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신이란 무엇인가?(2)
“베를리아 양에게 일반적인 신관들의 성력이 독이듯이, 그 힘의 집합체인 성지는 더더욱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거예요.”
리리카가 단언했다. 그는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베를리아를 만류하고 있었다.
“…어떤 영향을 끼치는데요?”
베를리아가 질문을 건넨 것은 고의적인 일이었다. 리리카의 말을 믿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지켜봐 온 바에 의하면 그는 그녀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하는 법이 없었으므로. 다만 워낙 확신했기 때문에 의문이 생겼을 뿐이었다.
“…베를리아 양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두루뭉술한 말이었다. 베를리아가 입을 다물고 빤히 리리카를 바라봤다. 지금 그의 말만으로는 무엇이 그리도 심각한지 알 수 없었다.
“리리카, 나는 당신이 내게 해를 끼치지는 않으리라 생각해요.”
베를리아가 솔직하게 말을 꺼냈다. 애초에 그녀가 리리카와 재고 따지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었다. 리리카가 아는 것을 베를리아는 모르니까.
“그렇지만 리리카가 걱정하는 게 무엇인지 제대로 말해 주지 않으면 나는 판단을 할 때 망설일 수밖에 없어요.”
지금 귀족들은 다들 몸을 사리고 있었다. 사실 처음부터 카를로스의 정통성에 문제가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부터 귀족들까지 모두가 작당하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이런 무리한 일을 벌이지도 않았을 터였다. 그런 상황에 황제는 발을 빼고, 카를로스는 신으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았다. 황태자의 모후와 황태자를 모함하였다고 하여 역풍을 맞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니 다들 바라는 것이다. 그 역풍을 맞는 대상이 자신만은 아니기를.
그리고 이 모두가 주신 에를니아의 탓이었다.
인간들이 다 같이 작당을 해도 단 한 번에 일을 뒤엎어 버리는 것이 신의 존재였다. 그러니 대단한 이유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맘 편히 카를로스가 성지에 가게 둔단 말인가.
“어쩌면… 당신의 자리를 빼앗길지도 몰라요, 베를리아 양.”
베를리아의 진지한 말에 결국 리리카가 넌지시 말을 이었다.
“당신이, 더 이상 ‘베를리아 양’이 아니게 될 수도 있어요.”
리리카의 말을 듣는 순간 문득 육체를 점령하려 들던 진짜 베를리아가 떠오른 것은 우연이 아닐 터였다. 그녀의 머릿속에 가정 하나가 자리 잡았다.
“혹시… 신성력을 가까이할수록 내게 그런 영향을 끼치나요?”
리리카가 처음부터 끝까지 속 시원하게 이야기해 줄 수 없다면 말해 줄 수 있는 부분이라도 확실히 해야 했다. 진짜 베를리아의 의식이 나타나던 시점을 생각해 보면 그녀는 자신의 가정이 꽤 그럴싸하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카를로스에게 진짜 베를리아의 의식이 반응해서가 아니라, 요 근래에 신관들을 자주 만났기 때문에 진짜 베를리아의 의식이 깨어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맞아요, 신성력은 베를리아 양의 모든 것을 약화시켜요.”
짧게 한숨을 내쉰 리리카가 체념하듯이 사실을 인정했다. 그 한숨이 베를리아를 향한 것 같지는 않았다. 도리어… 그 모습은 정말 스스로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는 듯하여 그녀는 잠시 기분이 미묘해졌다.
“이왕이면 황태자도 멀리하는 게 좋을 테지만, 우선은 성검이 없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에덴버의 핏줄이 에를니아의 힘을 받았다는 것은 거짓이 아니거든요.”
그건 베를리아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원작에 그렇게 나와 있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신관들이 사용하는 신성력은 대체로 에를니아의 것이죠.”
“…지금 리리카의 말은 마치 에를니아의 힘이 내게 해가 된다는 것처럼 들리는데요.”
리리카는 주신을 두고 신관들이 들으면 불경하다 싶을 만큼 에를니아의 이름을 노골적으로 부르고 있었다. 게다가 리리카가 사용하는 신성력은 괜찮아도, 카를로스나 현존하는 신관들의 존재가 위험하다는 것은 더더욱 신성력보다 에를니아의 힘 자체가 문제인 것처럼 여겨졌다.
“베를리아 양은 똑똑하니까요.”
싱글싱글 웃음 지은 리리카는 능청을 떨 뿐 확답은 내려 주지 않았다. 그러나 경험을 통해, 베를리아는 그것이 그의 답임을 알아차렸다.
“…하여간 당신은 이상한 사람이에요. 그냥 시원하게 대답하면 될 것을.”
베를리아가 혀를 찼다. 리리카는 매번 이런 식이었다. 그녀가 물으면 답을 해 주면서도 자꾸만 말을 뱅뱅 돌리는 게.
“그래서 성검이랑 카를로스랑은 또 무슨 관계인데요?”
“성검이 그 핏줄 안에 있는 에를니아의 힘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주거든요.”
베를리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역시나 리리카는 이번에도 어째서 그렇게 되는지 같은 것은 설명해 주지 않았다.
“에를니아에 대해서는… 내가 교황의 자리에 오르면 방법이 생겨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나를 믿어줘요.”
리리카가 간곡히 당부했다. 지금까지 그가 이유 없이 베를리아에게 저런 말을 한 적은 없었다. 그녀도 그것을 알면서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 차라리 카를로스가 없는 동안 신전에 밑 작업을 해 놓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어.’
