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깽판치는악녀님 (88)화 (88/148)

88화. 신이란 무엇인가?(3)


 

베를리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카를로스 에덴버가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이토록 그녀를 성지에 같이 가게 만들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의 상황은 주신 에를니아의 탓에 카를로스에게 지극히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니 그가 저토록 우긴다면 베를리아는 성지에 가게 될 확률이 높았다. 카를로스의 말대로 황제의 명령에 의해서든, 신의 계시에 의해서든.

‘잘 들어요, 베를리아 양. 성지는 당신을 위험에 빠트릴 거예요.’

리리카의 말이 떠올라 잠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렇지만 이것은 베를리아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그녀가 대답을 내놓았다.

“좋아, 성지에 가 주지. 대신 조건이 있어.”

물론 어쩔 수 없다고 해서 순순히 당해 줄 생각은 없었다.

“성녀님도 함께 가. 그게 아니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 또한, 네가 원하는 바가 어긋나게 할 거니까.”

카를로스가 저따위로 나오겠다면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가 어떻게 망하는지를 보여 주면 될 일이었다.

“그건…!”

베를리아의 말에 카를로스가 움찔했다. 그도 베를리아와 안젤라를 함께 두는 일이 자신에게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베를리아가 그런 그의 모습을 비웃기도 전에, 그는 돌연 태도를 바꾸어 그녀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메리쉬도 데려갈 거야.”

카를로스의 대답조차도 베를리아에게 반감을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그녀의 말에 그가 확 미간을 찌푸렸다. 카를로스의 반응이 방금 전 베를리아가 성녀를 언급했을 때보다 더 노골적이었다.

물론 카를로스의 허락 따위는 베를리아가 알 바 아니었다. 그가 찬성하든 거부하든 메리쉬와 같이 갈 방법은 아주 많았으니까.

“…대신 내 행렬에 참여하도록 해.”

카를로스의 말이 가진 의도가 선명했다. 황태자의 행렬에 낀다는 것은 현재 베를리아의 애매한 위치를 더욱 모호하게 만들 우려가 있었다. 아직까지도 그녀가 황태자에게서 정말로 등을 돌린 게 맞는지 의심하는 자들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 정도도 하지 않을 것이었다면 카를로스가 협박까지 해서 베를리아를 함께 가게 만들려고 하지 않았을 터였다.

“하, 그래. 어디 한번 네 마음대로 해 보던지.”

기가 차 헛웃음이 흘렀다. 베를리아가 카를로스를 매섭게 노려보더니 홱 돌아섰다.

“잠깐….”

“뭐, 할 말 다 끝난 거 아냐? 너랑 나 딱히 사담 나눌 사이는 아니잖아?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가 싫어. 네 얼굴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니까. 그러니 이만 물러나도 되겠지요, 황태자 전하.”

베를리아가 짜증스럽게 말을 연이어 뱉어냈다. 카를로스가 끼어들 틈조차 주지 않으려는 속셈이었다. 사납게 쏘아 붙여지는 말에 굳어 버린 카를로스를 뒤로 둔 채 그녀는 마침내 자신의 의도대로 황태자의 개인 응접실을 빠져나왔다.

쿵.

베를리아의 사감이 들어가서일까, 본래라면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을 거대한 문이 오늘따라 닫히는 소리가 요란스러웠다.

***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성국에 가야만 하게 됐어요.”

베를리아는 리들턴 저택에 돌아오자마자 리리카를 찾았다. 그가 경고했던 일이 무용지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도 가기 싫었지만, 황태자가 같이 가자는 제안을 거부하면 신탁에서 언급된 자신의 반려를 나로 지목하겠다고 억지를 부려서 어쩔 수 없었어요.”

“빌어먹을 에를니아가 또 방해가 되는군요.”

리리카의 어투가 대단히 불손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평소처럼 웃고 있었기에 전혀 욕 같지 않은 것이 도리어 괴리감을 만들어냈다.

“…그렇다면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느라 뜸을 들이던 리리카가 말을 꺼냈다.

“베를리아 양에게 무슨 일이 있을 때 제가 근처에 있으면 빠르게 도와줄 수 있을 거예요”

그 ‘무슨 일’이란 그녀가 ‘베를리아’가 아니게 되는 일을 말할 터였다. 입술을 꾹 눌러 다물고 있던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는 제가 준비하도록 하죠.”

아직은 리리카의 정체가 밝혀질 때가 아니었다. 그가 누구의 핏줄인지, 신성력을 얼마만큼 가졌는지 같은. 그러니 많은 것을 숨긴 채로 동행하려면 대비가 필요할 터였다.

***

리리카가 방에서 나간 후 메리쉬가 들어왔다. 그녀가 ‘베를리아’가 아니게 될지도 모른다는 문제에 대해서는 메리쉬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았기에 일부러 그가 없는 틈을 타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었다.

“멜, 황태자와 함께 성지에 가게 됐어.”

“그 놈이 또 무슨 짓을 한 건가요?”

베를리아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메리쉬가 다가와 걱정스레 그녀를 살펴보며 말했다. 신성력을 가까이 하면 그녀의 저주가 심해지니 성지에 가지 않을 것이라고 이미 메리쉬에게 말해 둔 터였다. 그런데 베를리아가 말을 바꿨으니 메리쉬는 카를로스가 무언가 수작을 부렸다고 짐작한 모양이었다.

“동행하지 않으면 신탁의 반려로 나를 걸고넘어지겠다고 했어. 그렇게 됐으니 신성력이 내 저주에 주는 영향을 대비하려면 비밀리에 리리카를 행렬에 포함시켜야겠지.”

