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신이란 무엇인가?(1)
베를리아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어 내렸다. 신이 황태자를 카를로스 ‘에덴버’라고 칭했다. 이제 그가 ‘에덴버’임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모든 일이 수포가 되었다. 그것도 한순간에.
‘에를니아…!’
베를리아에게서 아드득 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표정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여기서 무언가 티를 내서 좋을 게 없다는 것을 이성으로는 알고 있었으나 뭐든지 이성으로 통제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속에서 천불이 들끓었다. 베를리아가 이 순간을 맞이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던가. 그것을 겨우 신 따위가 말 한마디로 전부 무용지물로 만든 것이다!
‘당신은 매번 그딴 식이었지, 항상 이렇게 쉽게 일을 망치고 카를로스를 편애하고…!’
그녀는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인지하지 못한 채로 주신 에를니아를 원망했다. 부글거리는 증오심과 적개심이 머릿속을 붉게 물들였다. 전부 다 쓸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베를리아는 적당히 자신이 챙겨야 할 것들을 챙긴 채, 카를로스만 그 자리에서 끌어 내려놓고 남은 생을 편히 보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카를로스는 망하되 제국은 멀쩡해야만 했다. 므시아가 터를 잡은 곳이 제국이었으니까.
므시아와 제국이 전면전을 벌인다면? 제국이 있기에 귀족들과 신관들의 권력도 유지되는 것이었다. 아무리 므시아라고 할지라도 그런 큰 희생을 치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일순 차라리 모두 망가트려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베를리아도 어쩔 수 없었다.
“신의 아들 카를로스 에덴버, 신의 말씀을 받듭니다.”
카를로스가 빛의 아래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새하얀 광채를 한 몸에 받고 있는 그는 더없이 신성해 보였다. 베를리아는 분노에 몸이 떨리지 않도록 애써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 아직 패 하나가 남았어.’
베를리아가 자신의 손등을 손톱으로 꾹꾹 눌렀다. 가짜 성검의 성력을 거둬들일 수 있던 이유는 그녀가 바로 근처에 리리카를 대기시켜 두었기 때문이다. 베를리아에게서 신호를 받으면 그가 시녀의 안내를 받아 회의실로 들어오기로 했었다.
신호를 주기 직전에 주신 에를리아가 나타난 터였다.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어찌 되었든 이미 엉망이 되어 버린 상황에 리리카라는 패까지 공개되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나의 아들아, 너의 반쪽과 함께 나를 만나러 오거라. 기다리고 있겠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카를로스의 위에서 성스럽게 빛나던 광휘가 사라졌다. 회의장에는 아까와 다른 종류의 침묵이 맴돌았다.
그리고 정적을 깬 것은 환하게 웃고 있는 황제였다.
“오, 카를로스, 내 아들. 네가 신의 계시를 받다니 황가에 더없는 영광이로다!”
황제가 황좌에서 직접 몸을 일으켜 카를로스에게로 다가왔다. 답지 않게 카를로스를 ‘내 아들’ 따위의 호칭으로 칭한 황제는 손수 무릎 꿇고 있던 그를 일으켜주었다.
그에 대다수 귀족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삽시간에 일어난 황제의 태도 변화를 통해 그들도 알아차렸다. 황제가 노선을 바꿨다는 것을!
“모두 부황의 덕입니다.”
카를로스가 겸양을 떨며 말했다. 무엇이 황제의 덕이라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베를리아는 속이 뒤틀리는 것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입매를 굳게 다물었다. 서로 남보다 못한 사이인 주제에 죽이 맞아 살갑게 구니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사람으로서 심히 불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성검의 일은 제가 성지에 다녀온 후에 상세히 진실을 규명하겠습니다.”
주신이 자신에게로 오라는 뜻은 성지로의 방문을 의미했다. 카를로스는 곧 성지로 떠나야 할 터였다.
“오, 아니다. 아니야. 네가 일부러 그리했겠느냐. 마음 넓게 이해하지 못한 내 부덕이로다.”
황제는 카를로스의 말을 부정했다. 그럴 만도 했다. 신의 계시가 이 땅에 내려온 지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나 있었다. 그런데 신전의 성녀나 교황이 받지도 못한 신의 계시를 무려 카를로스가 받은 터였다.
신이 이미 카를로스를 두고 ‘에덴버’로 칭하였으니 그의 정통성은 의심할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그가 자신의 진짜 아들이 맞다는 것은 황제도 알고 있었다.
‘교활한 늙은이.’
베를리아의 눈빛이 사납게 번뜩였다. 황제라고 권력욕이 왜 없겠는가. 일평생을 귀족들을 향해 몸을 낮추며 제 목숨을 부지해 온 황제였다. 그러나 권력욕이 없었다면 황제의 자리에 그렇게까지 비굴하게 남아 있지도 않았을 터였다.
귀족들을 억누를 능력이 되지 않아 그들의 아첨에 대충 맞추며 살았으나 황제는 바보가 아니었다. 이토록 오래도록 황제의 자리에 올라 있는 것만 봐도 그랬다. 그러니 황제도 알았을 것이다. 귀족들이 뒤로는 얼마나 황가를 업신여기고 있는지.
그런데 그런 분위기를 단번에 뒤엎을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황태자인 카를로스가 무려 주신이 직접 언급한 ‘신의 아들’이었으니까.
‘황제에게 다프네 섬의 가장 위대한 성을 주는 것이 아니었어.’
베를리아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황제라고 한들 자신이 갑자기 편을 들어준다고 해서 카를로스가 못마땅한 아비를 그냥 둘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터였다. 그렇지만 이제 황제는 ‘가장 위대한 성’의 소유주였다.
