 보면, 분명 그에게 흑마법에 관한 그만한 자질이 있을 터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육체가 건강할수록 저주도 더 잘 견딜 수 있었다. 그리고 메리쉬는 그 누구보다 강건한 신체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카를로스를 죽여도 그 몫의 저주까지도 감당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니까 제게 저주를 넘겨 주세요, 베릴. 언제까지고 황태자에게 그것으로 약점을 잡힐 수는 없잖아요.”
메리쉬가 다시 한 번 강하게 베를리아에게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이 이야기는 두 번 다시 꺼내지 마.”
평소 같았다면 베를리아의 반대에 수긍했을 테지만, 그녀의 저주에 관한 일이었다. 메리쉬는 베를리아가 재고해 주기를 바랐다.
“그렇지만 베릴….”
“멜!”
그러나 그런 메리쉬의 목소리를 베를리아의 날카로운 부름이 끊어냈다. 그의 애칭을 신경질적으로 부르는 그녀의 행동에 메리쉬의 몸이 움찔했다.
베를리아가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로 메리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어쩐지 메리쉬가 제 저주를 받아 가겠다고 한 순간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종래에 남은 것은 거부감이었다.
그 감정이 지나치게 강렬하여 마치 이런 일을 전에도 겪은 적이 있는 것만 같았다. 그것도 안 좋은 방향으로.
“나는 말했어. 또 이야기하지 말라고. 이 이야기는 없던 걸로 쳐.”
전에 없던 강압적인 베를리아의 반응에 메리쉬는 당혹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알겠어요, 베릴.”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를리아의 단호한 얼굴에는 변화가 없었고 결국 메리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이야. 절대 그런 짓 하지 마.”
한 번의 긍정만으로는 안도가 되지 않는 듯이 베를리아가 재차 당부했다. 메리쉬가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뺨을 감싸며 물었다.
“베릴, 내 말이 당신을 불안하게 했나요?”
메리쉬의 손가락이 지그시 베를리아의 아랫입술을 눌러 다문 입술을 열리게 만들었다. 그녀가 멈칫했다. 베를리아는 그제야 자신이 입 안쪽의 여린 살들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어찌나 괴롭혔는지 혀끝에 조금 비릿한 맛이 감돌았다.
“미안해요, 베릴이 이렇게까지 싫어할 줄은 몰랐어요. 제가 괜한 말을 꺼냈어요.”
메리쉬가 조곤조곤 베를리아를 달랬다. 그의 손이 등을 쓸어 주자 긴장으로 굳어 있던 그녀의 몸이 풀렸다.
그저 하나의 가정일 뿐이었다. 그런데 왜 그토록 불안했을까? 그녀는 자신의 반응을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도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때때로 지나치리만큼 ‘베를리아’에게 이입한다는 사실을.
만약 메리쉬와 저주에 관련하여 무슨 일이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본디 그녀의 것이 아닌 ‘베를리아’의 경험이자 기억이었다. 그러니 그녀가 ‘베를리아’와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그녀의 반응은 과민했다.
“…아냐, 괜찮아. 저주는…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
그녀가 애써 그럴싸하게 웃어 보이며 답했다. 기분이 미묘했다.
왜 하필 베를리아 리들턴에 빙의하는 사람이 그녀야만 했을까? 어쩌면 처음 이곳에 온 날 했어야만 했을지도 모를 의문이 떠올랐다.
“그래요, 우리 같이 찾아봐요. 베릴.”
메리쉬가 베를리아의 불안을 달래듯이 나긋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팔로 그를 감싸 끌어당겨 안았다. 맞닿은 몸을 통해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그런데도 어쩐지 불안감은 여전히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지나치게 익숙하고 많은 것에 기시감이 드는 세계.
도대체 이 세계는 그녀에게 무엇을 바라 그녀를 이곳으로 불러들였는가. 무언가 놓치고 있는 것만 같은, 무지에 대한 두려움. 그것이 자꾸만 그녀를 엄습했다.
***
“오랜만이에요, 안젤라.”
베를리아가 성녀의 응접실에 들어서며 말했다. 사실 역병이 지나간 지도 얼마 지나지 않은 터라 아주 오랜만은 아니었다. 다만 그 짧은 사이에도 많은 일이 일어나, 체감상 많은 시간이 지난 것처럼 느껴졌을 뿐이었다.
“…어서 오세요, 베를리아.”
안젤라는 성정상 찾아온 베를리아를 박대하지 못하면서도, 그녀를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럴 만도 했다. 베를리아가 안젤라를 찾아올 때마다 매번 폭탄이 떨어졌으니까.
안젤라가 크게 숨을 들이켰다가 내쉬더니 베를리아에게 자리를 권했다.
“앉으세요.”
베를리아가 자리에 앉자 안젤라 또한 맞은편에 앉았다. 안젤라는 여전히 들려올 말을 무서워하면서도 베를리아를 똑바로 바라봤다. 더 이상은 아무것도 피하지 않겠다는 듯이.