짧은 대화가 몇 번 오간 것만으로도 메리쉬는 상황을 모두 이해한 듯했다. 그의 눈매가 가늘어지더니 살벌한 기세가 흘러나왔다.

베를리아가 카를로스 따위 털어 버리려고 해도, 그는 마치 더러운 늪처럼 매번 그녀의 발목에 달라붙어 질척이고 있었다. 그 얼룩이 자꾸만 베를리아를 물들이려는 게 메리쉬는 대단히 탐탁지 않았다.

메리쉬가 조심스레, 그러나 단호한 손길로 베를리아를 끌어당겨 안았다. 그가 나직하게 물었다.

“베릴, 당신의 저주… 내가 가져갈까요?”

“멜!”

순간 베를리아가 기겁하여 메리쉬의 가슴을 손으로 밀어냈다. 그러나 단단한 감촉만이 그녀의 손바닥에 닿았을 뿐,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흑마법은 참으로 그 목적에 충실한 마법이었다. 흑마법이란 도덕이나 당위성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시전자가 원하는 바를 이뤄준다. 사실 베를리아가 제 저주를 치워 버리고자 했더라면 진즉에 그럴 수 있었을 터였다.

제 저주를 다른 이에게 옮김으로써.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저는 감당할 수 있어요.”

메리쉬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나 베를리아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용납할 수 없어.”

단 하나뿐인 방법. 베를리아가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저주를 가져갈 자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고 죽으면 애먼 목숨만 잡는 일이 될 뿐더러, 그 상대가 죽음으로써 저주가 베를리아에게 되돌아오는 순간 그녀도 커다란 타격을 받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저주를 받은 자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잠시 앓다 말지, 미칠지 혹은 죽을지조차.

베를리아가 흑마법으로 건 저주를 견디고 있는 것은 순전히 네멘 리들턴의 탓이자 덕이었다. 그에 의해 흑마법을 부리기에 적절한 몸으로 개조당한 그녀였기에 저주를 받고도 미치거나 죽지 않은 것이었다.

“그리고 너를 두고 실험하기도 싫어, 멜.”

네멘 리들턴의 실험에 어린 날부터 호되게 시달렸다. 그런 베를리아가 인간을 두고 하는 실험을 꺼리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 설령 저주를 건네받을 자가 죽어 마땅한 존재일지라도 그 목숨을 대가로 실험 삼아 제 저주를 없애고 싶진 않았다.

그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소설이 아닌, 인권이 있는 현대의 삶을 살았던 그녀로서는 베를리아의 기억 속에 남은 네멘 리들턴의 실험을 떠올리면 역겨울 지경이었다. 그런데 심지어 메리쉬를 두고 실험 같은 일을 하라니. 절대 하고 싶지 않았다.

“알잖아요, 베릴. 그때 당신이 막아서지 않았으면 네멘 리들턴의 완성품은 제가 되었을 거라는 사실을. 그러니까 전 견딜 수 있어요.”

메리쉬가 조곤조곤 베를리아에게 속닥였다. 카를로스를 죽이지 못하는 이유는 오직 베를리아를 위해서였다. 그게 아니라면 그가 황태자 따위 죽이지 못할 까닭이 없었다.

게다가 사실 메리쉬의 신체는 베를리아보다 흑마법과 상성이 좋았다. 어린 날 소녀가 ‘쓰레기장’에서 소년을 주워왔을 때, 네멘 리들턴이 그를 매우 탐냈을 만큼.

‘그 힘은 내 것이에요.’

네멘 리들턴은 탐욕스러운 자를 좋아했다. 어린 베를리아가 네멘의 앞을 막아선 채 그렇게 말하지 않았더라면, 네멘은 메리쉬를 자신의 완성품으로 만들려고 했을 터였다.

어차피 네멘 리들턴은 실험체가 죽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자였다. 그 후로 네멘 리들턴이 베를리아에게 하는 실험은 더더욱 가혹해졌다.

‘네 탐욕이 이 고통을 어디까지 견디게 할지 궁금하구나.’

소녀가 실험으로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흑마법에 대한 탐욕을 드러낸 탓이었다. 그것이 네멘 리들턴의 흥미를 끌었다.

소녀는 견디고 견뎠다. 그리고 결국 살아남았다.

그러나 메리쉬는 잊지 않고 있었다. 소녀가 실험실로 끌려 들어가기 전이면 매번 고통을 잊으려 독초를 집어먹었음을.

네멘 리들턴의 온실 한가득 다양하게 자리 잡은 것이 독초였으니 구하는 일은 힘들지 않았다. 실험은 ‘쓰레기장’에서 주워진 소년조차 두려움에 떨 만큼 지독했다. 고통에 죽은 게 아니라 미쳐 버린 네멘의 실험체가 몇이던가. 그리하여 소녀는 미치지 않기 위하여, 견디기 위하여 독초로 제 감각을 마비시켰다.

베를리아의 신체가 그리 건강하지 못한 것은 그 탓 또한 있었다. 메리쉬는 알고 있었다. 소녀에게는 네멘 리들턴처럼 모든 마법사와 세상의 위에 올라서겠다는 야망 따위 없었다. 소녀의 욕망은 오직 행복해지고 싶다는 것뿐이었다.

그런 소녀에게 정말로 남들이 모두 배척하는 그 힘이 필요했던가? 답은 정해져 있었다.

‘쯧, 그때 네놈으로 할 것을.’

결국 베를리아의 안에 흑마법이 자리 잡았으나, 네멘은 훗날 두고두고 메리쉬를 아쉬워했다. 흑마법의 여파로 허약해진 베를리아의 육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베를리아가 커 갈수록 네멘은 메리쉬에게 손을 뻗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멘이 때때로 음흉하게 웃으며 하던 말을 메리쉬는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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