교황의 자리를 결정하는 큰 요소는 당연히 신성력이었다. 그러나 역대 교황의 자리에 무조건 신성력이 강한 자들만이 올랐던 것은 아니었다.
교황은 신전에서는 성녀와 동등한 권위를 가지며, 외부에서는 정치적으로 황제와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교황을 뒷받침해 줄 세력인 신전 내부의 지지도 중요했다.
에를니아의 성지는 산속 깊은 곳에 있는 탓에 접근성이 매우 나빴다. 그래서 보통은 신전에서의 출세에 관심이 없는 자들이나, 나이가 들어 명예 직위만을 달고 있는 신관들이 주로 그곳에 상주했다. 따라서 신전의 권력층은 이 에덴버의 수도, 중앙 신전에 몰려 있었다. 그러니까 물 밑으로 갑자기 나타날 리리카에 대한 지지를 끌어모으기 위해서는 카를로스가 수도에 없는 편이 훨씬 나았다.
“…알았어요, 그러면 수도에 남아 있을게요.”
판단을 끝마친 베를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도 므시아에는 능력 있는 수하들이 많았으니 그녀가 굳이 굳이 카를로스를 쫓아가지 않아도 어느 정도 그녀의 부재를 메워 주리라.
***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삶은 사람이 원하는 방향보다 그 반대로 흘러가는 일이 많은 법이었다.
황제는 완전히 제 아들의 편에 서기로 한 모양이었다. 무려 황제가 직접 내린 명으로 황궁으로 불러들여진 베를리아는 카를로스의 응접실에 와 있었다. 집무실도 아닌, 카를로스 개인의 응접실이었다.
“왜 이딴 곳으로 날 불러, 짜증나게.”
베를리아가 응접실에 들어서자마자 짜증을 뱉었다. 황태자의 집무실도 아니고 침실 옆에 있는 카를로스 개인의 응접실이라니. 누가 봐도 어떤 모종의 사이라고 오해하기 딱이었다. 그러니 그녀의 기분이 나쁘지 않을 수가.
“나와 함께 성지에 가자, 베릴.”
그러나 카를로스는 베를리아가 성질내는 것을 개의치 않은 채 자신이 할 말을 꺼냈다. 그러자 그렇지 않아도 찌푸려져 있던 그녀의 미간이 더욱 팍 일그러졌다.
“내가 너랑 어딜 가? 미쳤니? 머리가 고장 났어? 나는 네 뒤통수 치고, 너는 날 팔아 거래하고. 너랑 내가 어디 뭘 함께 할 사이야?”
그 어이없는 말에 베를리아의 비난이 이어졌다. 정말이지, 기가 막혔다. 그녀는 카를로스의 뻔뻔함이 가진 철판의 두께가 얼마인지 벗겨 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주신 에를니아께서 나에게 내 반쪽과 같이 성지에 오라고 하셨지.”
카를로스는 베를리아의 그런 비난쯤은 마치 예상했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그 말에 막힘이 하나도 없으니 베를리아는 그것이 더더욱 아니꼬울 수밖에 없었다.
“개자식.”
카를로스가 뒷말을 잇지 않아도 뒤따라 나올 내용을 알아차린 베를리아가 욕설을 내뱉었다.
“그렇게 말해도 상관없어. 네가 만약 나랑 함께 가지 않겠다면, 신이 말한 그 반쪽이 너라고 말할 테니까.”
그렇지만 카를로스는 베를리아에게 하도 욕설을 들어먹으니 이쯤이야 아무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끄떡없이 이미 자신이 생각해 둔 바를 입에 담았다.
“하, 성녀님은 어쩌고? 네가 나를 반쪽이라고 소개하면 성녀님이랑은 완전히 끝일 텐데?”
“내가 그것도 감안하지 않고 베릴 네게 말하는 것 같아?”
카를로스의 푸른 시선이 베를리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시선만 보면 마치 카를로스가 대단히도 베를리아를 사랑한다고 착각할 법도 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것이 아주 많이 역겨웠다.
“나랑 되도 않는 말장난 치지 마, 카를로스 에덴버.”
베를리아의 얼굴은 어느덧 서늘한 무표정이 되어 있었다. 흡사 카를로스에게 보여 줄 어떤 감정의 편린조차도 아깝다는 것처럼.
“네가 그렇게 내게 애절했으면, 진즉에 성녀랑 헤어지고 내게 잘못을 빌었겠지.”
생각해 보면 우스운 일이었다. 그토록 베를리아에게 돌아오라고 한 주제에 카를로스는 아직까지도 성녀랑 헤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그런 속내가 매우 저열해 보였다.
“…내가 앤지랑 헤어지면, 나에게로 돌아올 건가?”
이 순간에도 카를로스는 자신의 앞에 있는 저울 위의 무게를 달아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착각하지 않았다. 진짜 베를리아라도 알았을 것이다. 카를로스 에덴버는 베를리아 리들턴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저 필요하고 그래서 가지고 싶은 것이다. 꼭 탐나는 물건을 가지지 못하여 두고두고 생각하는 어린 아이처럼.
“너 같으면 멜을 두고 너 같은 놈에게 돌아가겠니?”
베를리아가 노골적으로 빈정거렸다. 저따위를 감히 메리쉬와 같은 선상에 올리다니 지나치게 우스웠다. 카를로스 같은 놈은 애초에 그녀의 선택지에조차 감히 오를 생각도 말아야했다.
“……어쨌든 성지에는 함께 가야 할 거야. 황제의 명령이든, 신의 계시든 뭘 이용해서라도 난 너를 데려갈 테니까.”
카를로스의 말은 숫제 반 협박이나 다를 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