“긴장하실 필요 없어요, 그저 해명하러 왔을 뿐이니까.”
베를리아가 일부러 더욱더 부드럽게 말투를 가다듬어 말했다. 긴장한 안젤라를 나름 배려한 행동이었다.
애초에 나쁜 놈이 누구인지는 확실했고, 안젤라는 자신의 잘못을 베를리아에게 이미 사과했다. 베를리아 또한 그녀에게 한 모든 행동이 떳떳한 것은 아니었으니 더 이상 반감은 없었다. 도리어 안젤라는 인간적으로 호감이 갈 법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굳이 사이를 나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해명이요?”
안젤라가 의아한 표정을 했다. 그에 베를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원해서 황태자와 함께 성지에 가는 게 아니에요.”
안젤라가 움찔했다.
“카를이 함께 가자고 하던가요?”
그녀의 말투는 조심스러웠으나 망설임은 묻어 있지 않았다.
카를로스에게 그의 반쪽과 함께 성지에 오라는 신탁이 내려왔을 때, 안젤라는 당연히 자신이 가게 될 거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카를로스에게서 성지에 함께 가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으나 어딘가 찜찜했고 그저 기쁘지도 않았다.
그건 안젤라가 카를로스의 말을 더 이상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인정했다. 자신이 제 연인에 대한 의심을 품게 되었음을.
안젤라는 카를로스를 쭉 믿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젤라의 신뢰에 답하지 않은 것은 카를로스였다. 그녀로서는 어쩔 수 없는, 당연한 일이었다.
안젤라는 최선을 다해 카를로스를 믿었다. 그래서 두 사람의 사이가 이렇게 된 지금, 그녀는 자신이 걱정했던 것보다 아무렇지 않았다.
“…괜찮아요?”
베를리아가 자신도 모르게 안젤라의 눈치를 봤다. 생각보다 안젤라의 반응이 너무 덤덤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베릴, 저는 어쩌면 카를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안젤라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안젤라가 베를리아를 두고 황태자를 빼앗았다며 자랑하러 왔다고 오해할 사람이 아닌 것은 알았다. 그러나 베를리아도 안젤라에게서 이런 반응이 돌아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베릴, 이미 지난 일이지만… 제가 카를은 절대 당신을 죽이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었다면 믿어줄래요?”
안젤라의 말은 매우 뜬금없었다. 베를리아는 의아함을 드러내면서도 그녀의 이야기를 끊지 않고 들어주었다.
“떠올려 보면 저는 베릴이 무서웠어요.”
이 또한 베를리아는 처음 듣는 말이었다. 소설 속에서 안젤라는 베를리아에게 늘 상냥하고 다정했다. 자신을 해치려고 한 여자에게까지 관대하게 대해 주는 사람.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안젤라는 말 그대로 ‘성녀’였다. 그게 다른 이들로 하여금 더욱 베를리아를 비난하게 만들기도 했고.
“그렇잖아요. 저도 사람인데, 저를 압도하는 힘을 가졌고 저를 해치려고 하는 상대를 어떻게 무서워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안젤라가 작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무서워만 했겠어요? 내가 무얼 그렇게 잘못했길래 나한테 이러나, 조금은 밉기도 했죠.”
“…성녀님이 나를 미워했다고요?”
베를리아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베를리아의 기억 속에서도 안젤라는 오히려 늘 그녀에게 미안하다는 듯 굴었기 때문이다. 베를리아가 아등바등하여 가진 사람들을 빼앗았다는, 그런 미안함. 그리고 안쓰러움. 분명 그런 감정들이 진짜 베를리아로 하여금 안젤라에 대한 반감을 불어넣었었다.
그녀에게 적개심을 드러내도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 안젤라의 모습은 베를리아로 하여금 스스로의 초라함을 더욱 도드라지게 보이도록 했으니까.
상대를 끔찍하게 미워하는 사람과, 그런 미움도 받아들이며 도리어 품어 주려는 상대. 두 사람은 절대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이었다.
그런데 안젤라가 베를리아를 미워했다고 한다. 그것은 마치 그녀도 한 인간에 불과하다, 스스로 그리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베릴에게 나쁘게 굴 수 없었어요.”
안젤라가 쓰게 웃었다. 자신이 성녀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카를은 나를 사랑해요. 그렇지만… 그 사랑으로 인해 베릴을 버리지는 않죠. 그래서 아무렇지 않은 척, 베릴과 잘 지내보려고 한 거예요.”
그녀는 안젤라의 말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소설 속에서, 진짜 베를리아의 기억 속에서… 카를로스는 언제나 베를리아를 두고 등을 돌렸다. 그 앞에는 안젤라가 있었다. 카를로스는 수십, 수백 번 기꺼이 베를리아를 버릴 사람이었다.
“나는 앤지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그녀가 결국 답답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안젤라가 느릿하게 대답했다.
“베릴이 무려 성녀인 날 그렇게나 공격했는데도, 신전 측에서 큰 문제가 없었던 거…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