황제는 여차하면 그곳으로 피신할 요량인 것이 틀림없었다. 마법의 집약지인 다프네 섬의 존폐는 ‘가장 위대한 성’의 주인과 함께 결정된다. 그러니 그곳의 마법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므시아도 황제를 보호하는 수밖에 없었다. 황제는 그것을 노린 것이다. ‘가장 위대한 성’의 소유주가 황제라는 것은 카를로스도 모르고 있으니까.
귀족들을 견제해서 황가의 위상을 드높임과 동시에 제 안위를 지킬 방법도 완벽히 마련되어 있었다. 황제가 기회를 노리지 않는 것도 이상했다.
‘거지같은 에를니아, 또 이런 식으로 일을 어그러트려?!’
베를리아의 손에 쥐어진 탁자의 끄트머리가 우그러졌다. 분노에 일순 흑마법을 통제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그것을 깨닫고 그녀가 놀라 빠르게 탁자에서 손을 뗐다.
결과가 이리될 줄 알았다면 결코 쉽게 ‘가장 위대한 성’을 넘겨주지 않았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잠잠하던 주신이 하필 이 때에 끼어들 것을 누가 알았으리란 말인가.
‘카를로스 에덴버…!’
순간 맹렬히 타오르던 베를리아의 시선과 카를로스의 눈이 마주쳤다. 그는 웃고 있었다. 그녀가 일순 턱이 떨릴 만큼 이를 꽉 물었다. 역시 카를로스는 일부러 황제에게 가짜 성검을 언급한 것이 분명했다. 나중에라도 황제나 귀족들이 따로 트집을 잡지 못하도록 일부러 황제에게서 조금 전의 일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확답을 받은 것이다.
“다들 들었겠지.”
황제가 카를로스를 앞으로 내세우며 귀족들을 향해 말했다. 그 얼굴과 목소리가 오만하고 당당하기 그지없었다. 즉위 기간 내내 나라의 이권을 내주고 거기에서 떨어지는 이득이나 받아먹으며 아첨에 취해 살면서도 꿋꿋이 황제 노릇을 해 온 작자였다. 방금 제 아들을 거짓으로 쫓아내려고 했던 것에 대한 수치심 따위 일말도 보이지 않았다.
“황태자가 주신 에를리아 님의 명을 받아 성지순례에 떠나게 되었다.”
황제가 카를로스를 두고 황태자라며 못을 박았다. 카를로스에게 들으라고 하는 말이 분명했다. 두 번 다시 이런 논란은 생기지 않게 하겠노라는 약조였다.
“허니 그대들에게 내 아들을 보필하여 성지로 함께 떠날 일행을 꾸릴 것을 명하노라.”
“그렇지만, 폐하…!”
매사 침착하기 그지없는 아를레나 공작이 드물게 목소리를 높였다. 당연했다. 카를로스가 성지에 간다는 것은, 성지에 황태자로서 이름을 남긴다는 의미였다. 본래라면 황태자의 즉위식 이후 갔어야 했으나 황제의 명이 따로 없었기에 가지 못한 상태였다.
그것은 일부러 여지를 남겨 둔 것이었다. 성지에 이름을 새긴 후에는 카를로스가 불의의 사고로 죽지 않는 한 황태자를 바꿀 수 없으니까.
“신,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황제의 충신인 이아난 공작이 재빠르게 황제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다른 귀족들이 더는 반발을 꺼내지 못하게 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신,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그와 동시에 눈치 빠르게 황태자파와 황제파의 귀족들이 모두 함께 황제의 앞에 부복했다. 그 탓에 이제는 꼿꼿이 서 있는 자들이 눈에 띌 지경이었다.
“신…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결국 모든 귀족이 황제의 명에 무릎을 꿇었다. 그 안에는 베를리아도 포함되어 있었다.
‘…에를니아, 반드시 이 빚은 돌려줄 거야.’
이가 아득 갈리고 수치심이 눈앞을 물들였다. 베를리아는 단언컨대 자신이 이따위로 카를로스의 아래에 무릎 꿇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이대로 포기할 의사 따위 전혀 없었다. 베를리아는 다짐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기필코 배로 돌려주고 말리라.
***
주신이 카를로스에게 내린 빛이 회의장의 밖에서도 보인 모양이었다. 리리카는 곧바로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마차로 돌아가 있었다. 그리고 베를리아가 마차에 타자마자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았다.
“성지 순례를 간다고요?!”
리리카의 목소리가 경악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가 이런 식으로 큰 소리를 내는 것은 처음이라 베를리아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면서도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래요, 아무래도 카를로스 에덴버가 주신과 무슨 작당을 할지 모르니 가까이서 감시하는 게….”
“절대 안 돼요!”
베를리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리리카가 그녀의 말을 끊으며 반대했다. 그 반응이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
“…대체 왜 성지 순례라는 말에 그렇게 과민하게 구는 거예요?”
에를니아가 이런 식으로 개입할 수 있다면, 또 다른 방법으로 끼어들지 말리란 법이 없었다. 베를리아는 또다시 주신 따위가 일을 어그러트려 놓는 것은 분이 터져서라도 사절이었다. 그런데 카를로스가 성지에 가는 것을 어떻게 맘 편하게 멀리서 방관한단 말인가.
“잘 들어요, 베를리아 양. 성지는 당신을 위험에 빠트릴 거예요.”
리리카가 단호히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분명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마치… 겪어 보기라도 한 것처럼.